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5)화 (45/120)
  • 45화

    “제가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번거롭다니, 너……!”

    “그렇잖아요. 애초에 제이슨 남작 영애가 이 티타임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네스가 슬쩍 눈짓으로 위컴 남작부인을 가리켜 보였다.

    “제가 위컴 남작부인께, 제이슨 남작 영애를 안으로 들이라고 부탁했기 때문인걸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샬럿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힐끔 위컴 남작부인을 곁눈질하자, 남작부인이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네스의 말에 하등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번거롭게 안으로 들여서 무시하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안으로 들이지 않는 게 훨씬 편한걸요.”

    “그, 그럼 도대체…….”

    “저희가 영애를 무시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작 영애께서 저희와의 대화에 참여하실 의향이 없으셨던 건 아닌지?”

    이네스가 나긋하게 되물었다.

    동시에 귀부인들이 하나둘씩 이네스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옳은 말씀이에요, 백작님.”

    “애초에 이번 티타임에 억지로 끼어든 쪽은 제이슨 남작 영애인걸요.”

    “그런 상황에서, 제이슨 남작 영애의 상황까지 배려하며 대화를 나누라는 건 너무하잖아요?”

    “먼저 저희와 대화할 노력을 해 보시지 그러셨어요?”

    처음부터 샬럿을 반가워하는 입장은 아니었기에, 귀부인들의 반발은 상당히 격렬했다.

    샬럿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수세에 몰리고 있지 않은가.

    그 상황에서 이네스는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무엇보다도 지금 남작 영애께서 하신 말씀은, 이 자리에 계신 귀부인들에 대한 모욕인 건 아시죠?”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요. 저와 귀부인들 사이에 상하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네스가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계신 귀부인들께서, 제 말 한마디에 휘둘리실 리가 없잖아요?”

    아차.

    샬럿은 커다란 얼음 조각을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수했어.’

    그 증거로, 귀부인들이 살벌한 시선으로 샬럿을 쏘아보고 있었다.

    솔직히 귀부인들이 이네스의 눈치를 본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언급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귀부인들 면전에서 ‘너희는 이네스보다 아래야’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도 어디 나가서 빠지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당연히 콧대도 높았다.

    샬럿에게 불리한 현 상황에서, 귀부인들의 자존심까지 건드리고 말았으니…….

    ‘끝났네.’

    이네스는 만족스러운 낯을 했다.

    “아, 그, 그것이…….”

    샬럿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탈출구가 없었다.

    그리하여 궁지에 몰린 샬럿이 떠올린 해결책은.

    “이네스!”

    결국 이네스에게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샬럿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네스에게 애원했다.

    “우린 친구잖아. 응?”

    “세상에, 친구요?”

    이네스는 잠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정말로 재미있는 농담을 듣기라도 한 양 헛웃음을 터뜨렸다.

    “친구의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여자를 어떻게 친구로 여길 수 있을까요?”

    “이, 이네스?!”

    “심지어 제가 이혼한 바로 다음 날, 제가 전남편에게 얻어 주었던 아틀리에에 알몸으로 누워 있던 여자인데요.”

    이네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폭탄 발언을 이어갔다.

    귀부인들은 경악했다.

    “그, 그 말이 사실인가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귀부인들의 술렁거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솔직히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여태껏 제이슨 남작 영애를 얼마나 신경 써 주셨는데요?”

    “맞아요. 파티며 티타임에 참석할 때마다, 꼭 백작님과 동석하셨잖아요.”

    “사실 백작님이 아니었더라면 초대조차 받지 못했을 텐데요.”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귀부인들의 눈동자에 혐오감이 깃들었다.

    한편, 샬럿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셔서 새하얘졌다가, 새파랗게 질렸다가, 뒤이어 툭 건드리면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눈가가 붉어진다.

    하지만 동정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네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속이 시원해.’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청량감이었다.

    복수가 허망하다는 세간의 말은, 적어도 이네스에게는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이렇게나 후련하지 않은가.

    남들이 치졸하다며 제게 손가락질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다만 그녀 자신이 괴로웠던 그만큼, 라이언과 샬럿도 고통스러웠으면 싶었다.

    “……솔직히 정말 놀랐어요.”

    그러므로 이네스는, 두 눈을 내리깔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혼이 끝나고 아틀리에를 정리하러 갔는데, 두 사람이 함께 잠들어 있지 뭐예요.”

    “이네스, 지금 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샬럿이 비명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귀부인들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제각기 장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에.”

    “그럴 수가…….”

    다소 저렴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딱 보기에 불륜녀와 그에 남편을 빼앗긴 선량한 본처의 구도가 아닌가.

    게다가 그 불륜녀가 본처의 절친한 친구였다.

    심지어 이 티타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조리 기혼녀였고, 가볍든 깊든 남편의 여성 편력에 한 번쯤 골머리를 썩어 본 여인들이기도 했다.

    이네스에게 감정적 동조를 해 주기에 차고 넘치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한편 샬럿은 목을 조르는 듯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 돼, 이러다가는 본전조차 찾지 못하게 생겼잖아!’

    상황이 영 그녀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샬럿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이네스를 설득해야 해. 그러려면…… 아, 그렇지!’

    순간 샬럿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러고 보니, 이네스를 설득할 논리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하지만 이네스, 내 말을 좀 들어 봐. 나도 피해자라고!”

    샬럿이 냅다 목소리를 높였다.

    이네스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샬럿에게 되물었다.

    “피해자?”

    “그래, 라…… 아니, 고트 자작 영식이!”

    하마터면 라이언이라고 부를 뻔했다.

    샬럿은 다급하게 호칭을 고치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영식이 날 유혹한 거야. 난 그에 넘어간 것뿐이라고!”

    어느새 샬럿의 눈동자에는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때의 난 너무 어리고 순진해서…… 도저히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애원하며, 샬럿은 내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완벽한 설명이야!’

    그에 더하여, 샬럿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발그레한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가히 품에 끌어안아 위로해 주고 싶을 만치 가련할 터.

    여태껏 샬럿이 만나 왔던 수많은 남자들만 봐도 그랬었다.

    샬럿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릴 때마다, 어쩔 줄 모르고 위로하려 들었으니까.

    ‘이만하면 이네스도 좀 누그러지겠지?’

    그렇게 한껏 ‘피해자 역할’에 심취해 있었기에, 샬럿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네스는 물론이고, 다른 귀부인들까지 모두 질린 얼굴로 샬럿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잠시 후.

    “그런 사정을 왜 제가 알아야 하나요?”

    한심한 기색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샬럿에게로 되돌아왔다.

    놀란 샬럿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이네스?”

    눈물이 가득 고여서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이네스의 얼굴이 보였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냉엄한 얼굴이었다.

    “그건 제이슨 남작 영애의 사정이지요.”

    “뭐?”

    순간 샬럿은 제 귀를 의심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숙이고 들어가는데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저런단 말이야?’

    그 순했던 이네스가?

    샬럿은 그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이네스가 재차 쏘아붙였다.

    “고트 자작 영식과 제이슨 남작 영애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영애가 피해자일지라도.”

    “아니, 잠깐만…….”

    “제게는 가해자예요.”

    가해자.

    그 노골적인 단어에, 샬럿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네스는 냉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감히 내 앞에서 가여운 척하지 말아요.”

    “가여운 척이라니, 난……!”

    “남작 영애처럼 저급해지고 싶지 않아서, 여러모로 참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이게 아닌데?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주변을 휘둘러보던 샬럿은, 흠칫 어깨를 굳히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귀부인들 또한 이네스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한 톨의 가여움도, 딱한 기색조차 없다.

    귀부인들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한심함과 역겨움, 지긋지긋함뿐이었다.

    “제이슨 남작 영애.”

    동시에 위컴 남작부인이 근엄한 목소리로 샬럿을 불렀다.

    “오늘 영애께서 보이신 행동에 무척 실망했습니다.”

    “예? 하지만!”

    “분명 초대는 없던 일로 했을 텐데, 이렇게 멋대로 찾아오는 것부터가 아주 무례했어요.”

    그렇게 선을 그은 남작부인이, 힐끔 이네스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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