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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1)화 (41/120)
  • 41화

    “아무래도 사교계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이것저것 소문을 듣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 후로 전해 듣기로, 귀부인들 사이에서 샬럿은 그리 평판이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신분이 높거나 부유한 사람들과 친해지려는 모습이 노골적이었고, 조금만 친분이 쌓이면 어떻게든 신사들을 소개받기 위해 애썼다고.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간곡히 부탁하는 통에, 차마 대놓고 거절하기는 어렵지만요.’

    ‘저런 접근 자체가 곤란하다니까요.’

    ‘아무리 인맥을 쌓고 싶어도 그렇지, 저렇게 대놓고 접근하면 어쩌란 말이에요?’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없이 인맥만을 목적으로 접근하는 게 빤히 보였던 것이다.

    헬레나가 무심결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조금 의외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제가 예전에 브라이어튼 백작을 만났을 때만 해도, 다소 소심한 성격으로 보였었거든요.”

    아무리 이네스와 샬럿이 친구라지만 엄연히 이네스 쪽이 훨씬 신분이 높다.

    가문의 격 또한, 제이슨 남작가와 브라이어튼 백작가를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당시의 이네스는 샬럿의 말 한마디에 잔뜩 풀이 죽어서, 다소 의아했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이혼 소송까지 진행할 줄이야…….”

    “그랬습니까? 제가 봤던 브라이어튼 백작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에드워드는 묘한 표정이 되어 턱을 쓸어내렸다.

    법정에서의 이네스는 흔들림 없이 고요했고,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담담했다.

    기죽은 모습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네스를 바라보던 에녹의 눈빛은…….

    때마침 헬레나가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서식스 공작을 본 지 꽤 오래된 것 같네요. 오랜만에 서식스 공작을 불러다가 식사라도 함께할까요?”

    헬레나의 눈동자 위로 희미한 짓궂음이 서렸다.

    “마침 전해 줄 이야기도 있고요.”

    “전해 줄 이야기라면…… 아.”

    에드워드의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금세 두 눈을 반짝인다.

    “그렇지, 조만간 ‘그 행사’가 있을 예정이죠.”

    “아마 서식스 공작도 꽤 흥미로워하지 않을까요?”

    부부는 서로 시선을 맞추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씩 웃었다.

    흡사 재미있는 장난감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은밀하고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 ❀ ❀

    커튼을 내린 방 안은 빛 한 점 들지 않아 어두웠다.

    그 가운데, 샬럿이 침대 위에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평소 정성스럽게 다듬어,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흐르던 붉은 머리채는 온통 산발이었다.

    눈 밑에는 가뭇하게 그림자가 져 있고, 피부 또한 푸석하다.

    그도 그럴 것이, 샬럿은 간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샬럿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 앞에는 수많은 편지 봉투들이 엉망으로 뜯긴 채 흩어져 있었다.

    이번에 엘튼지에서 대대적으로 기사가 나자마자, 예전에 받았었던 티 파티며 파티 초대를 취소하는 편지들이 쇄도한 것이다.

    샬럿은 양손으로 편지들을 와락 움켜쥐었다.

    “이럴 수는 없어.”

    그녀의 손아귀에서 편지들이 제멋대로 구겨졌다.

    “내가, 내가……! 어떻게 진입한 사교계인데! 아악!”

    분을 이기지 못한 샬럿이, 악을 내지르며 편지 봉투들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어두운 방 안으로 편지 봉투들이 새하얗게 흩날렸다.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폭언이 쏟아져 나온다.

    “중앙 사교계로 진입하려고, 내가 정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정확히는 샬럿이 아니라 이네스가 힘을 써서 중앙 사교계의 일원이 된 것이었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샬럿이 중앙 사교계로 들어온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샬럿의 머릿속에서 이미 그녀는 비련의 여주인공에 가까웠다.

    한참을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던 샬럿이, 문득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네스, 이네스를 만나야만 해.”

    결국 이번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네스뿐이었다.

    샬럿이 바득바득 이를 갈아붙였다.

    “일을 이따위로 만든 건 이네스니까, 그 계집애가 이 문제를 책임져야지!”

    애초부터 일이 이렇게 된 건, 샬럿 자신이 절친한 친구의 남편과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지만.

    샬럿의 머릿속에서 그녀 자신은 당연히 피해자고, 이네스는 가해자로 자리가 잡혀 있었다.

    샬럿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래, 일단 그 계집애를 찾아가서…… 네가 오해한 거라고, 너에게 오해를 받아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설명하자.”

    순간 샬럿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나는 피해자라고, 라이언이 순진한 나를 유혹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샬럿이 화색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후 엘튼지에 정정 보도를 내달라고 요청하면 다 해결될 거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생각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이혼한 전남편과 알몸으로 누워 있던 친구를 목격했는데, 그게 어떻게 오해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샬럿은 이미, 사교계에서 퇴출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완전히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다.

    게다가.

    “내가 아니면 누가 그 계집애와 친구가 되어 주겠어?”

    그러한 자신감도 있었다.

    샬럿이 아는 이네스는 순진하다 못해 바보 같았다.

    일찍이 부모님을 잃은 탓에 외로움에 취약했고, 한 번 맺은 인간관계를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이네스는 절친한 친구인 샬럿에게 온통 마음을 터놓고 의지했었고, 샬럿의 말 한마디에 엉망으로 휘둘리고는 했다.

    지금이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단호하게 선을 긋는 척하고는 있었지만…….

    “…….”

    순간 샬럿은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라이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켰던 때, 거침없이 자신의 뺨을 후려치던 이네스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샬럿은 고개를 가로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흥분해서 그런 거겠지. 그래 봤자 이네스에게는 나밖에 없다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샬럿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후다닥 욕실로 뛰어 들어가는 발걸음이 성급했다.

    ❀ ❀ ❀

    그렇게 부푼 가슴을 안고 브라이어튼의 타운하우스로 찾아간 샬럿이었으나,

    “가주님께서 제이슨 남작 영애의 입장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타운하우스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들에게서부터 가로막히고 말았다.

    기가 막힌 샬럿이 와락 언성을 높였다.

    “다들 왜 이래? 나 샬럿이야, 샬럿 제이슨이라고! 이네스의 가장 친한 친구 말이야!”

    “…….”

    “…….”

    하지만 경비들은 혐오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샬럿을 마주 볼 따름이었다.

    샬럿이 사나운 시선으로 경비들을 노려보았다.

    “당장 비키지 못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전에 이네스가 그랬었잖아, 내가 올 때면 언제나 문을 열어 주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그건 예전 일입니다. 가주님께서는 이제 그 명령을 철회하셨습니다.”

    “뭐, 뭐야?!”

    머리를 강타하는 충격에, 샬럿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이네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샬럿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찌나 힘을 꽉 주었는지 손등 위로 새하얗게 뼈가 도드라질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경비들과 실랑이를 하던 중.

    “이게 도대체 무슨 소란인가요?”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메리였다.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의 살림을 총괄하여 돌보는, 이네스의 최측근 하녀.

    당연히 샬럿과도 안면이 있었다.

    샬럿이 반색을 했다.

    “메리!”

    샬럿은 얼른 닫힌 문 앞으로 다가갔다.

    새하얗게 칠을 한 덩굴 장식 문 너머로 메리의 얼굴이 비쳤다.

    문 너머로 고개를 쭉 뺀 샬럿은, 이내 눈매를 휘어 활짝 웃어 보인다.

    “메리, 나 누군지 알지? 샬럿이야!”

    “…….”

    “경비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얼른 이 문 열어 줘, 응?”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 메리는 샬럿을 대할 때 다소 사무적으로 굴기는 했으나, 적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메리는 그저 싸늘한 시선으로 샬럿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뭐야, 왜 저래?’

    불안한 마음에, 샬럿이 미간을 좁히며 메리를 채근했다.

    “왜 이래? 나, 이네스를 만나러 왔다니까?”

    “가주님의 오늘 일정 중, 제이슨 남작 영애를 만나는 건 없었습니다만.”

    “설마 나더러 미리 이네스와의 약속을 잡고 방문하라는 소리야?”

    샬럿이 정색을 했다.

    하지만 메리는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이슨 남작 영애.”

    “뭐라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다음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아서 찾아오시지요.”

    메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샬럿에게 권유했다.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시면 가주님께서 분명 불쾌해하실 겁니다.”

    “너, 너……!”

    샬럿이 메리에게 마구 삿대질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리는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또한 오늘은 가주님께서 선약이 있으십니다.”

    “선약이라고? 어딜 가는데?”

    “글쎄요, 제가 그것까지 말씀드려야 할 이유는 없죠?”

    메리가 빙그레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샬럿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내가 직접 이네스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는데, 선약이랍시고 나가 버린단 말이야?”

    그리고 그 순간.

    메리는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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