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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38)화 (38/120)
  • 38화

    비록 에녹을 처음으로 매혹시켰던 요소는, 그녀의 빛나는 천재성이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무심결에 던져 넣은 돌멩이 하나로, 호수 전체가 커다랗게 흔들리는 것처럼.

    마음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에녹은 지금 ‘이네스’라는 여자 자체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 흥미가 그저, 자신과는 완벽하게 다른 종류의 사람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인지.

    ……혹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아직 스스로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드륵.

    때마침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을 긁어내는 소리가 울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에녹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초상화 배경 소품들을 대충 배치한 이네스가, 구석에 놓여 있던 안락의자를 끌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락의자의 무게가 상당한지,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

    에녹은 반사적으로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냥 두십시오, 제가 옮기겠습니다.”

    이네스를 만류하며 손을 뻗던 차.

    그녀의 손등 위로 에녹의 손가락이 스쳤다.

    순간 이네스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 ❀ ❀

    초상화에 들어갈 소품들을 모두 배치한 이네스가,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좋아, 이 정도면 됐고. 마지막으로 각하께서 앉아 계실 의자만 있으면 되는데…….’

    이네스는 주변을 살폈다.

    마침 구석에 커다란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라이언이 작업하다가 혹여나 피곤할까 봐, 잠시 앉아 쉬는 용도로 갖다 놓은 의자였다.

    쿠션감은 어떤지, 의자에 앉았을 때 편안한지.

    모조리 이네스가 꼼꼼히 살펴 가며 고른 물건이었지만…….

    ‘뭐, 라이언은 저 의자에도 거의 앉은 적이 없는 것 같지?’

    이네스는 속으로 빈정거리며 안락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당기려는데.

    “윽.”

    생각보다 의자가 무거웠다.

    이네스는 미간을 좁히며 양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

    에녹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냥 두십시오, 제가 옮기겠습니다.”

    움직이는 서슬에,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이네스의 손등을 스쳤다.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몰아쉬었다.

    고작해야 손이 스친 것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긴장이 되고 마는지.

    어떻게든 태연한 척을 하고 싶은데, 온몸이 그만 빳빳하게 굳어져 버린다.

    동시에 에녹이 다소 다급하게 손을 치웠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

    이네스는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눈앞의 에녹도 조금 당황한 것 같아서였다.

    ‘역시 내 자의식 과잉인 걸까?’

    잠시 고민하던 이네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보다, 어쩐지 마음이 좀 그러네.’

    고작해야 손이 스친 것뿐인데 저렇게까지 정색할 필요가 있는지.

    ……손이 닿는다 하여 죽는 것도 아닌데.

    괜히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던 이네스는, 이내 손을 꾹 움켜쥐었다.

    에녹은 예의 바른 신사고, 레이디와 함부로 신체 접촉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데.

    이네스를 배려했기에 에녹이 물러났다는 점을 아는데도.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건지…….

    배배 꼬인 속마음을 감추며, 이네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실례는요, 오히려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한걸요.”

    거기까지만 말해도 좋았을 것을.

    이네스는 별생각 없이 전남편에 대한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애초에 라이언이었더라면, 절 도와주기는커녕 제가 안락의자를 옮기던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걸요. 그러니까…….”

    “…….”

    동시에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라이언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에녹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갑자기 왜 저렇게 기분이 저조해지셨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네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 이쪽에 앉아 주세요.”

    “예.”

    에녹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 이네스가 에녹의 모습을 살폈다.

    당황했던 모습은 간데없이, 이네스는 어느새 무척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주시겠어요? 좋아요. 그리고 턱은 조금 당기고…….”

    그래서일까, 반사적으로 에녹도 조금 긴장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족할 만큼 에녹의 자세를 교정한 후.

    이네스가 이젤 앞에 앉았다.

    진녹색 눈동자가 유심히 에녹을 살피는가 싶더니, 연필이 거침없이 도화지 위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의 이네스는 이 세계와 유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온 신경은 그림에, 그리고 그림의 대상인 에녹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리고 에녹은.

    “…….”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다소 저열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미술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길지도 모르는 천재 앞에서, 이런 은밀한 기쁨을 느끼고야 마는 건.

    그럼에도, 이네스가 오로지 제게만 집중하는 이 상황이…….

    에녹은 그저 황홀하리만큼 만족스러웠다.

    ❀ ❀ ❀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후우.”

    이네스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연필을 내려놓았다.

    “일단 스케치는 끝났어요.”

    “그렇습니까?”

    이젤 너머로 고개를 내밀자, 에녹이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각하.”

    “그림을 그리느라 백작이 더 고생하셨죠.”

    “아뇨,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고생스러운데요.”

    고개를 저은 이네스가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에녹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네스 곁으로 다가왔다.

    “스케치는 좀 어떠신가요?”

    이네스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에녹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 딴에는 스케치가 꽤 만족스럽게 그려진 것 같지만, 당사자인 에녹에게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도 에녹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군요.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네요.”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리던 중.

    이네스는 문득 미간을 좁혔다.

    ‘나, 어쩐지 평소보다도 그림에 유난히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그녀는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에녹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케치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 그림의 주인이 서식스 공작 각하여서 그런 걸까?’

    순간 이네스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냐, 쓸데없는 생각 말자.’

    그들은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손을 잡은 것뿐이었다.

    그러니 굳이 에녹을 의식할 필요 없다.

    ……그래야만 한다.

    “다만 채색을 마저 진행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애써 마음을 다잡은 이네스가,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하여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몇 번 더 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이렇게 멋진 초상화를 받게 되었는데, 당연히 괜찮아야죠.”

    스케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에녹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림이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속으로 안도하며, 이네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는 이 아틀리에를 계속 사용해야겠네요.”

    “…….”

    순간 에녹이 멈칫했다.

    이네스가 직접 설명하기로, 이 아틀리에는 예전에 라이언이 사용하던 장소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분명 이네스는 이 아틀리에에 여러 감정을 갖고 있을 터.

    심지어, 아까 이네스는.

    ‘없애 버릴까 싶어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순간 에녹은 극렬한 불쾌감을 느꼈다.

    한때나마 라이언이 머물렀던 이 장소에서, 당장이라도 이네스를 빼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그래도 다행이에요.”

    뜻밖에도 이네스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성을 되찾은 에녹이 되물었다.

    “……다행이라니요?”

    “사실 이 아틀리에, 제게 무척 소중한 곳이었거든요.”

    이네스는 차분한 시선으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이 아틀리에는 제가 라이언을 위해 직접 꾸민 곳이에요. 건물도 제가 발품을 팔아서 빌렸고, 화구들도 제가 들였죠.”

    “백작.”

    “휴게실의 가구와 의자, 테이블까지…… 모조리 제가 고르지 않은 게 없어요.”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괴로움, 배신감, 라이언을 사랑했던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까지.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미소였다.

    “……여기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라이언이 절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기를 바랐거든요.”

    그녀의 손끝이 느릿하게 이젤 위를 매만졌다.

    “그래서 이곳을 볼 때마다 괴로웠어요. 이 아틀리에에서, 샬럿과 라이언이 사랑을 속삭이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말이에요.”

    “…….”

    에녹은 복잡한 시선으로 이네스를 바라보았지만, 무어라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귀를 기울여 줄 뿐.

    그리고 이네스는 그 침묵이 기꺼웠다.

    ‘그러고 보면 공작 각하께서는 전부터 그러셨었지.’

    에녹은 그녀가 무어라 말하든 간에, 그 말에 일부러 반박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라이언이었다면 분명 ‘여자라서 마음이 좁은 것이다’라면서 그녀를 매도했을 텐데.

    그래서일까, 에녹과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마음이 무척 편했다.

    “그래도 이제는 여기서 공작 각하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네스는 새삼 가벼운 기분으로 말할 수 있었다.

    “뭐랄까,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덧칠해서 없애 버리는 느낌이랄까요?”

    “아, 그렇다면.”

    에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씩 눈매를 휘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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