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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3)화 (43/120)
  • 43화

    여태껏 이네스가 왜 이런 가벼운 티타임조차 참석하지 못했었는지, 다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탓이다.

    이네스 브라이어튼.

    비록 지금은 온 세간의 이목을 끌어모았던 이혼 소송의 주인공이지만, 그전까지 이네스에 대한 귀부인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당시 이네스에 대한 평가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불쌍한 여자.’

    순진한 귀족가의 레이디가 사랑에 눈멀어 저보다 한참 떨어지는 남편을 들였고, 브라이어튼의 엄청난 재산은 물론이고 백작 작위까지 안겨 주었다.

    그뿐인가?

    결혼 이후로는 외부 활동까지 자제하며 제 남편을 내조하지 않았나.

    온갖 파티며 모임에 얼굴을 들이밀던 라이언과는 판이하게 다른 행보였다.

    심지어 아주 가끔 밖에 모습을 드러낼 때에도, 라이언과 이네스 사이의 갑을 관계가 확연히 드러났는데.

    ‘당신이 알기는 뭘 알아?’

    ‘하지만, 여보.’

    ‘함부로 끼어들지 마. 알았어?’

    라이언은 매번 고압적으로 굴었고, 이네스는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맸던 것이다.

    당시에도 몇몇 사람들은 그 모습을 기이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그때의 라이언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화가라 일컬어졌고,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며 찬탄하던 상황이었다.

    이네스와 라이언의 관계에 의아함을 품었던 사람들마저, 괜히 라이언과 적대하느니 침묵을 택할 정도.

    하지만 지금은.

    “백작, 이런 말은 뭐하지만……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위컴 남작부인이 이네스의 손을 꼭 붙들며 입을 열었다.

    다른 귀부인들도 입을 모아 이네스를 위로했다.

    “고트 자작 영식께서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백작께서 자작 영식에게 얼마나 헌신했었는데요!”

    “맞아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요.”

    비록 왕국은 보수적인 국가였고, 이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귀부인들은 대부분 심정적으로 이네스의 편이었다.

    아무래도 워낙에 라이언의 과실이 크기도 했고, 가정을 이루면서 크고 작은 희생을 한두 번쯤 안 해 본 귀부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혼까지 했겠어?’

    그게 귀부인들의 공통적인 평가였다.

    수없이 쏟아지는 위로에, 이네스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모두들 이렇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이네스에게 호의적으로 흘러갔다.

    귀부인들은 차와 다과를 즐기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예전에 고트 자작 대부인 말이에요, 브라이어튼 백작이 제 아들이라면서 어찌나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지.”

    “그래서 요새는 자작 대부인이 사교계 모임에 얼씬조차 안 하시잖아요.”

    “아하, 잘난 척을 하기 어려우니까요?”

    “하기야 저라도 그럴 거예요. 부끄러워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요?”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대화에 면밀히 귀를 기울이던 이네스는, 만족스러운 낯으로 차를 홀짝였다.

    ‘이 정도면 됐어.’

    이네스가 따로 손쓸 필요조차 없이, 이미 고트 자작가의 평판은 완전히 바닥이었다.

    평소 여기저기서 적을 많이 만들었던 그 행실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그때.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위컴 남작부인이 미간을 좁히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이상하다, 누굴 부른 적은 없었는데?’

    티타임 중에는 급한 일이 아니면 말을 붙이지 말라고 미리 전해 두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 노크까지 할 정도면, 적어도 안주인의 허락이 필요한 일일 터.

    “들어와.”

    남작부인은 마땅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달칵.

    문이 열렸다.

    응접실 안으로 발을 디딘 하녀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지?”

    “저, 마님.”

    하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이슨 남작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위컴 남작부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내가 분명 초대는 취소한다고 편지를 보냈었잖아. 제대로 전달한 것 맞아?”

    “정확히 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타운하우스 앞에 버티고 서서, 막무가내로 브라이어튼 백작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우기는 바람에…….”

    “뭐야?!”

    짜증스럽게 대꾸하던 위컴 남작부인이, 힐끔 이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단연 이네스였다.

    왕국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인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가주.

    다 쓰러져 가던 남편의 가문인 고트 자작가까지 단숨에 일으켜 세운 막대한 금력.

    게다가 이혼 소송을 통해 라이언의 그림이 제 것임을 증명하고, 스스로의 천재성을 증명한 화가.

    ‘굳이 브라이어튼 백작과 틀어질 필요 없지.’

    그러한 계산으로, 위컴 남작부인은 와락 언성을 높였다.

    “당장 돌아가라고 해! 이게 무슨 예의 없는 짓…….”

    하지만 남작부인은 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는데,

    딸그락.

    찻잔과 찻잔 받침이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을 이쪽으로 모으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제게 쏠린 대여섯 쌍의 눈동자들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들이셔도 괜찮아요.”

    “네?”

    위컴 남작부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게나 제 얼굴을 보고 싶다는데, 들여보내 줘야죠.”

    “하, 하지만.”

    “지금 타운하우스 밖에 제이슨 남작 영애가 버티고 서 있다는 건데, 혹여나 그 모습을 남들이 목격하면 구설수에 오르게 되잖아요? 그게 싫어서 그래요.”

    이네스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또한 저 때문에 위컴 남작부인이 괜히 쓸데없는 말을 듣는 것도 내키지 않고요.”

    “세상에, 백작님…….”

    그 배려 가득한 말에, 위컴 남작부인은 감동에 젖어 들었다.

    현재 엘튼지에서 내보냈던 기사 때문에, 샬럿의 평판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리고 이네스는 현재 위컴 남작부인의 티타임에 참석해 있는 상황.

    ‘물론 제이슨 같은 조그만 가문이 두려운 건 아니야, 그렇지만.’

    괜히 사교계에서, ‘위컴 남작가가 브라이어튼 백작의 눈치를 보느라 제이슨 남작 영애를 밖에 세워 두었다’라는 소문이 돈다면…….

    ‘우리 가문의 모양새만 이상해져.’

    남작 부인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심지어 샬럿은 이네스의 도움을 통해, 위컴 남작부인과도 몇 번 교류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남들 눈에는, ‘이네스 쪽에 붙느라 샬럿을 끊어 냈다’라고 보이기에 딱 좋을 터.

    그랬기에 이네스는 그 부분을 고려하여, 이네스 입장에서는 무척 불쾌할 샬럿과의 만남까지 참아 준다는 뜻이었다.

    때마침 이네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제이슨 남작 영애가 멋대로 찾아온 건 제 탓인데, 그것 때문에 위컴 남작부인의 처지가 곤란해져서는 안 되잖아요?”

    순간 귀부인들은 살짝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가 샬럿더러 ‘샬럿’이 아닌 ‘제이슨 남작 영애’라고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만큼 이네스가 샬럿에게 선을 긋고 있다는 소리였다.

    ‘조심해야겠어.’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던 귀부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 ❀

    “어휴, 하마터면 놓치는 줄 알았네.”

    어찌어찌 이네스를 놓치지 않고 따라온 샬럿이, 비틀거리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때마침 대여 마차가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이네스를 놓칠 뻔했다.

    그런데 어쩐지 주변 풍경이 눈에 익다.

    샬럿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여, 여긴…… 위컴 남작 가문의 타운하우스 아니야?”

    샬럿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위컴 남작부인.

    중앙 사교계에서 그녀보다 신분이 높은 여인은 많다.

    그러나 그녀만큼 여러 귀족들과 다채롭게 친분을 나누는 이는 없을 것이다.

    특유의 사근사근하고 친근한 성격은, 남작부인이라는 그다지 높지 않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왔고.

    그 와중 위컴 남작부인이 연결해 준 몇몇 가문들이 서로 혼사를 맺게 되면서, 남작부인은 일약 최고의 중매인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좋은 남자와 결혼하여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이 꿈인 샬럿은, 위컴 남작부인과의 친분 관계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샬럿은.

    ‘뭐야, 이네스? 위컴 남작부인이 보낸 초대장 아니야?’

    이네스의 책상에서 위컴 남작부인이 보낸 야유회 초대장을 발견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이네스를 졸라 댔다.

    이네스는 곤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결국 샬럿의 고집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네스를 따라 위컴 남작부인의 야유회에 참석했을 적, 쟁쟁한 귀부인들을 마주하며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이네스를 핑계로 몇 번 남작부인과 교분을 나누기는 했었지만.

    ‘이번 일이 터지자마자, 내게 보냈던 티타임 초대는 냉큼 취소해 버렸으면서……!’

    샬럿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런데도 이네스는 초대했다 이거지?’

    형편없이 구겨진 자존심이, 샬럿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이성마저 말끔히 날려 버렸다.

    샬럿이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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