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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39)화 (39/120)

39화

“제가 브라이어튼 백작의 좋은 기억이 되는 겁니까?”

수려한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져 나갔다.

소년처럼 청량한 미소였다.

“이거 기분 좋은데요.”

“…….”

그렇게 말하는 에녹은, 정말로 즐거운 것처럼 보여서.

이네스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때마침 에녹이 이네스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이네스는 홀린 듯이 그 시선을 맞받았다.

마치 저 호수 같은 눈동자 안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각하께서는…… 나를 이성으로 보고 계신 걸까?’

불현듯 떠오르는 의심에,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바짝 어깨를 굳혔다.

사실 이네스도 남녀 관계에 아주 무지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라이언과 결혼하기 전에는 왕국 최고의 상속녀로서 살아왔었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구애받았던 경험도 있지 않은가.

비록 서식스 공작께서, 본인 스스로의 감정을 자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네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나는?’

반사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이네스는, 동시에 소스라쳤다.

‘정말로 존경심만으로 공작 각하를 대하고 있었던 걸까?’

그 질문에 도저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네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아주 만약에…… 내가 공작 각하를 이성으로 대하고 있었던 거라면.’

하지만 어떻게 에녹 같은 완벽한 남자를 앞에 두고도, 이성으로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에녹은 지나치게 멋있고 근사한 사람이었다.

단순히 외모가 아름다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압도적인 미모 때문에, 에녹 특유의 다정하며 사려 깊은 성품이 가려져 있었다.

그랬기에.

에녹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기에…….

‘아니야.’

순간 이네스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공작 각하를 존경하는 거야. 그래야만 해.’

그녀의 재능을 발굴해 주고, 인정해 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서식스 공작.

그런 서식스 공작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존경하는 후원자’로 대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그녀가 라이언과 이혼하는 데에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건, 단연 엘튼지였다.

라이언의 그림에 대한 의혹도, 라이언과 샬럿의 불륜에 대해서도.

모조리 엘튼지에서 보도했었다.

그리고 엘튼지를 소유한 사람은 바로 에녹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이혼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

누군가가 에녹과 이네스의 관계를 의심하기라도 한다면.

‘공작 각하의 명예에도 해가 끼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이네스는 날카로운 단검으로 얇게 심장을 베인 양 섬뜩함을 느꼈다.

‘서식스 공작 각하는 내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고마운 분이야.’

그런 에녹에게, 고작해야 채 여물지도 않은 스스로의 감정 때문에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게다가.

‘두려워.’

이네스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에녹이 걱정스럽게 이네스를 불렀다.

“브라이어튼 백작?”

이네스는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에녹이 이네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에녹이 멈칫 발을 멈추었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네스는 입 안의 보드라운 살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지금 나, 분명 이상해 보일 거야.’

그를 알면서도 자꾸만 움츠러들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언에게 배신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회귀하기 전, 그리고 회귀한 후의 모든 삶을 통틀어 살펴보아도.

에녹 이상으로 좋은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자유를 움켜쥘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잃어버렸던 삶까지 되찾아 주지 않았나.

그랬기에, 만약 에녹과의 감정이 깊어졌다가 혹여나 어그러지게 된다면…….

‘아예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관계가 되고 말 거야.’

이네스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잘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으나, 워낙 마음이 복잡하여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런 건…… 역시 싫어.’

그렇다면 결국 현 상황을 타개할 방안은 하나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공언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감정을 명확히 인지하지 않은 지금 이때에.

‘관계가 진전될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차단해 버려야만 해.’

그리하여 이네스는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스케치에 집중하느라 다소 피곤해서 그랬나 봐요.”

최대한 멀쩡해 보이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빙그레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럼 오늘은 슬슬 타운하우스로 돌아갈까요? 채색은 추후 진행하도록 해요.”

“……그렇다면.”

그러자 에녹이 힐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마침 시간도 점심시간이니, 식사라도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백작의 이혼을 축하하는 겸해서요. 어떻습니까?”

“아뇨.”

하지만 이네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요. 일찍 들어가서 쉬려고 해요.”

“……하기야 그러실 만도 하지요. 어제만 해도 열이 올랐으니까요.”

에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럼에도 못내 아쉬운 얼굴을 감추지는 못했다.

“타운하우스에는 어떻게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밖에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어요.”

괜히 미련이 남는 바람에,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을 붙여 보았으나.

이네스는 완고하게 선을 그을 따름이었다.

“알겠습니다.”

에녹은 결국 한발 물러났다.

❀ ❀ ❀

그렇게 두 사람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침 일찍 타운하우스에서 나왔는데, 어느새 태양이 하늘 높이 떠 있는 한낮이었다.

‘어쩐지 나 때문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진 것 같아.’

서식스 공작께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서서, 지나치게 선을 그은 건 아닐까.

뒤늦게야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든 이네스가, 에녹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바쁘신 분의 시간을 뺏게 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뇨,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에녹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제가 원해서 찾아뵌 것이니까요.”

“……공작 각하.”

“제가, 브라이어튼 백작을 만나보고 싶어서.”

에녹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

순간 이네스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방긋 웃어 보인 이네스가 미련 없이 마차에 들어서려 했다.

동시에 에녹이 이네스를 불렀다.

“브라이어튼 백작.”

“네?”

이네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말을 고르던 에녹이 재차 입을 열었다.

“백작께서는 앞으로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가문의 가주로서 눈부시게 빛날 겁니다.”

“…….”

뜻밖의 말에, 이네스가 멍하니 에녹을 응시했다.

에녹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이네스는 어쩐지 목이 메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남편도, 우정을 나누었던 절친한 친구도.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누구도, 이네스에게 저런 말을 해 준 적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의 가능성을 믿어 주고 있지 않은가.

저 올곧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가 그저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에녹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이네스는, 결국 힘겹게 감사 인사만을 꺼내 놓았다.

빙그레 웃은 에녹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무리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약속입니다.”

“그럴게요. 공작 각하께서도 이렇게 서 계시지 말고, 얼른 마차에 오르세요.”

이네스의 걱정스러운 말에 에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백작이 출발하는 모습을 보고 가려 합니다.”

“…….”

이네스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아마도 지금의 에녹은, 이네스의 호감을 얻기 위하여 별다르게 행동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몸에 배어 있는 배려심일 터.

그리고 이네스에게는, 에녹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배려해 주는 그 행동이.

‘자꾸만 심장이 뛰어.’

그랬기에.

에녹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어서.

이네스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차에 올랐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그 말만을 남기고, 이네스는 도망치듯 마차를 출발시켰다.

아틀리에가 순식간에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리고 마차가 달리는 내내, 이네스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형편없이 무너진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잘한 일이야.”

쿵쿵 뛰는 가슴을 지그시 손으로 누르며, 이네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잘했어, 이네스.”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이네스가 유리창에 툭 고개를 기댔다.

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은 온통 엉망이었다.

그녀는 아까 자신이 했던 행동을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만약 에녹이 이네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이네스는 과하게 선을 그은 것이 된다.

‘아주 혹시나 내가 예민했던 거라면.’

그녀가 두 눈을 내리깔았다.

‘각하는 그저 내게 예의를 차린 것뿐인데, 나 혼자 착각한 것뿐이라면.’

그리고 그런 가정을 하자마자.

이네스는 커다란 얼음 조각을 통으로 삼킨 것처럼 심장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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