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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0)화 (40/120)
  • 40화

    ‘그건…… 싫어.’

    이네스는 조그맣게 양어깨를 움츠렸다.

    사실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보이는 행동과 감정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쯤은 말이다.

    애초에 지금만 해도, 에녹이 그녀를 이성으로 의식할까 두려워서 쫓기듯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나.

    하지만 그래도.

    ‘각하께서 나를 이성으로 의식해 주셨으면 좋겠어.’

    비록 아주 미약하지만, 차마 완전히 외면해 버릴 수는 없는 진실된 욕망.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바라게 된다.

    분명 그녀 자신의 감정인데도, 도무지 제 뜻대로 흘러가지를 않는다.

    라이언에게 바쳤던 모든 사랑이 끔찍하게 짓밟힌 후로, 다시는 그 누군가에게 흔들리지 않으리라 자신했었다.

    에녹에게 품은 감정은 그저 존경심일 뿐이라고, 그녀를 새로이 구원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일 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아냐, 쓸데없는 생각 말자.’

    이네스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어떻게든 에녹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려 애를 써 본다.

    하지만 감은 눈 안쪽으로, 에녹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 ❀ ❀

    저 멀리 이네스가 탄 마차가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녹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군.’

    분명히 오늘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네스는 에녹을 스스럼없이 대했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에녹을 피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었는데…….

    “…….”

    에녹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왜 이네스의 태도가 갑자기 저렇게 변했는지, 그 이유 말이다.

    ‘내가 너무 급작스럽게 다가가서 그런 거겠지.’

    처음 이네스를 마주했을 적.

    그녀의 부어오른 뺨을 목격하자마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고 말았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었어.’

    에녹은 입술을 지그시 당겨 물었다.

    ‘반성해야겠군.’

    아마 평소의 에녹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네스가 제 앞에 서 있을 때면, 그의 평상심이 자꾸만 제멋대로 느슨해진다.

    팽팽했던 이성이 헐거워지고, 감정이 엉망으로 날뛴다.

    그녀의 미소 하나에 기분이 좋아지고, 그녀가 가만히 두 눈을 내리깔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말아서.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홀린 듯이 이네스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에녹은 이네스의 뺨을 어루만졌던 손을 굳게 움켜쥐었다.

    아직도 손바닥 안에 그 뺨의 보드라운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감각을 어떻게든 지워 내기 위해, 에녹은 다른 생각에 골몰하려 노력했다.

    다행히도 그 ‘다른 생각’은 금방 떠올랐다.

    ‘그보다, 제이슨 남작 영애라고 했었나.’

    이네스의 뺨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여자 말이다.

    물론 이네스는 그를 똑같이 되갚아 주었으니 걱정 말라며 웃어 보였지만.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새파란 눈동자에 바짝 날이 섰다.

    ❀ ❀ ❀

    엘튼지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이혼 소송에 관한 뒷이야기’는,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대중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남편이 부인의 예술적 성과를 훔쳐 갔다는 폭로전과 이혼 소송.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한데, 거기에 ‘사실은 남편이 부인의 절친한 친구와 불륜 관계였다’라는 사실까지 더해졌다.

    그리하여 엘튼지의 판매 부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고, 와중에 그 판매 부수에 한 손을 보탠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현 국왕,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 무얼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때마침 사뿐사뿐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한참 신문에 열중하고 있던 에드워드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헬레나.”

    왕비, 헬레나가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턱짓으로 신문을 가리켜 보였다.

    “이 기사 좀 봐요. 요새 엘튼지의 판매 부수가 가파르게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소설보다 현실이 더하군요.”

    “소설보다 현실이 더하다니, 그게 무슨…… 아.”

    그녀가 신문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는가 싶더니, 무언가 알겠다는 눈빛을 했다.

    “제이슨 남작 영애에 대한 거죠?”

    단순히 세간에 화제를 몰고 다니는 불륜녀를 알아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기저에 미묘한 불쾌감이 깔려 있었다.

    “헬레나가 제이슨 남작 영애를 따로 알고 있는지는 몰랐는데요.”

    “모를 수가 없죠.”

    헬레나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샬럿 제이슨.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과 풍만한 몸매를 가진, 활짝 핀 장미처럼 화려한 미인.

    언제나 수많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호화로운 무도회장 안에서도 샬럿이 있는 자리만큼은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헬레나가 샬럿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샬럿의 미모나 남성 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전에 제이슨 남작 영애와 말을 섞을 기회가 있었는데…… 음.”

    헬레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글쎄요, 좋게 표현하자면 무척 적극적이라고 해도 좋을 테지만.”

    아무래도 일국의 왕비쯤 되면, 어떻게든 사람들이 한마디씩 말을 붙이려 하는 것이 당연했다.

    헬레나의 주변에도, 그녀에게 인사 한 번 받기 위해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고는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샬럿은 여러모로 독보적이었다.

    어떤 의미로 독보적이냐면…….

    “조금 무례할 정도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헬레나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에드워드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평소 온화하고 차분하여 모든 귀부인들의 귀감이라 불리는 헬레나였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냉정하게 선을 그을 정도라니.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박한 평가를 내리는 건, 정말 처음 봤는데요.”

    “하지만 사실인걸요.”

    헬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부터 신분 차이가 까마득했기에, 샬럿은 감히 헬레나에게 먼저 말을 붙일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헬레나가 교류하는 사람들은 사교계에서도 명사로 손꼽히는 사람들뿐이었으니까.

    다만 샬럿은 차선책으로 헬레나에게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는 방안을 택했다.

    헬레나가 가는 모든 장소에 따라붙어, 왕비의 시야 한구석에서 계속 기웃거린 것이다.

    샬럿이 어찌나 극성맞게 굴던지, 왕비 근처의 고위 귀부인들이 참다못해 짜증을 낼 정도였다.

    ‘아니, 제이슨 남작 영애는 왜 이렇게 따라붙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건 뭐, 금붕어 똥도 아니고…….’

    하지만 헬레나는 거기까지는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애초에 샬럿이 어딜 가든지 헬레나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비록 샬럿의 행동이 다소 극성스럽다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저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거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놀라운 일은 그 후에 이루어졌다.

    ‘이네스 브라이어튼이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네스를 빌미로, 헬레나에게 기어이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이네스는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샬럿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샬럿 제이슨이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

    헬레나는 다소 떨떠름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굳이 저렇게 다른 친구를 이용해서까지 인사를 해야만 하나?

    그런 기분이 든 탓이다.

    ‘왕비 전하를 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즐거운 연회 되시기를.’

    한편 그를 눈치챈 이네스가, 황급히 눈짓으로 샬럿에게 돌아가자 채근했지만.

    ‘저, 왕비 전하! 이렇게 왕비 전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오히려 샬럿이 두 눈에 불을 켜고 헬레나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헬레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나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랬군.’

    차라리 거기까지만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샬럿은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넘었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죠? 이런 날에는 험프슨 강에서 뱃놀이를 하면 딱 좋은데 말이에요.’

    ‘…….’

    ‘…….’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샬럿만큼은 여전히 해맑은 얼굴이었다.

    ‘험프슨 강은 제도에서 멀지도 않은데, 언제 함께 왕비 전하를 모시고 함께 뱃놀이라도 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샤, 샬럿!’

    기겁한 이네스가 샬럿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진 주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오히려 샬럿이 이네스에게 인상을 썼다.

    ‘왜 이래, 이네스?!’

    ‘아니, 그게…….’

    이네스는 금세 기가 죽었으나, 그래도 어떻게든 샬럿을 이끌고 자리를 뜨는 기지를 보였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험프슨 강에서 헬레나와 절친했던 사촌 자매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직접적인 사인이 바로 뱃놀이를 하다 물에 빠진 것이었다.

    헬레나가 그 일을 크게 떠들고 다니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으나.

    조금만 헬레나에게 신경을 기울인다면 알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던 헬레나는, 절로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헬레나?”

    “아, 네.”

    때마침 에드워드의 부름에, 헬레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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