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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7)화 (47/120)
  • 47화

    ❀ ❀ ❀

    그 시각, 왕궁.

    에녹은 느닷없는 에드워드의 부름을 받아 저녁 식탁에 끌려온 참이었다.

    오랜만에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하자는 제안을 받아서였는데, 왕비의 업무로 바쁜 헬레나는 아직 자리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재, 에녹과 에드워드는 단둘이서만 마주 앉아 있었는데.

    어째 에녹은 저녁 식사는커녕, 하루 종일 딴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녹.”

    “…….”

    “에녹!”

    에드워드가 몇 번이나 에녹을 부른 후에야.

    “아, 예.”

    퍼뜩 정신을 차린 에녹이 제 형을 마주 보았다.

    에드워드가 눈매를 좁히며 핀잔을 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나 여전히 딴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이 훤히 티가 난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왜 그러십니까? 뭔가 원하는 대답이라도 있으신지요?”

    “와, 이제는 국왕에게 짜증까지 부리네?”

    “자꾸 캐물으시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지금은 사석이니까 형님입니다.”

    에녹은 말 한마디를 지지 않고 또박또박 말대답을 했다.

    불만스럽게 에녹을 위아래로 뜯어보던 에드워드가, 문득 씩 눈매를 휘어 보였다

    “네가 왜 이렇게 예민한지 맞춰 볼까?”

    “전 하나도 예민하지 않습…….”

    “브라이어튼 백작 때문에 그러지?”

    “아닙니다.”

    에녹은 그야말로 정색을 했다.

    동시에 에드워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사악한 미소였다.

    “내 알기로, 과한 부정은 긍정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있던데.”

    “…….”

    에녹은 뚱한 얼굴이었으나, 차마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정곡을 찔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에녹이 지금 하고 있었던 고민은…….

    ‘어째서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편지의 답신이 오지 않는 거지?’

    실은 시간상 답신이 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애초에 편지를 보낸 시점은 오늘 낮이었고, 그 후 에드워드의 부름 때문에 바로 입궁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꾸만 생각이 이네스에게 보낸 편지로 쏠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 편지에서부터 시작했던 생각은, 자꾸만 제멋대로 가지를 펼쳐 뻗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백작이 나를 좀 불편해하는 것 같던데.’

    ‘혹여나 초상화 관련 일정을 거절이라도 하면…….’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백작의 얼굴을 보는 건 어려워지는 건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에, 에녹은 괜히 식탁에 놓여 있는 식기들만 노려보았다.

    한편 에드워드는 오묘한 표정이 되어, 시시각각 낯빛이 변하는 에녹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 녀석, 정말로 브라이어튼 백작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에드워드가 의심으로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던 그때.

    왕비, 헬레나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조금 늦었네요. 죄송해요, 시녀장에게 몇 가지 말을 전한다는 게 조금 늦어져서.”

    “아닙니다. 간만에 뵙습니다, 왕비 전하.”

    에녹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왕비가 생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서식스 공작.”

    “헬레나, 얼른 자리에 앉으시지요.”

    제 아내라면 껌뻑 죽는 에드워드는 냉큼 헬레나에게 자리부터 권했다.

    헬레나가 자리에 착석하고, 차례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격식을 갖추는 정찬이라기보다는 가정적인 분위기의 식사 자리였다.

    “요새 일이 너무 바쁜 것 아닙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요.”

    “어머나, 절 걱정해 주시다니 기쁘네요. 하지만 저보다도 오히려 폐하가 더 걱정되는걸요.”

    ……오늘도 국왕 부부의 금슬은 무척 좋았다.

    다행이긴 한데, 부부 사이에 낀 에녹은 그야말로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빨리 먹고 일어나야겠군.’

    에녹은 국왕 부부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대충 귓등으로 흘리며,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헬레나가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브라이어튼 백작에 대한 소식이 세간에 온통 화제라지요?”

    순간 에녹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헬레나는 짓궂게 말을 이었다.

    “왕실에서도 엘튼지는 구독하고 있는걸요.”

    “……그러셨습니까.”

    “그럼요. 신문에서 연일 브라이어튼 백작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으니, 모를 리가 없지요.”

    이네스에 대한 화제가 전면에 올라왔음에도 에녹의 얼굴은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와 헬레나는 에녹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녹은 아까 전부터 스테이크를 썰기만 할 뿐 먹지는 않고 있었으니까.

    보다 못한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에녹.”

    “예.”

    “혹시 스테이크를 고기 가루로 만드는 게 목표인 거야?”

    아차.

    에녹은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렸다.

    주방장이 정성 들여 구워 내놓은 스테이크는 이미 갈기갈기 찢겨, 형체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아닙니다.”

    에녹은 머쓱한 얼굴로 조그마한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기계적으로 고기를 씹어 삼키던 그때.

    헬레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참, 서식스 공작.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어요?”

    “도움이라니요?”

    “그게, 최근 몇 년 동안 교류전이 열린 적 없었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에녹의 눈동자에 반짝 이채가 돌았다.

    그를 못 본 체하며 헬레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교류전을 개최할까 생각 중이거든요. 칼도로프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예요.”

    교류전.

    말 그대로 각 국가 사이의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장이었다.

    교류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약 삼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당시 랭커스터와 칼도로프는 무려 백 년 동안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며 싸워 댔었다.

    그 기나긴 전쟁 기간을 두고, 역사서에서는 백 년 전쟁이라 일컫는다.

    한편 그 백 년 전쟁을 끝마치며, 서로 친목 도모를 위해 지속적으로 교류하던 게 전통이 되었다.

    처음 종전 회담에 참석했던 랭커스터의 여왕은 예술 애호가였고, 그를 시작으로 왕족들이 주최하는 예술가들의 교류 모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삼백 년 후 현재.

    그 교류전을 어떻게 잘 치르느냐가 칼도로프와 랭커스터 사이의 미묘한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인재 하나를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서식스 공작이 직접 추천하는 인재라니, 무척 기대되네요. 누구죠?”

    “브라이어튼 백작입니다.”

    그 대답에, 국왕 부부는 노골적으로 에녹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녹은 눈썹 하나 까닥하기는커녕, 도리어 헬레나를 설득하는 데에 열을 올린다.

    “제가 보증하건대, 백작의 예술적 재능은 무척 뛰어납니다.”

    그거야 사실이기는 했다.

    애초에 이네스가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더라면, 라이언이 그녀의 재능을 훔쳐서 자신이 대단한 화가인 양 행세하고 다닐 수도 없었을 테니까.

    “요새 이런저런 화제를 몰고 다니는 예술가이기도 하고, 게다가 여성이기도 하니까요.”

    에녹이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여태껏 교류전에 참석한 예술가들 중, 여류 화가는 단 한 명도 없지 않았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만요.”

    “예술 앞에서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는 상징성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헬레나는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느꼈다.

    랭커스터와 칼도로프는 여러모로 반대되는 느낌의 국가였다.

    랭커스터가 보수적이고 귀족적이라면, 칼도로프는 개방적이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래서 교류전을 할 때마다, 칼도로프에서 랭커스터에는 여성 예술가가 없느냐며 은근히 비웃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랭커스터 내부의 기성 예술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여태껏 여성 예술가가 참석한 전례가 없었지…….’

    처음에는 ‘에녹이 정말로 브라이어튼 백작을 추천할 줄이야, 재미있네’ 정도의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은근히 구미가 당긴다.

    에녹은 팔랑이는 헬레나의 마음에 계속 부채질을 했다.

    “여태껏 칼도로프는 은근히 랭커스터의 경직된 분위기를 비웃지 않았습니까.”

    “그, 맞는 말이기는 한데.”

    “이 상황에서 백작이 참석한다면, 그 자체가 긍정적으로 보일 겁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다만.

    ‘에녹 녀석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추천하는 모습, 본 적 있습니까?’

    ‘적어도 전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에드워드와 헬레나는 서로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평소 만사에 무심하다 못해, 무료해 보이던 모습은 아예 흔적조차 없었다.

    ‘이거야 원.’

    에드워드가 눈을 빛냈다.

    마치 브라이어튼 백작이 교류전에 참여하여 그녀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이, 에녹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교류전을 주최하는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기에.

    “좋아요, 한 번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죠.”

    헬레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직 확답을 받은 것도 아닌데도, 에녹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 에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레나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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