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 ❀
다음 날 아침.
이네스는 반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곁에 앉아 있던 메리가 반색을 하며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가주님, 깨셨어요?”
“아, 메리.”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이네스가 방긋 눈웃음을 지었다.
“설마 나를 간호하느라 잠도 못 잔 거야?”
“어휴, 당연하죠! 어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타운하우스로 돌아오시는 내내 계속 쓰러져 계셨다고요!”
기나긴 잔소리가 이어졌다.
수선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 메리가 이네스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이제 열은 다 내린 것 같네요. 그래도 오늘 하루쯤은 요양하시는 편이…….”
“아니.”
고개를 가로저은 이네스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깃털처럼 가뿐했다.
“오늘은 외출해야 해. 할 일이 있거든.”
“네에? 할 일이요?”
“응. 그보다 어제, 서식스 공작께서 날 데려다주시지 않았어?”
이네스가 다소 민망한 얼굴로 슬그머니 물었다.
‘나, 완전 추했었지.’
펑펑 울지를 않나, 심지어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었다.
에녹의 부축을 받아 돌아온 것까지 떠올리자, 저절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정말,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고 해도 그렇지!’
열에 들뜬 나머지 추태를 부린 것 같다.
이네스는 당장 에녹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낼 것을 다짐했다.
“아 참, 그렇지.”
한편, 메리가 마침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식스 공작께서 보내오신 게 있어요.”
“공작 각하께서?”
메리가 탁자 쪽으로 다가가는가 싶더니, 커다란 무언가를 품에 안고 뒤뚱뒤뚱 돌아왔다.
그러고는 그를 이네스 앞에 내밀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것 보세요, 가주님께서 완쾌하시라고 과일 바구니를 보내오셨어요!”
“…….”
순간 이네스는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갖가지 귀한 과일들이 빼곡하게 차 있는 고급스러운 바구니.
그도 그럴 것이, 저 바구니는 이네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재판정에서 그렸던 과일 바구니와 똑같은 종류야.’
그녀에게 승소를 안겨줌으로써, 라이언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정물화.
그 정물화를 저 과일 바구니를 주제로 그렸던 것이다.
“카드도 있어요!”
때마침 메리의 활기찬 목소리가 울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이네스가 메리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래? 이리 주렴.”
빳빳한 카드 위로는 특유의 우아한 필체로 짤막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조속한 쾌유를 빕니다.>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 각하와 꼭 어울리는 필체네.’
어쩜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는, 필체 하나까지 이렇게 귀족적인 건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응?”
이네스는 조금 놀랐다.
그저 의례적인 안부 인사로 마무리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직 메모가 끝나지 않은 것이엇다.
<사후 처리도 확실히 끝냈습니다. 그에 대해 확인하시려면, 오늘 발행된 엘튼지를 보시면 됩니다.>
엘튼지라고?
이네스가 황급히 메리를 돌아보았다.
“메리, 오늘 조간신문은?”
“여기 있어요.”
메리가 오늘 아침에 발행된 엘튼지를 건네주었다.
신문을 빠르게 훑어 내리던 이네스가 한숨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에녹은 이네스와의 약속을 끝까지 철저하게 지켰다.
어제 있었던 브라이어튼 백작 부부의 이혼 소식과 더불어, 샬럿과 라이언의 불륜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기사를 들여다보던 이네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주님? 갑자기 왜…….”
“아까 그랬잖아, 할 일이 있다고.”
그러자 메리가 정색을 했다.
“아니, 아프신 분이 쉬실 생각은 안 하시고요!”
“그야, 나는 이제 브라이어튼 백작이잖아. 그러니까…….”
이네스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라이언에게 백작가의 재산들을 회수하러 가야지.”
라이언에게 넘겨줬던 모든 것들을 되찾을 시간이었다.
❀ ❀ ❀
두터운 암막 커튼이 쳐져 어두운 방.
담뱃재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와 빈 술병들, 제멋대로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뱀의 허물처럼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방의 구석에 놓인 침대 위.
나신의 남자와 여자가 뱀처럼 뒤얽힌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울릴 뿐, 방 안은 무덤처럼 고요했다.
그런데 그때.
쾅쾅쾅!
누군가가 문을 시끄럽게 두드렸다.
아무래도 아틀리에의 현관을 두드리는지, 건물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으…….”
남자, 라이언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제 들이부었던 술 때문에 머리가 쾅쾅 울리는 탓이다.
“아, 제기랄…….”
라이언은 욕설을 짓씹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의 양팔에 안겨 있던 샬럿이 라이언의 품 안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라이언, 좀 나가 봐…….”
“시끄러 샬럿, 네가 나가면 되잖아……?”
두 사람은 개처럼 낑낑거리면서도 눈을 뜨지는 못했다.
어마어마한 숙취 때문이었다.
어제 있었던 재판 이후.
샬럿과 라이언은 아틀리에에 모여 앉아, 새벽까지 술을 들이부었다.
‘어떻게 이네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라이언은 그렇게 설움을 토해 냈고,
‘걔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그래. 내가 이네스를 만나서 한 번 설득해 볼 테니까, 자기도 좀 진정해. 응?’
샬럿은 입으로는 달콤한 말로 라이언을 달래면서도 미묘한 위기감을 느꼈다.
일전에 신년 무도회에 참석할 적, 함께 마차를 타도 되냐고 물었던 때에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도 그렇고.
‘……예전의 이네스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눈앞의 라이언이 워낙에 절망하고 있었기에, 더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술잔을 나누던 것이 과음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
“…….”
때마침 사위는 누군가가 언제 문을 두드렸냐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샬럿은 마음을 놓고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갑자기 기이한 소음이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카드득!
쇠붙이가 마찰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뭐, 뭐야?!”
놀란 샬럿이 두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덩달아 몸을 일으킨 라이언이, 멍청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 누가 문을 부수기라도 하는 건가……?”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두 사람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시끄러운 소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치 강제로 문고리 자체를 분리해 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득, 카드득-우득!
문고리와 문이 분리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철컹!
마침내 문고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쯤 되자 라이언과 샬럿도 잠기운이 싹 달아나 버렸다.
“뭐, 뭐야? 도둑인가? 아니면 강도?”
“어느 정신 나간 새끼가 문고리까지 뜯어 내고……!”
두 사람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닫힌 문밖으로 또각또각 구두 굽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 후.
방문이 벌컥 열렸다.
한낮의 환한 햇살이 어두운 방 안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을 등지고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라이언이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이, 이네스?”
이네스였다.
이네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으, 냄새. 도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야? 게다가 아틀리에에서 담배까지 피다니…….”
지독한 술 냄새, 그리고 그에 뒤섞인 담배 냄새가 방 안에 매캐하게 고여 있었다.
그 냄새가 어찌나 심한지 역하다 못해 토할 것 같았다.
주변을 커다랗게 둘러보던 이네스가, 이내 미간을 좁히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샬럿, 언제는 너 담배 안 피운다고 했잖아?”
진녹색 눈동자가 재떨이 안, 붉은 립스틱 자국이 선명한 담배꽁초에 닿아 있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인생 역전을 하는 게 네 꿈이라며.”
“그, 뭐? 이네스, 그게 무슨…….”
샬럿이 당황한 눈빛으로 이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머저리 같은 얼굴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눈매를 휘어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신사들이 싫어하는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아, 아니 그건……!”
“하지만 샬럿.”
샬럿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네스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친구의 남편과 뜨거운 밤을 보내는 시점부터, 좋은 남자와 가정을 꾸리겠다는 네 꿈은 이미 물 건너 간 것 아니니?”
그리고는 들으란 듯이 말을 덧붙인다.
“아, 물론 지금은 ‘전남편’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 그건 오해야!”
“오해?”
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잘 갈린 칼날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샬럿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언제나 바보 같을 정도로 순했던 이네스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정말로 처음 보았다.
동시에 이네스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날카로운 조소였다.
“내 전남편과 헐벗은 몸으로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오해니?”
“뭐, 뭐?!”
그 노골적인 말에, 샬럿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샬럿은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벗은 몸을 가렸다.
이네스가 흥미롭다는 것처럼 그런 샬럿을 뜯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