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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4)화 (44/120)

44화

‘당장 이네스를 만나야만 해!’

이 수치스러운 상황을 한시바삐 개선하려면 이네스를 설득하는 게 필수였다.

샬럿이 성큼성큼 정문 쪽으로 다가서자, 타운하우스를 지키고 있던 경비가 대번에 앞을 막아섰다.

“누구십니까?”

“위컴 남작부인께, 샬럿 제이슨이 방문했다고 알리도록.”

샬럿은 경비를 향해 턱을 치켜세우며 도도하게 명령을 내렸다.

“브라이어튼 백작을 만나러 왔다고도 전해.”

“……약속은 잡고 오신 겁니까?”

경비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샬럿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샬럿은 여전히 뻔뻔한 얼굴이었다.

“아닌데?”

“…….”

경비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샬럿이 적반하장으로 잔뜩 신경질을 내며 경비를 채근했다.

“얼른 알리지 않고 뭐 하고 있어?!”

“아니, 하지만…….”

“뭐, 마음대로 해.”

샬럿이 팔짱을 끼며 경비를 노려보았다.

“위컴 남작부인께 내 말을 전할 때까지, 계속 이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

경비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어쨌든 샬럿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위컴 남작부인과 비슷한 신분의 귀족.

그런 샬럿을 저 혼자만의 판단으로 끌어내기는 역시 부담스러웠기에, 경비는 결국 타운하우스 안으로 연통을 넣고 말았다.

그리하여 돌아온 대답은…….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래, 그래야지!”

뜻밖의 회신에, 샬럿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이네스 따위가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 봤자,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아마 지금쯤 이네스는 티타임에 참석하고 있을 터.

그 숫기 없는 계집애가 다른 귀부인들과 제대로 어울릴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드디어 샬럿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리라.

“안내해.”

샬럿은 콧대를 세우며 경비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안내된 우아한 응접실 안.

귀부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샬럿에게로 쏠렸다.

호의라고는 한 톨도 없는 그 시선들을 마주하며, 샬럿은 저도 모르게 잠시 주춤했으나.

“이네스!”

귀부인들 사이에 앉아 있는 이네스를 발견하자마자 샬럿은 화색이 되었다.

샬럿이 종종걸음으로 이네스에게로 다가갔다.

들뜬 목소리로 말을 붙인다.

“이렇게 나를 찾아 줘서 정말 고마워, 난……!”

“말은 똑바로 해야죠. 전 단 한 번도 당신을 찾지 않았어요, 제이슨 남작 영애.”

그러나 이네스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뭐?’

그 매몰찬 반응에, 샬럿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이네스는 서늘한 시선으로 샬럿을 올려다보았다.

“현 상황은 제이슨 남작 영애께서 멋대로 티타임에 난입하신 것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

말문이 막힌 샬럿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샬럿을 향해, 이네스가 반달처럼 눈매를 휘어 보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였다.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에서부터 쫓아온 거죠?”

“그건, 그렇지만……!”

“허겁지겁 제 뒤를 따르는 그 모습이 보기에 민망해서 들였지만, 함부로 친한 척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네스!”

“또한 상대가 작위를 가진 귀족이라면, 그 작위로 호칭하는 게 예의랍니다.”

이네스의 조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상대방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라요.”

“뭐……!”

발끈한 샬럿이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때마침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위컴 남작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이슨 남작 영애, 그만하고 자리에 앉아요.”

“위, 위컴 남작부인!”

“이 티타임에 참석하고 싶다고, 내 타운하우스 앞에서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던 거잖아요?”

위컴 남작부인이 곱지 않은 눈초리로 샬럿을 흘겨보았다.

“그럼 얌전히 차나 마시고 가요.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요.”

그렇게 남작부인이 대놓고 핀잔을 주었으나, 샬럿은 입 하나 벙긋하지 못했다.

위컴 남작부인뿐 아니라 다른 귀부인들도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

샬럿은 결국 머쓱하게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위컴 남작부인이 활짝 웃으며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백작님, 이번에 백작 작위를 돌려받으셨으니 앞으로 좀 바빠지시겠어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대리인이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도 저희 티타임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남작 부인은 은근슬쩍 이네스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그러자 다른 귀부인들도 제각기 이네스에게 말을 붙이느라 열을 올렸다.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맞아요. 앞으로는 자주자주 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네스는 귀부인들을 향해 매끄럽게 웃어 보였다.

한편 샬럿은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마주하며 미묘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귀부인들이 이네스와 샬럿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딴판이었으니까.

‘……마치 내가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 같잖아.’

샬럿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누구도 샬럿에게 말을 붙이려 들지 않았다.

그저 이네스와 한 마디라도 더 대화를 나누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저 자리는 원래 내 자리였는데!’

대화의 중심,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위치.

하지만 이제 그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바로 이네스였다.

샬럿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이네스가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 참, 필데트 자작부인. 최근 부군께서 새로 도자기를 수입하는 사업을 하신다면서요?”

“어머나, 백작께서도 알고 계셨나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귀부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요새 그이가 그래서 무척 바쁘답니다.”

“분명 잘될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브라이어튼에게도 조금이나마 투자할 기회를 주시면 기쁘겠는데…….”

“세상에, 백작께서 투자해 주신다면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 제안에, 필데트 자작부인의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이네스는 그렇게 다른 귀부인들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었다.

다만 샬럿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동안 샬럿은 단 한마디의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이네스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대화에 끼어들려 해 봐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네스와 주변의 귀부인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 자체가, 샬럿에게는 너무 낯선 주제들이었으니까.

이를테면.

“올해 밀 농사가 꽤 잘되었다지요? 그래서 폐하께서 미리 흉년을 위해 밀을 비축하라는 정책을 내세우셨다는데…….”

국가사업에 관한 것이라거나,

“최근 귀족원 회의에 서식스 공작께서 참여하셨다는 소식, 들었어요?”

정재계의 일화,

“이번에 제 오라버니께서 레스토랑을 하나 개업하셨는데, 수익이 쏠쏠하대요.”

그것도 아니면 막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사업체 운영 등등.

모조리 상류층들만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들이었다.

평소 샬럿이 관심을 가졌던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 파티, 멋진 신사와의 만남, 결혼 같은 것들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도대체 내 꼴이 이게 뭐야?!’

결국 샬럿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인내심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이러지 않았어, 이렇게까지 소외된 적은 없었다고!’

사실 샬럿이 여태까지 소외되지 않았던 이유는 모조리 이네스 덕택이었다.

샬럿도 함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네스가 처음부터 이런저런 배려를 해 주었기에.

샬럿 또한 다른 귀부인들과 잘 어우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네스가 샬럿을 외면하는 지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말이죠, 이번에는…….”

“어머,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에요?”

티타임에 참석한 모든 귀부인들은, 아예 샬럿의 존재 자체를 잊은 것처럼 굴었다.

샬럿을 제외한 모두가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샬럿은 경쾌하게 터져 나오는 귀부인들의 웃음소리가,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심사가 뒤틀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참다못한 샬럿이 와락 언성을 높였다.

“…….”

“…….”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사위가 고요해졌다.

귀부인들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샬럿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이네스였다.

“이게 무슨 무례죠, 제이슨 남작 영애?”

그 침착한 목소리가 오히려 샬럿의 신경을 건드렸다.

‘내 기분은 이렇게 최악으로 만들어 놓고, 저 혼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저 표정은 뭐야?!’

당장이라도 저 평온한 얼굴을 엉망으로 뭉개 놓고 싶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샬럿이 이네스에게 마구 삿대질을 했다.

“무례는 무슨! 네가 하고 있는 짓이 무례잖아!”

그러고는 분을 이기지 못해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며 이네스를 노려본다.

“사람을 두고 투명 인간 취급을 하질 않나!”

“투명 인간 취급이라니요?”

“이제 와서 발뺌할 생각 하지 마! 모두가 날 무시하고 있다는 것쯤, 내가 모를 줄 알아?!”

샬럿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이거 다 네가 시킨 거지!”

이네스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샬럿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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