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때마침 마차가 멈추었다.
‘좋아, 가자.’
짧게 심호흡을 한 이네스가 마차 문을 열었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어마어마하네.’
밖으로 발을 디딘 이네스가 가장 먼저 마주한 광경은, 재판정 입구에 구름처럼 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왕국에서도 한참 시끄러웠던 이혼 소송이었으니, 이번 소송에 참석하려는 방청객 수도 상당했고.
그 사이로 각 언론사의 취재진들도 잔뜩 뒤섞여 있었다.
엘튼지의 특종들을 어떻게든 이겨 보기 위해, 뒤늦게 하이에나처럼 달려든 것이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백작부인, 한 번만 이쪽을 봐 주세요!”
그녀를 부르는 취재진의 외침을 듣자, 긴장감으로 목 뒤가 뻣뻣해졌다.
이네스는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을 떨치려, 애써 양어깨에 힘을 주었다.
“오늘 이렇게 재판을 진행하는 소감은 어떠십니까?”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아니, 도저히 저 사이를 뚫고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데?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던 그때.
“오셨군요, 백작부인.”
특유의 우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네스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식스 공작 각하?”
에녹이었다.
이네스는 순간 긴장감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에녹은 느긋한 걸음으로 이네스 곁으로 다가왔다.
빽빽하게 몰려섰던 취재진들이, 에녹이 움직이는 걸음마다 물결처럼 흩어진다.
“이쪽으로.”
에녹이 정중하게 이네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레이디를 대하는 신사의 에스코트였다.
이네스는 홀린 듯이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쥔 에녹은,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다들 좀 비켜 주시죠.”
단순히 말 한마디뿐인데도 강렬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취재진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재판정 직원들이 몰려와 취재진을 물리기 시작했다.
“다들 물러나세요!”
“신성한 재판정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그 틈에 이네스와 에녹은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취재진들과의 거리가 한참 떨어진 후.
재판정 안으로 발을 들이며, 이네스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그러자 에녹은 짓궂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별말씀을. 취재진을 막은 건, 백작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한 겁니다.”
응?
이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녹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엘튼지의 사주로서, 귀중한 특종 제공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그런 건가요?”
“그럼요. 저는 우리 신문의 판매고와 매출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인걸요.”
장난스러운 대답이 울렸다.
그런 에녹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이네스가, 입가를 가리며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풋.”
그러고는 되레 제가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를 비웃으려 한 것은 아니고…….”
“평소라면 왕족 모독죄를 묻겠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농담하시면 저 정말 무서워요. 진심 같잖아요.”
이네스가 슬며시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에녹이 여상하게 되물었다.
“이제야 좀 기운을 차리신 것 같네요. 긴장은 좀 풀리셨습니까?”
아.
이네스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저런 농담을 해 주신 건가.
붉은 입술 위로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다행이군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에녹은, 문득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했다.
‘어째서일까.’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 이유는.
에녹은 의아함에 미간을 좁혔으나, 그 의문에 오래 골몰할 수는 없었다.
왕가의 시종이 에녹에게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서식스 공작 각하! 국왕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형님께서?”
순간 이네스는 보았다.
에녹의 수려한 얼굴 위로,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응?’
하지만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말끔한 얼굴이 된 에녹이 이네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저는 이만 폐하를 뵈러 가야 할 것 같군요. 재판정 안에서 뵙죠.”
“아…… 네, 공작 각하.”
음,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네스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에녹이 자리를 떠나고.
홀로 남은 이네스는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에녹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용기가 샘솟는 느낌이 든다.
‘드디어 라이언과 합법적으로 결혼 생활을 정리할 수 있는 거야.’
이네스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이제 재판 개정 시간까지 단 30분이 남아 있었다.
❀ ❀ ❀
한편, 그 시각.
막 재판정으로 들어서던 국왕, 에드워드가 환한 얼굴로 제 아우를 반겼다.
“에녹!”
“외부에서는 서식스 공작이라고 지칭하셔야 합니다, 국왕 폐하.”
에녹은 깍듯하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핀잔을 주거나 예의를 차리거나 하나만 할 것이지. 저건 도대체 뭐지?
에드워드가 김이 샌 얼굴을 했다.
“국왕 폐하가 뭐냐? 딱딱하게.”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철 좀 드십시오.”
“입으로만 국왕 폐하라고 부르면 다야? 철 좀 들라는 말은 막말이 아니고?”
투덜거리던 에드워드가 문득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에녹의 뒤편을 흘끗거렸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서 있는 이네스에게 향해 있었다.
“오, 저 여인이 ‘그’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인가?”
날씬한 체구와 우아하게 틀어 올린 다갈색 머리카락, 긴 목덜미, 그리고 신록처럼 선명한 진녹색 눈동자까지.
묘하게 사슴을 연상시키는 여인이었다.
허리를 곧게 세운 자세에서는 귀족적인 기품이 느껴졌다.
“이거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인사라도 나눠 볼까?”
“그만두시지요. 백작부인에게 부담이 됩니다.”
에녹이 정색을 했다.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히며 제 동생을 흘겨보았다.
“넌 내가 좋아,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좋아?”
“폐하, 제발 국왕의 체통을 지켜 주시지요.”
하지만 에녹은 완고했다.
“애초에 국왕 폐하께서는 이번 재판의 판사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재판 당사자와 따로 대화를 나누시는 게 얼마나 큰 흠이 될지…….”
“알았어, 알았다고!”
에드워드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어 말을 끊어 냈다.
에녹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신신당부를 했다.
“제발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십시오.”
어휴, 잔소리는…….
돌아가신 조부모님께서도 이렇게까지 나를 들들 볶지는 않았었는데 말이지.
불만스러운 눈으로 에녹을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 그 말,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거 알아?”
순간 에녹이 허를 찔린 얼굴이 되었다.
“그렇잖아. 넌 내 유일한 남동생이자, 왕위계승권자이며, 왕국에서도 단 한 명뿐인 공작위를 가진 사람 아니야?”
“…….”
“그런데 넌 그런 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을 돕고 있어.”
에녹이 애써 항변했다.
“제가 도운 건 맞지만, 그건 모두 정당한 이유가 있는…….”
“정당한 이유라, 그렇겠지. 넌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는 성품이 아니니까.”
그렇게 대꾸한 에드워드가 씩 눈매를 휘며 되물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뿐이야?”
“……그건.”
“넌 지금 네 신분과 지위조차 적극적으로 이용해 가면서 백작부인을 돕고 있잖아.”
언제나 고요했던 짙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리는 시선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던 에드워드가, 이내 못을 박았다.
“지금 너,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니고?”
“…….”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의 천재성에 매혹되었다, 그럴 수 있지. 넌 예전부터 예술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부러 말끝을 늘이던 에드워드는, 짓궂게 에녹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지원하고, 신경 쓰는 건 정말로 처음 봐.”
“……형님.”
순간 에드워드는 내심 놀랐다.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에녹이, 밖에서 그를 ‘형님’이라고 부를 줄이야.
그건 호칭조차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에녹이 당황했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을 특별 대우하고 있다는 점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표정.
“뭐, 그렇다고.”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에녹은 와락 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이네스가 있는 방향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새 재판정으로 들어갔는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야, 이거 대단한데?’
에녹이 누구인가.
아무리 제 동생이라지만, 평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녀석 아닌가.
그런 에녹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꽤 재밌었다.
당장이라도 그런 에녹을 놀리고 싶었지만, 에드워드는 일단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