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여기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아무것도 안 돼.’
분명 특유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며 선을 그어 버릴 터.
‘그러면 안 되지. 그건 재미없잖아?’
에녹도 가끔은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형으로서 동생에게 가지는 애정과 염려.
그리고 조금 더 감정이 무르익기를 기다려야만, 에녹을 신나게 놀려 먹을 수 있다는 짓궂음.
거기에 더하여.
‘아직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은 남편이 있는 몸이니까.’
남편이 있는 여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가지는 건 옳지 못하다.
더군다나 에녹을 위해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에드워드는 이쯤해서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만약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패소한다면, 에녹의 감정은 이쯤에서 정리되어야만 해.’
그러니 더 들쑤셔 봤자 하등 에녹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뭐 해? 이제 슬슬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야지.”
그리하여 에드워드는 부러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휙 돌아섰다.
❀ ❀ ❀
한편, 그 시각.
재판정 안으로 들어선 이네스는 달갑지 않은 사람을 마주했다.
“이네스!”
그는 바로 라이언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이언이 이네스에게 다가오려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정말로 네가 나에게 소송을 걸 줄은……!”
마치 비련의 남주인공처럼 애절한 부름이었다.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라이언은 과장된 목소리로 목소리를 높일 따름이었다.
“넌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저 서글픈 하소연만 보면 마치, 이네스가 사랑을 배신한 악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네스는 그저 기가 막혔다.
심지어는 라이언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재판정 안 방청객들은 모두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라이언의 그 열연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
“국왕 폐하, 그리고 서식스 공작께서 드십니다!”
때마침 에드워드와 에녹이 재판정 안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일어나서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추었다.
“국왕 폐하, 그리고 서식스 공작을 뵙습니다.”
“다들 좌정하도록.”
근엄하게 명령을 내린 에드워드가 판사석에 착석했다.
에녹은 공작이자 왕제에 대한 예우로, 에드워드 바로 옆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러던 중.
에녹과 이네스의 눈이 마주쳤다.
‘응?’
이네스는 조금 의아해졌다.
에녹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스치는가 싶더니, 슬쩍 시선을 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저러시지?’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 곤혹스러워 보인다.
동시에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청구한 이혼 소송에 대하여 재판을 시작하겠다.”
순간 이네스의 눈동자에 결기가 어렸다.
먼저 발언권을 얻은 쪽은 이네스 측이었다.
이네스의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라이언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매, 맥도웰 자작이 여기서 왜 나와?!’
맥도웰 자작.
법조계의 고위 직책을 고루 역임했던 법조인으로서,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명변호사 중 하나였다.
그 명성이 하도 높았기에 고액의 수임료는 기본이었고, 그러고도 까다롭게 사건을 살펴서 수임하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네스가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맥도웰 자작을 고용했다는 것은…….
‘이네스, 저게!’
라이언이 아득 이를 갈아붙이며 이네스를 홱 돌아보았다.
‘정말로 나와 싸우자는 거지!!’
그러나 이네스는 ‘뭐가 문제야?’라고 되묻기라도 하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일 따름이었다.
라이언은 머리 꼭대기까지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맥도웰 자작이 코끝에 걸린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의 변호를 맡은 맥도웰입니다. 저는 이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 후, 라이언의 변호사가 주춤추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 브라이어튼 백작의 변호를 맡은 터너입니다. 저는 이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처음부터 이네스 쪽으로 쏠려 있었다.
여태껏 수많은 소송에서 연전연승을 이룬 맥도웰 변호사 앞에서, 라이언이 간신히 고용한 신출내기 변호사는 도무지 기를 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맥도웰 변호사를 고용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이네스는 코끝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금액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왕국 내에서 이혼 소송 자체가 워낙에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변호사들이 이혼 소송을 낯설어하는 게 난관이었다.
다만 이번 미술전의 여파가 상당했고, 왕국 전체의 이목을 모은 커다란 사건을 맡는 건 변호사에게 있어서도 상당한 명예였기에.
몇 날 며칠의 설득 끝에 간신히 고용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게다가 이네스의 승소 확률이 상당히 높았기에, 그 점도 고려했을 터.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미술전 자체가 없었으니, 변호사를 구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했겠지…….’
홀로 고개를 주억이던 이네스는, 힐끔 곁눈질로 라이언 쪽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라이언은 왜 저런 풋내 나는 변호사를 고용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엄연히 라이언이 불리한 상황이었으니, 날고 긴다 하는 변호사를 고용해도 모자랄 판국에…….
‘설마 수임료를 후려쳤나?’
순간 이네스는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라이언의 좀스러운 성격상,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편 이네스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동안.
재판은 계속해서 속행 중이었다.
법적 공방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아까운, 한쪽이 상대방을 압도적으로 눌러 버리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초반부터 이네스 측이 완벽하게 승기를 잡은 것이다.
“여기 두 점의 그림이 있습니다. 모두 서식스 공작 각하의 미술전에 출품된 그림입니다.”
맥도웰 자작은 신들린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한쪽은 화풍도, 채색 방식도, 국내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수채화 기법을 사용한 것까지. 모두 동일합니다.”
국왕은 물론이고, 방청객들까지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림을 바라보았다.
<화방 거리의 아침>, 그리고 <화방 거리의 저녁>.
저 두 점의 그림이 바로, 세간에 어마어마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그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한쪽은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의 이름으로 출품되었고, 다른 쪽은 브라이어튼 백작의 것입니다.”
맥도웰 자작의 설명을 듣자, 방청객들의 눈동자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이렇게 나란히 두고 보니 마치 연작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렇게나 닮을 수가 있나요?”
저들끼리 그렇게 소곤거릴 정도였다.
에드워드 또한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저 두 그림을 마르고 닳도록 본 에녹만이 홀로 차분할 뿐.
‘안 돼, 이러다가 완전히 저쪽으로 분위기가 넘어가겠어!’
참다못한 라이언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바,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힐끔 라이언을 바라본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락하지.”
라이언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네스를 대할 때의 고압적인 태도는 간데없이, 잔뜩 주눅이 든 얼굴이었다.
‘저 망할 변호사, 기껏 수임료는 받아 가 놓고 뭐 하는 거야?!’
라이언은 사납게 변호사를 노려보았다.
제가 처음부터 쥐꼬리만큼의 수임료만 내놓을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고.
그래서 갓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햇병아리 변호사밖에 고용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미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제기랄!’
속으로 욕설을 짓씹어 뱉은 라이언은, 이내 표정을 싹 바꿔 간절한 눈으로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 이네스는 제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뭐?
이네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에녹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이언은 애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솔직히 전…… 이네스와 이렇게 이혼 소송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녀가 제게 이렇게 불만을 가지고 있을 줄도 몰랐고요.”
그건 라이언 당신이 나를 지독하게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애초부터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잖아?
이네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장이라도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라이언이 처량하게 양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워낙에 현숙하고 이해심이 깊은 여자였기에 제 일탈을 대부분 이해해 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라이언의 목소리 끝이 감정에 북받쳐 파르르 떨렸다.
“……그게 제 욕심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서글픈 그 목소리와는 다르게, 라이언은 속으로 꽤 흡족해하고 있었다.
‘좋아, 다들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적어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건 성공한 것 같다.
서러운 척 고개를 푹 숙이며 미소를 억누른 라이언은, 다시 슬픈 표정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