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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33)화 (33/120)
  • 33화

    “재판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그래도……!”

    “아무래도 브라이어튼 백작은 오늘 재판에 참석하느라 무척 피곤한 것처럼 보이니.”

    흘끗 이네스를 곁눈질로 돌아본 에녹이, 라이언에게서 이네스를 보호하듯 두어 걸음 움직였다.

    탄탄한 몸 뒤편으로 이네스의 몸이 모조리 가려졌다.

    “두 사람 모두 조금 더 마음을 정리한 후에 대화를 나누는 편이 좋겠습니다.”

    “…….”

    “무엇보다도 나는, 브라이어튼 백작이 평온한 상태에 있기를 바랍니다.”

    에녹이 못을 박듯 말을 맺었다.

    “그녀를 발굴하여 지원하기로 결심한 후원자로서 말입니다.”

    “…….”

    그 완고한 태도에, 라이언은 차마 에녹에게 무어라 반기를 들 수조차 없었다.

    한편 제 할 말을 모조리 쏟아 낸 에녹이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가시죠, 브라이어튼 백작.”

    “감사합니다.”

    에녹의 에스코트를 받아 자리를 뜨려던 이네스는, 마지막으로 라이언을 일별했다.

    “이네스……!”

    어떻게든 이네스를 붙들어 보려던 라이언이 멈칫했다.

    라이언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봄처럼 온화했던 진녹색 눈동자.

    이제 그 눈동자에는 경멸만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여태껏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던 시선이었다.

    “…….”

    더 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처럼 이네스는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라이언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이쪽으로.”

    에녹은 이네스를 앞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심결에 그의 뒤를 따라가던 이네스가, 순간 두 눈을 꽉 감았다 다시 떴다.

    ‘어지러워.’

    시야가 제멋대로 일렁거리고, 호흡 또한 뜨겁다.

    그렇게 숨을 가다듬던 중.

    이네스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그녀는 지금 낯선 통로에 서 있었다.

    가장 이상한 점은 주변에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

    재판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취재진이며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야 정상인데…….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공작 각하. 이 길은……?”

    “왕족들만 사용하는 통로지.”

    동시에 누군가가 불쑥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구, 국왕 폐하?!”

    “그러니 감사한 줄 알라고.”

    국왕, 에드워드가 얄밉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 통로, 왕족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단 한 번도 사용을 허용해 준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솔직히 난 처음에 허락 안 해 주려고 했어. 그런데 말이야.”

    에드워드가 장난스럽게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내 친애하는 동생이 이 통로를 사용하게 해 달라며 어찌나 부탁을 하던지, 차마 거절할 수가 없더라니까?”

    “재판정 입구에 취재진이 많이 몰려 있을 겁니다. 혼란이 일어날까 염려스러워 부탁드린 것뿐이에요.”

    유들유들한 에드워드의 말을 딱 끊어 내며, 에녹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애초에 형님께서도 동의하신 사안인데, 왜 갑자기 이러십니까?”

    “아, 누가 뭐래? 그냥 그랬다고.”

    “…….”

    에녹이 살벌하게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에드워드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난 이쯤에서 눈치 있게 빠져 줘야겠지? 더 있다가는 에녹이 진짜로 내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형님, 정말……!”

    “그럼, 브라이어튼 백작.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에드워드가 이네스를 향해 씩 눈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또 보도록 하지.”

    그 후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먼저 밖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어리벙벙한 얼굴이 된 이네스가, 멀어지는 국왕의 등 뒤로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살펴 가십시오, 폐하.”

    “…….”

    에녹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제 형의 뒷모습을 쏘아보다 말고,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 공작 각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차를 마련해 두었으니, 가시죠.”

    그렇게 몸을 돌리던 에녹이, 순간 경악하여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에녹을 따라 나서려던 이네스가 커다랗게 휘청거렸기 때문이었다.

    에녹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이네스를 부축했다.

    “브라이어튼 백작?!”

    “아, 죄송해요.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 같아요.”

    이네스가 황급히 사죄했다.

    그와 함께 에녹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지금 제게 사과할 때입니까? 열이 나잖아요!”

    그녀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한편 이네스는 그 말을 들은 후에야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이네스가 몽롱한 시선으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열이 나서 이렇게 어지러운 거였어.’

    그 순간, 사지에 돌을 매단 것처럼 온몸이 무거워졌다.

    도무지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어서, 이네스는 비틀거리며 에녹에게 몸을 기댔다.

    “백작, 괜찮은 겁니까?!”

    에녹의 목소리가 멀게만 들렸다.

    ‘아무래도 아침에 찬바람을 쐬었던 게 탈이 났나 봐.’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던 이네스가, 문득 입술을 열었다.

    “그것보다, 공작 각하.”

    에녹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짙푸른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이네스가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가 저를 브라이어튼 백작이라고 불러요.”

    “……백작.”

    “이것 봐요, 공작 각하께서도 저를 백작이라고 불러 주시잖아요.”

    코끝이 맵싸해졌다.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 했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다갈색 속눈썹이 삽시간에 젖어 들었다.

    “드디어…… 다 끝난 걸까요?”

    수많은 감회가 밀려들어서,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당겨 물었다.

    온몸을 꽁꽁 얽어맸던 쇠사슬이 몽땅 풀려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이토록이나 자유로웠던가.

    이네스의 뺨 위로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저는 이제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아니라, 브라이어튼 백작인 걸까요?”

    “…….”

    그런 이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녹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예, 브라이어튼 백작. 당신의 승리입니다.”

    그 말을 듣자,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목 안이 뜨거워졌다.

    “윽, 흑. 흐윽…….”

    이네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에녹은 그런 이네스더러 울지 말라고도, 섣부른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이네스 곁에 오래오래 함께 있어 줄 뿐.

    ❀ ❀ ❀

    그 후.

    에녹은 직접 이네스를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타운하우스까지 데려다주었다.

    “정말로 이대로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타운하우스 안에는 사용인들도 있는걸요.”

    그 걱정스러운 물음에,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오래 울어서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으나, 그 미소 자체는 등불을 켠 것처럼 환했다.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푹 쉬어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에녹은 영 마땅찮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마님!”

    때마침 놀란 메리가 이네스를 맞아들이려 달려 나왔다.

    “오늘 이혼 소송을 하신다고 들었었는데……!”

    “이겼어.”

    이네스가 대뜸 대답했다.

    메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 하게 커졌다.

    “네?”

    “이겼다고.”

    주어며 뭐며 모조리 생략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메리가 아니었다.

    메리의 얼굴 위로 기쁨이 번져 나갔다.

    “세상에!”

    “그러니 앞으로는 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해. 알았지?”

    “그럼요, 그럼은요 가주님!”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던 메리는, 그제야 이네스 곁에 서 있던 에녹을 발견했다.

    “저어, 이분은……?”

    “아, 소개가 늦었네.”

    이네스가 열에 달뜬 얼굴로 배시시 눈매를 휘어 보였다.

    “서식스 공작 각하셔.”

    “네에?!”

    뜻밖에도 거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기절할 것처럼 놀란 메리가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서, 서식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되었다. 그보다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오늘 좀 무리하신 듯해.”

    비틀거리는 이네스를 메리에게 넘겨주며 에녹이 신신당부를 했다.

    “열이 올랐으니 잘 간병하도록.”

    “예? 열이……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이네스를 부축하던 메리가 순간 경악했다.

    “가주님, 몸이 불덩이에요!”

    “난 괜찮아. 그냥 조금 어지러울 뿐…….”

    “괜찮기는요, 열이 이렇게나 높은데요?!”

    기겁을 하는 메리에게, 에녹이 다시 한번 말을 덧붙였다.

    “주치의를 부르고, 혹시 고트 자작 영식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주변 경계도 확실히 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남긴 메리가 허겁지겁 이네스를 타운하우스 안으로 부축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모습이 타운하우스 안으로 사라졌다.

    “…….”

    에녹은 복잡한 시선으로 타운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사실 브라이어튼 백작가는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이며, 이름 높은 명문가였다.

    당연히 이네스의 병간호도, 주변의 방비도 알아서 잘 할 수 있을 터.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쯤, 그 자신도 잘 아는데.

    ……어째서 이렇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그렇게 에녹은 한참을 브라이어튼의 타운하우스 앞을 서성거렸다.

    ❀ ❀ ❀

    그날, 이네스는 꿈조차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과거로 회귀한 이래로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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