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게다가 백작께서 관대함을 베풀어 기껏 티타임에 참석하도록 해 주었더니, 이렇게 어마어마한 소동을 일으킬 줄이야.”
“잠깐만요, 그건……!”
“앞으로는 위컴가에서 제이슨 남작 영애를 볼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남작부인이 턱을 치켜세우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 이만 나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네에?!”
샬럿은 기겁했다.
그러나 위컴 남작부인은 완고했다.
“지금 물러난다면 제이슨 남작 영애의 개인적인 일탈로 끝나겠지만, 계속 버틴다면 가문 사이의 분쟁이 될 텐데요.”
“저어, 위컴 남작부인. 저는 그러니까…….”
“지금 전 조용히 지금 소동을 무마할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샬럿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만약 그 기회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저 또한 이번 일을 그대로 참아 넘길 생각이 없어요.”
위컴 남작부인은 냉정하게 선언했다.
샬럿은 그만 울상이 되었으나, 사실 현 상황 자체가 너무 불리했다.
왕국 최고의 신뢰를 자랑하는 엘튼지에서 보도한 불륜 사건.
그리고 이네스의 생생한 증언까지.
내심 믿고 있었던 ‘나 또한 피해자야!’라는 변명까지도, 이네스에 의해 모조리 파훼되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샬럿이 뒤집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위컴 남작부인이 들으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누구 없니? 제이슨 남작 영애께서 돌아가신단다, 정문까지 정중하게 모시도록 하렴.”
“됐어요, 저 혼자 나갈 수 있다고요!”
결국 샬럿은 분한 얼굴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렇게 샬럿이 응접실에서 빠져나가자마자, 이네스에게 위로의 말이 쏟아져 내렸다.
“어휴, 이건 무슨……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네요.”
혀를 쯧쯧 차며 입을 연 위컴 남작부인을 시작으로,
“백작님, 괜찮으세요?”
“제이슨 남작 영애는 개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귀부인들 또한, 노골적으로 샬럿을 향해 험한 말을 쏟아 냈다.
“솔직히 제이슨 남작 영애는, 스스로가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말이에요.”
특히 이네스에게 투자 이야기를 들었던 필데트 자작부인이, 대화에 열을 올렸다.
“애초에 고트 자작 영식이 그렇게 일탈했다 해도, 남작 영애라도 먼저 백작께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정말로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고트 자작 영식과 거리를 두었겠죠.”
“함께 즐긴 게 뻔히 보이는데, 이제 와서 무슨…….”
쏟아지는 위로의 말을 듣던 이네스가 만면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들 이렇게 위로해 주셔서 감사해요. 큰 위안이 되네요.”
“세상에, 백작님!”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이네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록 제가 라이언을 한때 지극히 사랑했었고, 그랬기에 그에게 제 모든 것을 주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런, 브라이어튼 백작님…….”
“그래도 어떻게 보면, 이쯤에서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네스는 섣불리 눈물을 떨구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대신 시종일관 의연한 태도로 차분하게 제 속마음을 설명했다.
“어쨌든 이혼도 무사히 끝마쳤고, 한때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사람도 걸러 낼 수 있었잖아요?”
그 말을 듣던 귀부인들의 눈동자에 감탄이 어렸다.
‘분명 여태까지 마음고생이 상당하셨을 텐데, 어쩜 저렇게 침착하실 수가 있는지…….’
‘나였더라면 저렇게 평온할 수 없었을 텐데.’
이네스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저 때문에 굳이 제이슨 남작 영애와의 교류를 꺼리실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네? 그래도, 백작…….”
“제가 뭐라고 귀부인들의 교우 관계에 참견하겠어요?”
이네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되물었다.
순간 귀부인들은 허를 찔린 낯을 했다.
‘어쩜 저렇게 너그러우실 수가.’
그러고 보면, 이네스는 오늘 티타임에도 제이슨 남작 영애가 참석하든 말든 전혀 간섭하려 들지 않았었다.
그저 귀부인들이 알아서 눈치 빠르게 처신했을 뿐.
“다만 저 자신은 더 이상 교류할 생각이 없으니, 그 마음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네스는 그렇게 부드럽게 말을 맺었다.
귀부인들은 각자 숙연한 표정이 되어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백작님!”
“백작님이 시켜서 그런 게 아니라, 저희도 저렇게 오만방자한 여자와는 교류하고 싶지 않아요.”
“맞아요! 뭐? 백작께서 우리더러 제이슨 남작 영애와 교류하지 말라고 시킨 거라고?”
그중에서도 자존심 강한 몇몇 귀부인들은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우리가 무슨 명령을 듣고 움직이는 사람인 줄 알고!”
잔뜩 흥분한 귀부인들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만족스럽게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좋아.’
적어도 이 자리의 귀부인들에게는, 샬럿의 평판은 완전히 끝장난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이 사교계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샬럿, 앞으로 고생 좀 하겠어.’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 ❀ ❀
그날, 이네스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자택으로 귀가했다.
괜찮다고 거절했음에도, 위컴 남작부인이 부득불 저녁 식사까지 대접해 준 탓이었다.
“오셨어요, 가주님?”
메리가 이네스를 맞아들였다.
그런데 어쩐지 기가 죽은 표정이다.
“메리? 왜 그래?”
이네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메리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한참 망설이던 메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뭐가?”
“아까 낮에…….”
메리는 어두운 낯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까 낮에 샬럿이 찾아왔었을 때, 참지 못하고 쏘아붙인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비록 이네스는 ‘고맙다’라고 말하며 넘어갔었지만…….
“그래도 가주님께서 직접 처리하셔야 할 일이었는데, 제가 너무 주제넘게 군 것 같아요.”
메리가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이네스의 시선을 피했다.
바로 그때.
“가, 가주님?!”
화들짝 놀란 메리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네스가 대뜸 양팔로 메리를 꼭 끌어안은 것이다.
“아니야.”
동시에 희미하게 젖은 목소리가 울렸다.
“오히려 내가 여태까지 고맙고, 또 미안했어.”
“……가주님.”
“내가 내 일에 너무 바빠서, 네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진심이었다.
아직 이네스가 어린 소녀였던 8년 전부터, 지금까지.
메리는 계속해서 이네스의 곁을 지켜 왔었다.
라이언이 이네스에게 모질게 굴 때마다, 이네스를 다독이며 위로해 준 사람은 메리뿐이었다.
‘그리고…… 회귀 전에도.’
메리를 끌어안은 양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 보면, 이네스가 정신 병원에 강제로 입원하라는 통보를 듣기 1년 전.
갑작스럽게 메리가 해고됐었다.
정확히는 메리뿐 아니라, 오랫동안 브라이어튼 백작가를 지켰던 사용인들은 모조리 내쫓겨야만 했다.
당시 이네스는 무력하기만 했다.
이네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사람들이, 강제로 백작가를 떠나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를 막아 주기는커녕 라이언에게 미움받을까 봐 전전긍긍했던 게 고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메리는 무어라 했었던가.
‘마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메리.’
‘그러니까 힘내세요. 울지 마시고요.’
이네스의 입술 사이로 잔뜩 뭉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이언과 더 일찍 갈라서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정신을 차렸지?”
“세상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건…….”
“그래도 너에게 가주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어서 기뻐.”
그렇게 한참을 포옹한 끝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이네스가, 메리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들고는 애써 미소 지었다.
진녹색 눈동자는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나를 위해서 화를 내 줘서…… 정말 고마워.”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입술만 달싹이던 메리가 미간을 찡그리며 마주 웃어 보였다.
“한 가문을 이끄시는 가주님이신데, 이렇게 눈물이 많으셔서 어떡해요.”
“그러면 메리 앞에서도 울면 안 돼?”
“에이, 그럴 리가 있나요.”
얼른 고개를 가로저은 메리가, 마침 생각났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 참, 가주님. 가주님께 편지가 왔어요.”
“내게?”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서식스 공작께서 보내신 편지에요. 마님의 서재에 갖다 두었어요.”
순간 이네스가 덜컥 굳어졌다.
메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가주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퍼뜩 정신을 차린 이네스가 황급히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 놓인 은쟁반 안.
새하얀 편지 한 통이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서식스 공작 각하.’
복잡한 시선으로 편지 봉투를 내려다보던 이네스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편지의 용건은 간단했다.
초상화의 채색이 남았으니, 언제쯤 진행할 것인지 일정을 묻는 내용.
하지만 그 간단한 용건에도 이네스는 쉽사리 답장을 하지 못했다.
그저 편지 봉투만 한참 만지작거릴 뿐.
‘그렇지. 초상화 완성을 위해서라도, 얼굴을 보긴 봐야 하는데…….’
과연 공작 각하를 앞에 두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각하를 이성으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계속 피하기만 할 수는 없잖아.’
엄밀히 말하자면 이네스가 에녹을 이성으로 의식하는 건, 이네스 자신의 문제였다.
에녹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계속 피하는 건 역시 이상하다.
‘좋아.’
커다랗게 심호흡을 한 이네스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편지지를 펼치고 펜을 움켜쥔다.
하지만 그 후로도, 서재를 밝히는 불빛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