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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31)화 (31/120)

31화

“제가 다소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건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남자다 보니 이런저런 사회생활을 하느라 바빴죠.”

사람들은 어느새 홀린 듯이 라이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네스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하기야, 말 하나만큼은 물 흐르듯 잘하는 사람이니까.’

이네스 자신도 라이언의 달콤한 말 하나에 속아, 그와의 결혼을 감행했을 정도니 말이다.

라이언은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네스가 외로웠던 것도 이해합니다. 여자들은 보통 외로움을 많이 타고, 그 와중 제가 자주 부재중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라이언은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이네스를 홱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위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위증.

그 단어에 방청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방금 브라이어튼 백작께서 위증이라고 하신 거 맞나요?”

“위증이라니…… 그렇다면 백작부인이 거짓된 사유로 제 남편을 법정에 세운 거라는 말이에요?”

그 술렁거림에 힘입어, 라이언이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며 선언했다.

“저와 이네스는 오랫동안 함께 그림을 그려 왔습니다. 당연히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도 있죠.”

라이언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사람들에게 되물었다.

“그 말은 즉, 부부끼리는 화풍이 닮을 수 있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 태도며 목소리가 어찌나 확고한지, 방청객들이 조심스럽게 서로를 마주 볼 정도였다.

“그, 그런가?”

“하기야 그럴 수도…….”

그 속삭임을 들으며, 라이언은 승리감으로 등골이 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저 무능한 변호사는 이 정도 일 처리조차 못 하고!’

자신만만해진 라이언이 이네스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이쯤 하면 이네스도 정신을 차렸을지도 몰라, 지금이라도 싹싹 빌면 용서를 해 주……!’

동시에 라이언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뭐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음에도 이네스의 표정은 그저 고요했다.

진녹색 눈동자가 라이언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리고.

“…….”

이네스가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라이언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야, 왜 저렇게 웃는 거야?’

한편 이네스는 에녹과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

이네스가 에녹에게 거래를 청했고, 에녹이 그를 받아들였던 그날.

‘백작이 부부라서 화풍이 비슷해졌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거든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화풍이 비슷해졌다, 라.

정말로 얼토당토않은 소리였기에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십니까?’

‘왜냐하면 라이언의 조잡한 그림을 감히 제게 갖다 대는 것 자체가 저에 대한 모욕이니까요.’

진심이었다.

라이언은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양이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관심조차 없었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네스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라이언의 그림은 제 발뒤꿈치조차 따라오지 못해요.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라이언이 다소 더듬거리며 이네스를 불렀다.

“이, 이네스.”

“…….”

이네스는 대답 대신 라이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이언은 간절한 낯빛을 꾸며 내며 이네스를 설득하려 들었다.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

“나, 진심으로 당신과 다시 잘해 보고 싶어.”

“…….”

“더 이상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응?”

침묵하는 이네스를 향해, 라이언이 중언부언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네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경애하는 국왕 폐하,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다만 그 말은 라이언이 아니라, 국왕 에드워드를 향한 말이었다.

에드워드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폐하.”

자리에서 일어난 이네스가 국왕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그 후,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께서는 단순히 화풍이 닮은 것일 뿐, 출품한 그림은 자신이 그린 거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그렇다면 그를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라고?”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 빛났다.

고개를 끄덕인 이네스가 국왕과 에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와 서식스 공작 각하,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 앞에서…….”

그녀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어렸다.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였다.

“저와 브라이어튼 백작이 직접 그림을 그려 보는 것입니다.”

순간 방청객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림을 직접 그린다고요?”

“이 재판정에서요?”

방청객들은 다소 꺼림칙한 기색이었다.

“뭐, 그렇게 한다면야 확실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폐하께서 허락하실까요? 재판정에서 그림을 그린다니, 전례가 없잖아요?”

“사실 그렇게 따지면, 귀부인이 이혼 소송을 거는 것 자체가 무척 희귀한 일 아닌가요?”

한편 라이언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 저 말이 받아들여질 것 같아? 순진하기는.’

애초에 라이언도 저 제안을 아예 상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랭커스터 왕국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국가였고, 가정의 화목함을 중시했다.

‘물론 폐하께서도 내가 여태껏 가정에 소홀했던 것을 질책하실 수는 있어. 하지만…….’

가정을 중시하는 랭커스터의 분위기상, 국왕도 라이언이 가정에 소홀했던 것을 질책하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결혼 자체를 깨는 쪽으로 판결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왕도 왕비와 무척 사이가 좋았다.

국왕이 아직 미혼인 서식스 공작에게, 넌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노래를 부른다는 건 왕국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정도로 화목한 가정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림을 그려 보이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가정을 깨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폐하께서도 분명…….’

그렇게 라이언이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무렵.

경쾌한 대답이 라이언의 상념을 깨뜨렸다.

“좋아, 허락한다.”

뭐?

경악한 라이언이 에드워드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현명한 제안을 내놓았군. 아주 마음에 들어.”

“폐, 폐하!”

놀란 라이언이 다급하게 에드워드를 불렀다.

에드워드가 눈매를 좁히며 라이언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

없었다.

여기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네스의 말이 진실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명령을 내렸다.

“화구들을 마련해 오라.”

그러자 에녹이 에드워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폐하, 화구들은 제가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오, 서식스 공작이?”

놀랍다는 것처럼 에녹을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이내 능글맞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그래, 그랬군. 우리 동생은 무척 현명하기도 하지.”

“…….”

에녹은 얄미워 죽겠다는 것처럼 에드워드를 노려봤으나, 주변의 시선을 감안하여 무어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대신 말을 덧붙였다.

“그림의 화풍을 감정하는 전문가들도 섭외해 두었으니, 필요하시다면 불러들이겠습니다.”

“좋지. 이거, 서식스 공작이 없었더라면 재판에 큰 애로 사항이 있었겠어?”

“…….”

꼭 이런 데에서까지 나를 놀리셔야 하나.

에녹은 뚱한 얼굴로 전문가들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라이언은 얼빠진 얼굴로 제 앞에 놓인 화구들을 마주했다.

‘아니, 정말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거야?’

주제는 정물화.

체크무늬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 위로, 과일이 가득 담겨 있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사색이 된 라이언이 황급히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폐, 폐하!”

“뭔가?”

“저는,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는 건……!”

하지만 라이언은 에드워드를 간절한 시선으로 올려다보기만 할 뿐,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뚱한 시선으로 입술만 달싹이는 라이언을 내려다보았다.

“왜 자꾸 말을 안 하나? 아까 전부터 계속 나를 부르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희미한 짜증이 뒤섞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라이언이 애써 에드워드를 설득하려 했다.

“그, 하오나 폐하. 신성한 재판정에서 어찌 이런…….”

“글쎄, 브라이어튼 백작은 어째서 재판정이 신성하다고 생각하나?”

에드워드가 역으로 되물었다.

라이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예?”

“잘못한 이와 잘못하지 않은 이를 가리며, 신 앞에서 공명정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에 신성한 것 아닌가.”

어찌할 바 모르는 라이언을 향해, 에드워드가 여유롭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불법적인 게 아니라면,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 무엇인들 못 하겠나?”

“폐하, 하오나!”

“일단 앉게.”

에드워드가 턱짓으로 이젤을 가리켰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백작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

그 말에, 라이언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네스는 이미 이젤 앞에 앉아 있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진녹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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