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37)화 (37/120)

37화

이네스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이 아틀리에는…… 내가 라이언을 생각하며 직접 꾸민 곳이지.’

소소한 가구들이며 벽지, 물건들까지.

이네스의 손길 하나하나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샬럿의 손길이 닿기도 했겠지.’

이 아틀리에에서 샬럿과 라이언은 달콤하게 입을 맞추고, 눈을 마주 보며 웃고, 몸을 섞었다.

남편, 그리고 절친한 친구를 믿고 사랑했던 이네스를 조롱하면서.

이네스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 아틀리에는 라이언에 대한 그녀 사랑의 결정체였다.

그랬기에.

“없애 버릴까 싶어요.”

한참을 침묵한 끝에, 이네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제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 이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에녹은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그의 태도에, 이네스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이네스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어쨌든 공작 각하께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뇨, 우리 사이에 있었던 건 거래였었죠.”

에녹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브라이어튼 백작을 도운 그만큼, 저도 대가를 받아 갔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말씀드려야 합니까?”

“아뇨.”

이네스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래도 고마워요.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 저를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여전히 라이언의 아내였을 거예요.”

“…….”

순간 에녹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만약 백작의 이혼이 실패해서, 라이언 그 작자와 여전히 부부였다면.’

이네스가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상상하자, 저절로 속이 뒤틀렸다.

“좋습니다.”

그래서였을까, 에녹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정 제게 그렇게나 고마우시다면, 저도 백작께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요? 좋아요, 뭐든 말씀하세요!”

이네스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다 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백작이 직접 그린 초상화를 한 점 받고 싶습니다.”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초상화라면 누구의……?”

“당연히 저죠.”

“…….”

그 태연한 대답에, 진녹색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내가 공작 각하를 그린다고?’

한편 에녹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예전에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제게 말씀하셨잖습니까.”

그 목소리는 조금 들뜬 것처럼 들렸다.

“어째서 고트 자작 영식은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지, 그 이유 말입니다.”

아.

허를 찔린 이네스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적이 있었다.

신년 무도회의 밤, 이네스가 에녹을 처음 만나 설득했던 그 날.

이네스는 연필로 조악하게 그린 그림을 건네며, 에녹에게 간절하게 매달렸었다.

‘어째서 제 남편이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지 아시나요?’

새하얗게 쌓여 얼어붙은 눈, 그리고 그 눈보다도 더욱 서늘했던 에녹의 새파란 눈동자.

그리고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을 꼭 마주 쥐었던 그녀 자신.

‘그건, 그릴 수 없기에 그런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얼토당토않은 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에녹은 이네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림이 그녀의 것임을 증명할 기회를 주었으며.

마침내 이네스가 성공적으로 이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나.

에녹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백작께서 저를 설득할 때 그려 주신 초상화,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이네스가 질겁했다.

“윽, 그 그림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다고요?”

“물론이죠.”

“아니, 그 낙서를 어떻게 초상화라고 부를 수가 있어요? 버리세요!”

“버리다니요, 그리고 낙서라니요?”

에녹이 들으란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제게 처음으로 준 그림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저 서운합니다.”

“…….”

정말 한 마디도 안 지지.

이네스가 눈매를 좁히며 에녹을 흘겨보았다.

“그때 서식스의 타운하우스에서, 화풍을 확인할 겸 해서도 한 장 그렸었잖아요. 그건 어디다 두고요?”

이네스는 그렇게 회심의 반격을 날렸으나, 에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정말…… 습작까지 굳이 보관할 필요가 있어요?”

“명장의 습작이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는 법이에요. 수집가로서 탐이 날 만하죠.”

“…….”

그 뻔뻔한 대답에 이네스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곧이어 에녹이 양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다만 제가 이 습작을 보관하는 건, 브라이어튼 백작이 천재여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런 의문을 담아 이네스가 에녹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에녹이 여상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백작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라면 뭐든 갖고 싶더군요.”

“…….”

또다.

분명 내 심장이고, 내 감정인데.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꾸만 저 남자를 의식하고야 만다.

이네스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지그시 당겨 물었다.

‘도대체 공작 각하께서는…… 자신의 말이 내게 어떻게 들리는지 아시기는 하는 걸까?’

심장이 자꾸만 미친 듯이 달음질치는 바람에,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가슴을 꾹 눌렀다.

그러지 않으면 제 심장 뛰는 소리가 에녹에게 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마치 저건.’

신이 정성을 다해 빚어낸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저 사내는, 속 모를 미소로 이네스를 마주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네스는.

눈앞의 남자에게 홀리기라도 한 양,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작 각하께서, 날.’

입 안이 바짝 마른다.

이네스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특별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잖아.’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보수적인 랭커스터 왕국은 이혼 자체를 흰 눈을 뜨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이혼’을 선택한 이혼녀였다.

비록 지금은 라이언의 귀책사유가 워낙에 타당했고, 또한 명문가인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이름이 있어 이네스에게 대놓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네스는 자신할 수 있었다.

라이언이 주로 드나들던 클럽 등지에서는, 분명 이네스를 두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뒤에서 떠들어 댈 것이다.

그에 반해 에녹은 국왕의 하나뿐인 남동생이자 왕위 계승권자이고, 또한 유일한 공작이었다.

상식적으로, 저 완벽한 남자가 굳이 자신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자.’

이네스의 표정이 점차 평연해졌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이네스가, 양손을 갈퀴처럼 사용하여 머리칼을 능숙하게 틀어 올렸다.

그리고는 에녹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어쨌거나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던 쪽은 저였으니까요.”

“……브라이어튼 백작?”

어쩐지 이네스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다.

묘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에녹을 향해, 이네스가 선선하게 말을 이었다.

“그려 드릴게요, 초상화.”

❀ ❀ ❀

이네스는 다른 방으로 에녹을 안내했다.

직접 그림 작업을 하는 곳인지, 아까의 휴게실과는 다르게 여러 화구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하.”

방 안을 둘러보던 이네스가 한숨처럼 조소했다.

“이 방만큼은 깨끗하네요.”

이젤 앞으로 다가간 이네스가, 검지를 들어 이젤 표면을 쓸어 보았다.

얇게 쌓여 있던 먼지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부스러졌다.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

이 방 자체가, 여태껏 라이언이 단 한 번도 화구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이네스는 힐끗 에녹을 돌아보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초상화 배경에 들어갈 자리를 정돈해야 해서요.”

“편할 대로 하십시오.”

에녹은 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는 잠시 고민에 빠지는가 싶더니, 바쁘게 움직이며 물건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에녹은 그런 이네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짙푸른 시선이 유난히 오랫동안 머무는 곳은 바로, 이네스의 목덜미였다.

이네스의 평소 버릇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높게 틀어 올리는 것 말이다.

대충 틀어 올린 탐스러운 다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사슴처럼 우아한 목선이 늘씬하게 뻗어 있었다.

‘어째서일까.’

순간 에녹의 목울대가 커다랗게 움직였다.

이네스가 저렇게 ‘화가’의 모습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신록을 닮은 진녹색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았으면 하고, 온전히 제게 집중해 주었으면 하는.

그러한, 비이성적인 감정…….

‘제기랄.’

동시에 에녹은 그답지 않은 상스러운 욕설을 짓씹어 삼켰다.

에드워드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넌 지금 네 신분과 지위조차 적극적으로 이용해 가면서 백작부인을 돕고 있잖아.’

폐부를 푹 찌르던 그 말.

‘지금 너,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니고?’

에녹의 가장 깊은 속내까지 모조리 꿰뚫어 보는 것 같던, 에드워드의 장난스러운 목소리.

‘네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지원하고, 신경 쓰는 건 정말로 처음 봐.’

에녹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평소였더라면 대충 귓등으로 흘려 버렸을 그 말이, 이렇게나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 사실이기에 그런 거겠지.’

에녹은 힘겹게 인정했다.

그는 지금 브라이어튼 백작을 특별 대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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