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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36)화 (36/120)
  • 36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저 계집애가 나한테 이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데……!”

    “시끄러, 샬럿!”

    샬럿이 억울하다는 것처럼 항변하고, 라이언이 사납게 면박을 주었다.

    그 와중에 대화가 뚝 끊기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네스가 데리고 온 호위들을 마주친 것 같았다.

    싸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이네스가 짧게 혀를 찼다.

    “이건 뭐, 일단 환기부터 해야겠네.”

    방 안에 자욱한 술 냄새와 담배 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올 정도였다.

    성큼성큼 창가로 다가간 이네스가 커튼을 걷어 냈다.

    촤악-.

    방 안으로 환한 햇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전날 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술병과 술잔, 양탄자에 남은 술 자국, 먹다 말고 대충 구석으로 밀어 버린 안주 접시들.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까지.

    이네스가 와락 미간을 구겼다.

    “아무리 휴게실이라지만, 어떻게 아틀리에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생각을 다 하는지…….”

    그녀로써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네스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에녹이 서 있었다.

    “서식스 공작 각하?”

    이네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는 어쩐 일로……?”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에녹이 성큼성큼 이네스에게로 다가섰다.

    “어제 열이 올랐지 않습니까. 그래서 타운하우스에 연락을 보냈었는데, 백작께서 이쪽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녹의 말이 드물게 길었다.

    마치 제가 왜 이네스를 직접 찾아왔는지 변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실 딴에는 그랬다.

    사람을 보내어 상태를 확인하면 그만일 것을, 뭐 하러 번거롭게 아틀리에까지 찾아온단 말인가?

    그러나 이네스는 제 의문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는데.

    에녹이 와락 미간을 좁힌 탓이다.

    “……그런데 뺨은 왜 그러십니까?”

    이네스의 뺨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 이런.’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뺨을 더듬었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그녀가 반사적으로 이마를 찌푸리던 차.

    훅 거리를 좁힌 에녹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렇게 함부로 건드리면 통증이 심해집니다.”

    “…….”

    순간 이네스는 숨을 멈추었다.

    금빛 속눈썹 그늘 아래로 엷게 드리워진 그림자.

    그 아래에 반쯤 묻힌 새파란 눈동자.

    오로지 이네스만을 염려하고 집중하는 저 시선.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기다란 손가락의 감촉까지, 모조리.

    ‘이상해.’

    에녹을 앞에 둘 때마다, 자꾸만 심장이 제멋대로 뛴다.

    이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도, 존경하는 후원자에게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걸까?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이네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하던 이네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지 않은가.

    “…….”

    에녹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텅 빈 제 손안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함부로 뺨에 손을 대서 죄송합니다. 놀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다만 얼굴이 그렇게 퉁퉁 부은 채로 괜찮다고 말씀하셔 봤자.”

    그러고는 묘하게 화가 난 얼굴로 말을 맺는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녹이 몸을 돌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근처에 놓인 물 주전자를 찾아냈다.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신 에녹은, 이네스에게 그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뺨에 대고 계십시오. 비록 임시방편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네스는 순순히 손수건을 받아 들어 뺨을 식혔다.

    ‘시원해.’

    차가운 물기가 뺨에 닿자, 화끈거리던 통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에녹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뺨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 뺨이요?”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통에, 이네스는 데록데록 눈동자만 굴렸다.

    차마 샬럿에게 뺨을 맞았고, 자신 또한 그대로 되돌려 줬다고 말하는 건…….

    ‘애도 아니고, 너무 유치하잖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다 못해, 이네스는 그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하지만 에녹은 제대로 된 해명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아니,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기분이 나빠지신 거지?’

    이네스는 속으로 투덜거렸으나, 결국 에녹의 살벌한 눈빛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그렇게 샬럿과 서로서로 뺨 한 대씩을 때리고,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위세를 들어 샬럿을 압박했다는 유치한 사연을 모조리 고해바친 후.

    ‘분명 유치하다고 생각하시겠지?’

    이네스는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에녹은 그리 이네스를 질책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하셨습니다.”

    “네?”

    그 덤덤한 칭찬에, 이네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어쩐지 공작 각하께서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을 하고 계시는데, 내 착각일까?’

    동시에 에녹이 재차 단호하게 칭찬을 건넸다.

    “잘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 그런가요?”

    “예.”

    ……저렇게까지 못을 박으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 착각은 아닌 것 같지?

    이네스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잘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으면 똑같이 되갚아 주십시오.”

    “……진심이신가요?”

    “진심입니다만.”

    “그, 그렇군요…….”

    얄미우리만치 침착한 에녹의 얼굴을 보며, 이네스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난 이렇게 어색한데, 공작 각하께서는 불편하지도 않으신가?’

    결국 아쉬운 쪽이 지는 법.

    이네스는 화제를 돌리려 시도했다.

    “이렇게 아틀리에까지 찾아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야, 어제 워낙에 백작께서 몸이 안 좋아 보이셨으니 말이죠.”

    어깨를 으쓱인 에녹이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화사한 미소에,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굳혔다.

    ‘정말, 저 미소는 너무 심장에 안 좋다니까.’

    아무리 그녀가 에녹을 ‘존경받아 마땅한 후원자’라고 생각한다고 한들, 그가 이성이라는 자각 자체는 있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반사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듯, 이네스도 그러했다.

    에녹이 저렇게 미소 지을 때마다 자꾸만 마음이 누그러지고 마는 것이다.

    때마침 에녹이 이네스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꽤 회복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

    그녀의 안부를 묻는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다정했기에.

    이네스는 어쩐지 조금 울컥해졌다.

    “……제가 어제 너무 민폐를 끼쳤죠?”

    한참을 에녹을 붙들고 우는 것도 모자라, 에녹의 마차에 거의 실려 오다시피 하다니…….

    어제 일을 다시 떠올린 이네스는 다시 한번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아,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나마 단 하나 다행스러운 부분은, 에녹은 그리 개의치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아프면 그럴 수도 있죠.”

    “그,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럼요. 물론 펑펑 울음을 터뜨릴 때에는 조금 놀랐습니다만…….”

    ……방금 전 했던 말, 취소.

    이네스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렸다.

    에녹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귀 뒤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에녹이 장난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브라이어튼 백작.”

    “……네.”

    불퉁한 목소리로도 꼬박꼬박 대답은 다 한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쩐지 조금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해서.

    ‘형님께서 매번 나를 놀리려 드는 이유가…… 아무래도 이런 심정이어서 그러시는 건가?’

    에녹은 본의 아니게 에드워드의 심정을 이해하고 말았다.

    ‘정말 싫군.’

    그는 속으로 질색을 하며 다시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백작, 얼굴이 빨갛습니다. 혹여나 다시 열이 오르는 건 아닙니까?”

    “…….”

    “빨리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데요.”

    그 짓궂은 목소리에, 이네스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에녹을 노려보았다.

    “일부러 저 놀리시는 거죠?”

    “맞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빨리 채시는군요.”

    에녹이 능글맞게 대답했다.

    이네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참자, 참아야 해. 이번에는 내가 정말 큰 신세를 졌으니까…….’

    그렇게 이네스가 커다랗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던 중.

    주변을 크게 휘둘러보던 에녹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 아틀리에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순간 이네스가 덜컥 굳어졌다.

    “이 아틀리에, 여태껏 고트 자작 영식이 썼던 곳 같은데.”

    “……네, 맞아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에녹은 그를 눈치챈 듯했으나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이네스가 얻어 낸 것을 일깨워 줄 뿐.

    “이제 이혼도 마무리되었으니, 이 아틀리에도 다시 백작의 소유로 되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

    그제야 이네스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나 이제 이혼했지.’

    브라이어튼 백작은 라이언이 아닌 이네스였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머리가 조금이나마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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