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뭐, 너도 수치심을 느끼기는 하나 보구나.”
“이네스, 너!”
“그런데 그 수치심은, 어째 내 전남편과 몇 년간 붙어먹을 때에는 한 번도 발휘가 안 됐나 보지?”
평소 바보스러울 만치 착하기만 하던 이네스의 입술에서, 상상치도 못한 폭언이 쏟아져 나왔다.
라이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제기랄, 하필이면 이네스에게 들킬 줄이야!’
상황 자체가 외통수였다.
라이언은 황급히 이네스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 이네스. 잠깐만 진정하고 들어봐, 우리는……!”
“…….”
이네스는 차게 식은 눈동자로 변명을 주절거리는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런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던 거지, 나.’
스스로가 한심할 따름이었다.
저런 남자에게 목을 매고, 인생을 바치며, 감정을 소모했던 게 아까울 따름이었다.
이네스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회귀 전 과거, 이네스가 아직 라이언을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던 그 시절.
그때의 라이언은 샬럿과의 불륜을 들키고도 그저 뻔뻔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이언은, 적어도 이네스의 눈치를 살피기라도 하지 않는가.
“나랑 샬럿, 아니, 제이슨 남작 영애는…… 그러니까!”
중언부언 이어지는 말을 한 귀로 흘리던 이네스가, 가방에서 두툼한 신문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신문 뭉치를 두 사람 앞에 툭 던져 놓는다.
발부리에 걸리는 돌멩이를 툭 차 내듯, 그야말로 무성의한 동작이었다.
라이언이 미간을 좁혔다.
“신문은…… 왜?”
“한 번 봐 봐.”
이네스가 턱짓으로 신문 뭉치를 가리켰다.
“좋겠어, 라이언? 당신은 언제나 유명해지는 게 꿈이었잖아.”
라이언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왕국 최고의 일간지인 엘튼지의 1면에 올라가다니, 축하해.”
이네스는 신랄하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랭커스터에서 당신 이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없을 거야.”
“무, 뭐라고!”
기절할 것처럼 놀란 라이언이 허겁지겁 신문으로 손을 뻗었다.
신문을 펼쳐 보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려 있었다.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이혼 소송 뒷이야기! 사실 두 부부의 관계는 예전부터 파탄이 나 있었다?!>
제목부터가 사람의 호기심을 확 당기는 머리기사였다.
라이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본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트 자작 영식은 결혼 후에도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중에서도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졌던 여성은 제이슨 남작 영애로…….>
어깨너머로 라이언과 함께 신문을 보던 샬럿이 경악했다.
“잠깐만, 제이슨 남작 영애라면……!”
탁!
샬럿이 라이언의 손에서 신문을 낚아챘다.
새된 목소리가 울렸다.
“어, 어째서 내가 이 기사에 실려 있는 거야?!”
샬럿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엘튼지는 1면 전체를 할애하며, 라이언이 여태껏 벌였던 애정 행각에 대해 소상하게 기재해 두었다.
라이언의 여러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자세하게 작성된 건 샬럿이었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미모의 여인.
라이언 외로도 수많은 남자들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샬럿이 중앙 사교계에 데뷔할 수 있었던 이유도, 브라이어튼 백작의 친구였기에 가능했다는 부분까지.
그 모든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절친한 친구의 남자를 빼앗은 여자.’
그리고 그 요약 자체가, 사람들의 호기심에 불을 붙이고도 남았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감히 여자가 이혼을 청구하여 승소했다’며 제멋대로 떠들어 댔을 텐데.
그런 잡다한 불만까지 쏙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신문을 움켜쥔 샬럿의 손등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번쩍 고개를 치켜 든 샬럿이 서슬 퍼런 시선으로 이네스를 노려보았다.
“이네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긴.”
하지만 이네스는 그저 여유롭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친구의 전남편과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추고, 몸을 섞을 수 있는 여자에게.”
“너……!”
“내가 이러지 못할 이유는 또 뭔데?”
이네스가 얄밉게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샬럿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미친……!”
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샬럿이 거세게 이네스의 뺨을 후려쳤다.
그 매서운 손속에, 이네스의 뺨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러고도 샬럿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었다.
“이, 악독한, 끔찍한! 네가 정말로 내 앞길을 막으려고 작정을 했……!”
샬럿이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는 것도 잠시.
그 목소리가 툭 끊어졌다.
짝!
이네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올리는가 싶더니, 샬럿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제 뺨을 감싸 쥔 샬럿이 기가 막힌 얼굴로 이네스를 올려다보았다.
“너, 너! 날 때렸어!?”
샬럿이 펄쩍 뛰거나 말거나, 이네스는 아릿한 손아귀를 주무를 따름이었다.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손바닥이 저릿해질 정도였다.
그 저린 감각에 만족스러워하며, 이네스가 샬럿에게 되물었다.
“설마하니 내가 얌전히 너에게 맞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이네스!”
“네가 한때 내 남편이었던 남자와 저질렀던 불륜, 그리고 내 신체에 입힌 상해까지 모두.”
이네스는 냉엄한 시선으로 샬럿을 마주보았다.
“제이슨 남작가에게 배상을 요구할 거야.”
“그, 그딴 식으로 나와 봐야 소용없어! 우리 가문에서도 가만있을 줄 알아?”
샬럿이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너도 날 때렸잖아! 나도 신체적 상해를 입었다고!”
“아하, 그래?”
그러자 이네스는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샬럿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게, 지금 웃어?!”
그렇게 한참을 웃은 후에야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번 그렇게 해 보든가.”
어찌나 웃었는지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내며, 이네스가 여상하게 말을 덧붙였다.
“다만, 브라이어튼과 제이슨 두 가문이 서로 법정에서 만났을 때.”
“…….”
샬럿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어디가 이길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지,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이 말을 협박으로 듣는다는 것 자체가, 현 상황이 네게 있어 무척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샬럿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뭐, 그것도 제이슨 남작 가문이 내게 소송을 건다는 전제하에서지만 말이야.”
이네스는 재밌어 죽겠다는 시선으로, 부들부들 어깨를 떠는 샬럿을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제이슨 남작가가 상식적인 가문이라면.”
그러고는 여유롭게 말을 덧붙인다.
“뻔히 패소할 상황을 앞에 두고, 감히 브라이어튼 백작가와 대립하려 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너, 너어……!”
샬럿이 이를 갈며 다시 한번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뺨을 후려치려 함이었다.
하지만 샬럿은 제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는데.
“샤, 샬럿!”
화들짝 놀란 라이언이 손을 뻗어 샬럿의 손목을 붙든 탓이었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평소 이네스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 하며 부르던 ‘제이슨 남작 영애’라는 호칭마저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다만 내게 더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손찌검을 하려 시도하기 전에.”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이네스가 느긋하게 말을 덧붙였다.
“잘 생각해 본 후에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뭐라고?”
“설마 내가 여기까지 혼자 왔을 거라고 생각해?”
순간 샬럿이 멈칫했다.
이네스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좀 시끄러웠지? 내가 아틀리에에 들어올 때 문고리를 아예 부숴 버려서 그래.”
“너, 너 그건……!”
“설마 그걸 내가 직접 부쉈겠어?”
그 되물음에, 샬럿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어졌다.
입술만 뻐끔거리던 샬럿은 결국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그러고는 울상이 되어 라이언을 돌아본다.
“라이언, 이네스 좀 어떻게 해 봐!”
“…….”
하지만 라이언은 맹수 앞에 선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네스는 그런 라이언을 한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도 그럴 것이, 브라이어튼 백작이 아닌 라이언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고작해야 고트 자작가의 영식.
그것도 둘째여서 작위조차 물려받지 못하는 처지일 뿐.
본성부터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라이언이었다.
거기다 밖에는 건장한 호위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감히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대어들 생각은 하지 못할 터였다.
그 증거로.
“……나가자.”
“라, 라이언!”
“아, 얼른!”
라이언이 얼굴을 붉히며 샬럿의 손목을 마구 잡아당겼다.
결국 두 사람은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도망치듯 아틀리에에서 빠져나갔다.
거리가 멀어지는 와중에도 마구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