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32)화 (32/120)
  • 32화

    에드워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무한정 시간을 들일 수는 없으니, 오늘 재판이 폐정될 때까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하지.”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럼 두 사람 모두 시작하게.”

    이네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연필로 흐리게 사물의 윤곽을 잡고, 빛과 그림자의 방향을 표시한다.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는 호쾌한 동작이었다.

    ‘제기랄!’

    라이언도 결국 어금니를 깨물며 연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비록 미술적 소양이라고는 어렸을 적 교양으로 잠시 배웠던 그림뿐이었으나, 그래도 뭐라도 그려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라면 이네스에게 완전히 밀리고 말 테니까.

    ‘수채화, 수채화라고 했었지.’

    라이언은 아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예전 이네스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조잘거리던 게 문득 떠오른다.

    ‘라이언, 이 그림은 말이야. 기름이 아니라 물로 농도를 조절하는 거야. 정말 신기하지? 그리고…….’

    ‘아, 진짜. 고작해야 그림 가지고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그때는 그렇게 면박을 주었었는데.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그때 이네스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듣지 않은 게 무척 후회가 된다.

    한편 이네스는 이미 채색에 들어가고 있었다.

    붓을 놀릴 때마다, 하얀 도화지 위로 투명한 색감이 눈부시게 자리 잡는다.

    ‘아, 안 돼!’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라이언은 마구잡이로 물감을 짜내기 시작했다.

    채색을 시작하는 손끝이 긴장감으로 가늘게 떨렸다.

    하얀 물감으로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고, 빛을 표현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그만.”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붓을 내려놓도록.”

    이네스는 지체 없이 붓을 내려놓았으나, 라이언은 달랐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그림을 조금이라도 손보기 위해 애를 쓴다.

    “브라이어튼 백작!”

    “예, 예!”

    보다 못한 에드워드가 노성을 내지른 후에야, 라이언은 미적미적 붓을 놓았다.

    어느새 창문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폐정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빠르게 확인하도록 하지.”

    그렇게 에드워드와 에녹, 그리고 전문가들이 그림을 감정하기 시작했다.

    그 후, 내려진 판결은.

    “브라이어튼 백작의 그림은…… 글쎄요, 일단 전문 화가가 그린 것이라고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전문가 한 명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전문가도 그에 동의했다.

    “애초에 이건 습작에 가까워요.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았다기보다는, 교양으로 조금 배운 자의 그림입니다.”

    “그런가?”

    “예. 저희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에드워드에게 허리를 조아려 보였다.

    라이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럴 수가!’

    한편 그림을 살펴보던 에녹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라이언의 그림은 제 발뒤꿈치조차 따라오지 못해요.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이네스의 그 자신만만한 말이 문득 떠올라서였다.

    ‘적어도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군.’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그림은 애초에 질적으로 달랐으니까.

    이네스의 그림과 라이언의 그림을 견주어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림의 완성도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이네스는 제한 시간 안에 거의 완벽하게 그림을 완성해 낸 반면에, 라이언은 간신히 도화지에 빈 곳이 없도록 색을 칠해 둔 수준이었다.

    게다가 두 그림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채색법 자체가 확연히 다르군요.”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라이언은 채찍으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움찔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젠장!’

    라이언은 비록 수채화 기법을 사용하려 노력했으나, 슬프게도 그 노력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이네스 특유의 투명한 수채화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라이언은 제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으로, 물감의 색감을 조절할 때에 하얀 물감을 사용했다.

    유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채색하려 한 것이다.

    ‘사실 그 방법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아마 이네스였더라면 라이언의 방식으로도 그녀 특유의 훌륭한 그림을 그려 냈을 터였다.

    그녀는 도구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의 명장이었으니까.

    다만 라이언은 그러지 못했다.

    ‘실력이 지나치게 모자라서 그런가, 그림 자체가 조잡하군.’

    에녹은 냉정하게 평가를 내렸다.

    라이언의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텁텁하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물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도화지가 군데군데 일어난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와는 달리, 이네스는 오로지 물로만 물감의 농도를 조절했다.

    빛이 비쳐 들어오는 그림의 가장 밝은 부분은, 과감하게 흰 도화지로 남겨 둠으로써 빛을 표현했다.

    그래서 특유의 투명한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사람들이 라이언더러 세기의 천재라고 떠받들었던, 그 채색 방법이었다.

    그리고 저 그림들을, 이네스가 에녹의 미술전에 출품했던 두 그림과 비교해 보자면…….

    “저건…… 너무 다르지 않아요?”

    “그러게요, 어떻게 저걸 같은 그림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어요?”

    그림을 목격한 방청객들도 이제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상태.

    일반인들까지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두 그림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소리였다.

    “이건 뭐, 말할 것도 없군.”

    그림을 살펴보던 에드워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브라이어튼 백작, 아니지, 이제는 고트 자작 영식이라고 불러야 하겠군.”

    “예?”

    라이언이 뺨을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

    “왜냐하면 고트 자작 영식은 이번 재판에서 패했으니까 말이지.”

    “폐하, 어찌 그런!”

    라이언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에드워드가 질색하는 낯으로 라이언을 마주했다.

    “아니, 자네는 도대체 양심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가?”

    “하, 하지만……!”

    “설마 이따위로 그림을 그려 두고도 자네가 승소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래?”

    에드워드는 화가 나기보다도 기가 찬 얼굴이었다.

    라이언은 어찌할 바 몰라 눈동자만을 굴렸다.

    “됐네, 더 말할 필요도 없어.”

    고개를 가로저은 에드워드가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이 시간부로, 이네스 브라이어튼과 라이언 고트의 이혼은 성립되었음을 선언한다.”

    뭐라고!

    라이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또한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작위도 이네스 브라이어튼에게로 돌아갈 것이네.”

    “폐하!!”

    “번복은 없다. 이것으로 재판을 폐정한다.”

    단호하게 말을 맺은 에드워드가 그대로 돌아섰다.

    라이언은 다리에서 쭉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럴 수가……!’

    머리가 아찔해지는 통에, 라이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라이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혼 소송이 받아들여졌다고요?”

    “세상에, 그렇다면 백작부인더러 이제 브라이어튼 백작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놀란 방청객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순간 라이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네스!’

    당장 이네스를 붙들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지금 이네스를 설득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브라이어튼 백작 자리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백작으로서 움켜쥐었던 사치스러운 삶도, 고트 자작가에게 주었던 수많은 이권과 혜택도!

    모조리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 이네스! 잠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언이 이네스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라이언과 이네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에녹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에게 무언가 할 말이라도?”

    에녹이 고개를 기울이며 라이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공작 각하.”

    라이언이 에녹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네스와 조금 대화를 나누려 하는데…….”

    순간 라이언은 등골에 바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저 무표정했던 에녹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적의가 번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에녹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잘 갈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미소였다.

    “글쎄요. 그건 그리 현명한 처신은 아닌 듯합니다.”

    “예? 현명한 처신이라니, 그 무슨…….”

    “이제 브라이어튼 백작과 고트 자작 영식은, 더 이상 부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여상한 말에 라이언이 바짝 얼어붙었다.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다.

    그 말이 뼈가 시리도록 와 닿았다.

    무엇보다도 에녹의 저 시선.

    라이언을 똑바로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기이하게 싸늘했다.

    마치 그가 이네스 근처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자체를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왜, 왜 저런 눈빛이시지?’

    라이언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나자, 그제야 에녹은 만족했다는 것처럼 우아하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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