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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2)화 (42/120)

42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메리가 이네스를 곁에서 모신 지도 벌써 8년이었다.

어렸던 아가씨가 양친을 잃고, 사교계에 데뷔하고, 샬럿과 친구가 되고, 라이언을 만나서 결혼하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이네스는 라이언과 샬럿 두 사람에게 항상 진심이었다.

남편에게 헌신했고, 친구에게 진실했다.

그럼에도 라이언과 샬럿은 언제나 이네스에게 매몰차게 굴었었다.

‘마님, 두 분 모두 어떻게…… 마님께 저러실 수가 있어요!’

보다 못한 메리가 참지 못하고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괜찮아, 내가 모자란 탓이지.’

이네스는 그저 힘없이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마음을 다잡고, 드디어 라이언과 샬럿을 잘라 내기는 했지만.

그렇다 하여 여태껏 이네스가 상처받은 것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밤마다 홀로 남은 이네스가 나직하게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제이슨 남작 영애.”

그리하여 메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 행동이 주제넘으며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이건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그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가주님께 민폐를 끼치실 생각이십니까?”

“무, 뭐라고? 민폐?!”

“여태껏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주님께서 수많은 것들을 베풀어 주셨잖아요.”

메리는 샬럿을 향해 새파랗게 날이 선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도 제이슨 남작 영애께서는 그에 대해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은혜를 원수로 갚으시지 않았나요?”

“너, 지금 뭐라고……!”

샬럿은 당장이라도 메리의 멱살이라도 붙들 것처럼 흉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그때.

타운하우스의 정원 안쪽에서부터 마차 한 대가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문장을 매단 마차였다.

또한 지금 이 시점에서, 저 마차에 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이네스!”

샬럿이 반가운 목소리로 냉큼 이네스를 불렀다.

촤르르-.

마차와 정문과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경비들이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정문을 열었다.

그와 함께 메리가 죄스러운 얼굴이 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가주님.”

마차 창문 너머로 이네스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제이슨 남작 영애에게 휘말리지 않으려 했는데.’

저 뻔뻔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하지만 난 가주님의 최측근 하녀잖아.’

자신의 품행 하나하나가 이네스의 평판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를 내 버렸다.

때마침 샬럿이 얼른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메리 말이야, 하녀 주제에 감히 날 윽박질렀어!”

“…….”

“나더러 민폐를 끼치네 마네 막말을 지껄이지 뭐야? 어쩜 저럴 수가 있는지……!”

샬럿은 이제 메리에게 삿대질까지 하고 있었다.

이네스가 당연히 메리를 질책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양, 메리를 일러바치면서도 의기양양한 태도다.

그 치졸한 모양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네스가 메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메리.”

“네, 가주님.”

메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동시에 따스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맙구나.”

응?

뜻밖의 감사 인사에,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네스를 올려다보았다.

“이네스?”

한편 샬럿은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메리에게 빙긋 웃어 준 이네스는 그대로 마부에게 명령을 내렸다.

“출발하자.”

마차가 기세 좋게 타운하우스 밖으로 빠져나갔다.

기겁한 샬럿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네스!”

멀어지는 마차를 몇 번이고 불렀으나, 마차는 멈추기는커녕 더더욱 속력을 높여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 나를 무시한 거야? 이네스가?’

마차가 떠나기 직전.

자신을 일별하던 이네스의 무표정한 눈동자가 가슴에 푹 박혀 들었다.

차라리 경멸하거나 화를 냈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흡사 발에 채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듯, 완벽하게 무가치한 무언가를 마주한 그 시선.

이네스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자존심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기분에, 샬럿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샬럿에게는 그 감상에 오래 잠겨 있을 여유조차 없었으니.

“계속 이 앞에 계실 겁니까?”

경비가 불퉁한 목소리로 타박을 한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샬럿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 돼, 이대로 가면 이네스를 놓쳐 버리고 말아……!’

한시바삐 이네스를 설득해도 모자랄 판국에!

초조함이 온몸을 잠식했다.

샬럿은 미친 듯이 대로변으로 달려 나갔다.

❀ ❀ ❀

이네스가 오늘 방문하기로 한 곳은 위컴 남작부인의 타운하우스였다.

남작부인이 직접 티타임 초대장을 보내온 것이다.

아마 이번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화려한 이혼 소송에 대해 호기심을 느껴서 초대한 것 같았지만.

‘나쁘지 않지.’

위컴 남작부인은 사교계에서도 꽤나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남작부인과 교류하는 다른 귀부인들도 남작부인과 비슷한 성향이었다.

호사가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번 이혼 소송에 대해 적당히 말을 흘리면, 알아서 널리 널리 퍼뜨려 줄 테지.

그러던 중.

‘응?’

응접실로 걸어 들어가려던 이네스가 멈칫 발을 멈추었다.

귀부인들의 대화 중, 익숙한 사람의 이름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서식스 공작 각하 말이에요.”

……서식스 공작 각하?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제 이야기가 나올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혼에 관련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공작 각하는 갑자기 왜?

“이번에 브라이어튼 백작님을 처음 발굴하신 사람도 서식스 공작 각하시잖아요.”

응접실에 모여 앉은 귀부인 중 한 명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독보적이신 분 아니신가요?”

“그건 그래요. 사실 직계 왕족께서 직접적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는 건 드문 일이잖아요.”

“선대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서도, 왕가의 품격이 떨어진다면서 무척 반대하셨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네스는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먼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공작 각하께서 다 쓰러져 가는 엘튼사를 인수한 것 자체가 상당한 이야깃거리였었지.’

이네스 자신이 아직 소녀였을 적의 일이다.

랭커스터의 둘째 왕자, 에녹이 갑자기 언론사 중의 하나를 인수하겠다고 선언했었고.

그에 주변은 무척 떠들썩해졌었다.

지금이야 엘튼사가 왕국 유수의 신문사지만, 그때의 엘튼사는 다 쓰러져 가는 조그만 신문사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들 왕자의 기행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그런데 지금은 보세요, 현재 서식스 공작께서는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귀부인이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엘튼지는 왕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사이고, 공작께서 엘튼사 쪽에 집중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왕위 계승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되었죠.”

“그러네요, 한때는 왕위 계승 문제로 꽤나 시끄러웠던 적도 있었는데…….”

왕위 계승.

이네스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여태껏 에녹의 사업가적인 면모를 주로 접해서 그럴까.

저 부분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서식스 공작께서는 왕위에 전혀 욕심이 없으신 것 같지.’

사실 에녹은 예나 지금이나 출중한 능력을 가져서 왕실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왕위를 노려보았어도 괜찮았을 위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새삼 그의 행보를 되짚어 보니, 마치…….

‘왕위에서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잖아?’

때마침 귀부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게다가 왕국에서 손꼽히는 신진 예술가들은 모조리 공작께서 발굴하셨는걸요.”

“맞아요, 최근에는 브라이어튼 백작님을 발굴하시기도 했고요.”

아, 그래서 서식스 공작 각하의 얘기가 나온 거구나.

이네스는 납득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를 발굴하고 조력한 사람들까지 대화의 줄기가 뻗어 나갔나 보다.

“그래도 참 신기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서식스 공작께서 언론사를 운영하시기로 한 건 여러모로 완벽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뭐랄까, 이런 걸 두고 신의 한 수라고 하나요?”

귀부인들은 흥미로운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한편 본의 아니게 엿듣는 기분이 들었던 이네스는, 부러 인기척을 내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브라이어튼 백작님!”

티타임의 주최자인 위컴 남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네스를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오셨어요, 백작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예쁘게 꾸며진 티 테이블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귀부인들 또한 제각기 이네스를 환대했다.

이네스는 매끄러운 미소로 귀부인들에게 화답했다.

“다들 잘 지내셨죠? 오랜만에 티타임에 참석하다 보니 조금 어색하네요.”

순간 귀부인들이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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