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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28)화 (28/120)
  • 28화

    참 이상했다.

    이네스의 대답 하나로, 마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으로 헝클어지고야 마는 것은.

    만약 이네스가 라이언을 떠나는 게 싫어졌다거나, 다시 한번 라이언과의 관계를 재고해 보고 싶다면?

    그러자 이네스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것처럼 대꾸했다.

    “그야 이혼이 성사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우니까 그렇죠.”

    “아, 그런 거였습니까?”

    에녹은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동시에 그의 수려한 미간 위로 깊게 주름이 졌다.

    ‘도대체 내가 왜 안도하고 있는 건지.’

    이네스의 이혼이 얼마 남지 않아서 예민해졌다 한들, 다소 과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고 있지 않은가.

    한편 에녹이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던 차.

    이네스는 여태껏 라이언과 떨어져 지냈던 시간들을 되짚어 생각해 보고 있었다.

    라이언이 없는 삶은 지나치게 달콤했었다.

    다시는 그와의 결혼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라이언과 다시 한번 부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요. 도대체가…….”

    몸서리를 치던 이네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공작 각하께서는 왜 그렇게 웃고 계세요?”

    “예?”

    내가 웃었다고?

    화들짝 놀란 에녹이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정말로…… 내가 웃고 있었군.’

    에녹의 입술 끝은 어느 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네스는 에녹에게 더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앗, 저 나무 열매 좀 봐요!”

    이네스가 근처에 울창하게 자라난 침엽수 나무를 가리켰다.

    쌀쌀한 날씨에도 새파란 색을 유지한 침엽수 나뭇가지 아래로, 빨간 열매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너무 귀엽지 않나요?”

    신이 난 이네스가 종종걸음으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요모조모 나무의 풍경을 살펴보는가 싶더니, 바로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민망한 얼굴이 되어 에녹을 돌아본다.

    “그, 스케치만 금방 할 테니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이지요.”

    에녹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얻은 이네스는 즐거운 얼굴로 연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에녹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개화하여, 무언가에 집중하는 인간의 모습은 어찌나 선명하게 빛나는지.

    그리고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잠깐.’

    순간 에녹은 문득 깨달았다.

    여태껏 그를 이렇게까지 흔들어 놓았던 사람은…….

    이네스 외로는 없었다.

    단 한 명도.

    ❀ ❀ ❀

    마침내 재판일이 밝았다.

    “…….”

    이네스는 천장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심장이 두근거려.’

    그녀가 손을 들어 가슴을 꾹 눌렀다.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쳐서, 이네스는 전날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지친다거나 피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충만한 기대감이 그녀의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괜찮아, 오늘 소송만 잘 마무리하면 돼.’

    이네스가 두 눈동자를 빛냈다.

    지난했던 부부 생활도 마침내 오늘로써 끝난다.

    드디어 라이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아니라 ‘이네스 브라이어튼’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이혼 소송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거의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 공작 각하께서 나를 지원해 주셔서 그런 거겠지.’

    에녹을 떠올리자, 이네스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별장에 머무르는 내내, 이네스는 꼬박꼬박 엘튼지를 받아 보았었다.

    엘튼지 특유의 논리 정연한 기사는 볼 때마다 즐거웠다.

    특히 사설 중 하나가 굉장히 재미있었는데.

    <만약 브라이어튼 백작이 백작부인을 자신의 대리로서 그림을 그리도록 해 왔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건 왕국의 귀족으로서도 수치스러운 일일 뿐 아니라, 한 가문의 가장으로서 구성원의 능력을 착취했다는 점에서 더욱 질이 나쁘다.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인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가주 직위를 맡기에는, 그 직위가 현 백작에게 다소 무거운 게 아닌지…….>

    라이언을 교묘하게 ‘능력 없는 남자’로 몰아가서 비웃음을 사게 만든 사설이 일품이었다.

    그 내용을 곱씹으며, 자리에 누운 채 키득거리던 이네스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창문을 활짝 열자, 늦겨울 특유의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방 안으로 훅 밀려들었다.

    새벽녘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이 만물을 적시고 있었다.

    이네스는 고즈넉한 마을 풍경을 한참 시야에 담았다.

    “……예쁘다.”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이언과의 이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아마 이 풍경을 더 이상 바라볼 일은 없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던 이네스가 순간 멈칫했다.

    ‘그렇다면 이제…… 서식스 공작 각하와의 관계도 여기서 마무리되는 걸까.’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와 그녀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은 것뿐이었으니까.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특집 기사를 통해 엘튼지는 나날이 판매 부수가 고공 행진했고, 에녹 또한 이네스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엘튼지의 기사가 계속 나올 때마다, 라이언의 평판은 쓰레기처럼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으니까.

    ‘그 덕에 라이언을 재판정에 세울 수도 있게 된 거야.’

    이네스는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독이려 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기분이 가벼웠었는데.

    에녹과의 관계가 끝난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커다란 돌덩이를 집어삼킨 것처럼 가슴이 묵직해진다.

    “…….”

    창문틀을 붙든 손아귀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됐어, 그만 생각하자.’

    이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정신 차려, 이네스. 지금은 이혼 소송에만 집중해도 모자라잖아.’

    그렇게 몇 번을 되뇌면서도, 이네스는 끝내 창문을 닫지는 못했다.

    찬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커다란 돌덩이를 삼킨 것만 같은 이 답답함이 도무지 해갈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 ❀ ❀

    그 후.

    외출 준비를 끝마친 이네스는, 다소 이른 아침부터 마차에 올라탔다.

    멜던 하우스와 랭던 사이의 거리가 있기에 일찍 출발해야만 했다.

    멀어지는 멜던 하우스를 가만히 시야에 담던 이네스는, 문득 차창에 비치는 제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비록 표정은 다소 긴장되어 보였을지언정, 남들 앞에 서기에 초라해 보이지는 않는다.

    라이언이 입에 달고 살던 ‘수수한 여자’ 타령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옷차림을 한 덕이다.

    ‘좋아.’

    이네스는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 잘할 수 있어. 여태까지 잘해 왔잖아.’

    어떻게 보면, 에녹을 회유하여 그녀의 편으로 만든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에녹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혼 소송을 걸 수 있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도 참관인으로 참석하신다고 하셨었지.’

    처음부터 에녹은, 원한다면 자신이 직접 그녀를 재판정까지 데려다주겠노라고 제안했었다.

    이네스 본인이 거절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네스는 아직 이혼한 몸은 아니었기에, 남들의 시선이 좀 신경 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공작 각하께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되니까.’

    사실 그게 진심이었다.

    그녀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에녹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은 최대한 지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네스가 이 별장에 머무른 것 자체는 괜찮았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서식스 공작께서 발굴하여 지원하기로 약속한 예술가였으니까.

    에녹의 말마따나, 언론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여 별장을 빌려주었다고 하면 사람들도 그럭저럭 납득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와 후원자 이상의 관계로 오해하도록 두어서는 안 돼.’

    이네스와 에녹이 실제로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진실은, 아마 남들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네스가 에녹에게 품은 존경심도, 그녀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되찾을 기회를 준 은인에 대한 고마움도.

    깡그리 무시당할 터.

    그 모든 건 그저 대중의 흥미에 의해 가십거리로 소모되겠지.

    또한 그 오해가 완전무결한 평판의 에녹에게 상당한 흠이 될지도 모른다.

    진녹색 눈동자가 순간 깊게 가라앉았다.

    ‘아마 서식스 공작께서도 그를 아셨기에, 별장에 방문하시는 것을 자제하셨던 거겠지.’

    이네스에게 별장을 빌려준 이래로, 에녹은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그녀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어제만 특별하게 그녀의 얼굴을 보러 왔을 뿐.

    그리고 이네스는 에녹이 왜 그렇게 조심스러워했는지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입장을 바꿔 그녀 자신이었더라도, 에녹 이상으로 현명한 처신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어제는 바쁜 와중에도 직접 들러서 이네스를 위로해 주지 않았나.

    그런데도.

    에녹에게 이미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고,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더 바라는 건 다소 이기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자주 오셨어도 좋았을 텐데.’

    어쩐지, 아주 조금 서운한 것도 같았다.

    순간 파드득 놀란 이네스가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자니, 어느새 랭던 시가지가 지척이었다.

    이네스는 저 멀리 보이는 재판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거리가 상당함에도, 시야에 곧바로 들어올 정도로 재판정의 규모는 상당했다.

    눈부신 아침 햇살 아래로, 새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한 정의의 여신상이 선명하게 빛났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재판이 시작돼.’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혼 소송이 시작되기까지 약 한 달.

    그동안 이네스는 단 한 번도 라이언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라이언 한 명이 인생에서 사라진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평온하게 살 수 있구나.’

    밖으로만 도는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거나 마음 졸일 필요 없이.

    그저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삶.

    아예 몰랐으면 모르되, 라이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던 그 시간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다시는 그 지옥 같던 결혼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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