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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8)화 (48/120)
  • 48화

    “그런데 서식스 공작.”

    “예, 말씀하시지요.”

    “왜 공작이 감사하다고까지 말하나요?”

    허를 찔렸다.

    한껏 들뜬 얼굴이었던 에녹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교류전의 운영진에 합류한다 한들, 공작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하등 없을 텐데요.”

    헬레나가 재차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불편하지는 않고요?”

    “……그건.”

    에녹의 목울대가 커다랗게 움직였다.

    “교류전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런가요?”

    “예. 또한 저 개인적으로는, 브라이어튼 백작의 천재성을 아끼고 있기도 하고요.”

    에녹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제가 백작을 발굴한 것이기도 하니, 백작의 재능이 최대한 빛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흠, 그렇다면야.”

    헬레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일 뿐.

    ❀ ❀ ❀

    그날 저녁.

    국왕 부부는 에녹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확실히…… 서식스 공작이 백작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기는 한 것 같네요.”

    먼저 말문을 연 쪽은, 다소 의외라는 얼굴을 한 헬레나였다.

    “공작이 저렇게까지 열의를 갖고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처음 봤어요.”

    조금 놀란 기색인 헬레나와는 달리, 에드워드는 만면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죠? 재미있지 않나요?”

    “에드워드는 언제부터 눈치챈 건가요?”

    “글쎄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뜬금없이 미술전을 열 때부터 조금 수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턱을 쓸어내리던 에드워드가 말을 맺었다.

    “어쨌든, 본인이 직접 확언하지는 않았으니 일단은 지켜보죠.”

    “네, 그래요.”

    헬레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국왕 부부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감하기만 했던 에녹이 ‘이네스’가 화제에 오를 때만큼은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 ❀ ❀

    늦은 저녁.

    타운하우스로 귀가한 에녹은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브라이어튼 백작가에서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그런가?”

    에녹은 애써 태연한 척 집사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곧바로 서재로 들어온 에녹은,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미루고 페이퍼 나이프부터 집어 들었다.

    그리하여 확인한 이네스의 답신은 간단했다.

    최근 브라이어튼 백작위를 되찾으면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니, 일주일 후에 일전의 아틀리에에서 다시 만나 뵙자는 내용이었다.

    “……일주일 후.”

    에녹이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비록 집사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양 표정 관리를 했으나, 지금 이 서재에는 에녹 혼자밖에 없었다.

    수려한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무척 기뻐 보이는 미소였다.

    ❀ ❀ ❀

    한편 이네스는 바쁘게 움직였다.

    예전에는 라이언을 내조하느라 발조차 들이지 못했던 사교 활동에 참석하는 한편, 브라이어튼에서 투자한 사업체의 대리인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네스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그건 바로 위컴 남작부인의 티타임에서 있었던 샬럿과의 실랑이에 관한 것이었다.

    ‘여보, 그거 알아요? 브라이어튼 백작이 이혼한 경위가 글쎄…….’

    티타임에 참석했던 귀부인들이 제 남편에게로 하나둘씩 말을 옮겼고,

    ‘그, 이건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제이슨 남작 영애와 고트 자작 영식이…….’

    그 남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클럽의 친구들에게, 이네스가 목격했던 아틀리에에서의 충격적인 모습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알음알음 퍼지던 소문은 어느새 몸집을 키우고 부풀려, 남의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모조리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소문의 당사자인 라이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라이언!”

    누군가가 뒤에서부터 라이언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서슬에, 술잔 너머로 흘러내린 술이 라이언의 어깨와 가슴팍까지 모조리 적셔 버렸다.

    라이언이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 새끼가?”

    상대는 라이언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시던 클럽의 한량 중 한 명이었다.

    얼큰하게 취한 남자가 불쑥 라이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거리가 어찌나 가까운지 코끝이 닿을 정도였다.

    “아씨, 뭔데 저리 꺼지라고……!”

    “재주도 좋아, 이혼한 당일에 제이슨 남작 영애와 뜨거운 밤을 보낼 정도라니.”

    순간 라이언이 미간을 구겼다.

    “……뭐?”

    “왜. 제이슨 남작 영애가 펑펑 울면서 털어놓았다던데. 네가 먼저 남작 영애를 꼬셨다고 말이야.”

    저속하게 지껄인 남자가 나지막이 킬킬거렸다.

    “그래서 남작 영애는 네 압박에 못 이겨서 너와 밤을 보냈다던데?”

    순간 라이언은 눈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샬럿, 이 망할 계집이!’

    샬럿과 얽히는 통에 이네스에게 이혼당한 것도 짜증 나는데!

    뒤에서 이따위로 제멋대로 지껄이고 다닌단 말이야?!

    “남작 영애가 얼마나 서럽게 흐느끼던지, 보는 사람이 다 가슴이 아프더란다!”

    남자는 이제 배까지 잡고 낄낄 웃고 있었다.

    쾅!!

    분을 이기지 못한 라이언이 식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기랄!”

    그 서슬에, 식탁 위의 술병이며 안주들이 엉망으로 널브러졌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라이언이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술에 취해 게게 풀린 사람들의 눈동자가 라이언의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저 새끼, 어디 가냐?”

    “글쎄, 브라이어튼 백작을 만나러 나가는 거 아니야?”

    사내 중 한 명이 심술궂게 입을 열었다.

    “다시 받아 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새끼처럼 질질 짜려고 말이야.”

    “으하하!”

    “맞는 말이네!”

    사람들 사이로 왁자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 새끼가 자존심도 없이…….”

    “뭐, 그래도 백작 앞에서 자존심을 챙기는 게 더 우습지 않나?”

    “브라이어튼 백작가를 등에 업고 우쭐거리던 자식인데, 지금은 완전히 개털이 되었으니!”

    한참을 라이언을 비웃던 사람들이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평소 사람들 사이에서 라이언의 평판 자체가 별로 좋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브라이어튼 백작입네’ 하고 입버릇처럼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다만 라이언이 돈 자랑을 한답시고, 술값도 잘 내주고 하니까 여태껏 비위를 맞춰 주었을 뿐이었다.

    그 말은 즉, 브라이어튼 백작위까지 잃어버린 라이언은 조롱거리 이상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때.

    “저어.”

    여인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고트 자작 영식을 만나고 싶은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한쪽으로 쏠렸다.

    그 시선 끝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 도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제이슨 남작 영애?”

    ❀ ❀ ❀

    한편 그 시각.

    라이언은 허겁지겁 마차에 몸을 실은 참이었다.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로 당장 출발해!”

    냅다 고함부터 내지른 라이언이 빠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샬럿, 이 계집을 도대체 어쩌면 좋지?!’

    라이언은 초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손톱을 물어뜯었다.

    ‘적당히 이네스의 마음이 가라앉으면 다시 찾아가려고 했건만, 이딴 식으로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라이언의 꼴만 우스워진다.

    무엇보다도 샬럿이 ‘라이언이 나를 먼저 유혹했다’라는 거짓말을 해 뒀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를 풀기는 해야 했다.

    이러다가 이네스가 정말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기라도 하면…….

    ‘그것만은 안 돼!’

    어떻게든 이네스의 마음을 달래 주어야 했다.

    때마침 마차가 멈췄다.

    라이언은 허겁지겁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스등 불빛만이 불그스름하게 주변을 밝히는 늦은 밤.

    사위는 고요했다.

    ‘일단 이네스에게 매달려는 봐야지.’

    비록 경비들이 타운하우스를 지키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일단 한 번 만나는 달라고 말이라도 해 볼 참이었다.

    라이언은 비장한 얼굴로 성큼성큼 타운하우스 쪽으로 걸어갔다.

    “이…… 아니, 브라이어튼 백작님을 만나 뵙고 싶네.”

    반사적으로 이네스라고 부르려다 말고, 라이언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네스.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불렀던 그 이름이 이렇게나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라이언더러 ‘브라이어튼 백작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며 굽신거리던 경비들은, 이제 뻣뻣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볼 따름이었다.

    “아직 가주님께서는 귀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뭐? 이렇게 시간이 늦었는데……!”

    라이언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이던 차.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저 멀리서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문장이 걸린 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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