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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27)화 (27/120)
  • 27화

    ‘이네스, 난 네 하나뿐인 친구잖아. 난 그냥 너와 같은 곳에 있고 싶어서…….’

    그렇게 이네스의 친구 자격으로 중앙 사교계에 진출했고,

    ‘이네스를 찾으시나요? 이네스는 피곤하다고 잠시 쉬러 갔는데.’

    이네스를 빌미로 수많은 귀족 영식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이네스의 남편 되시는 분이죠?’

    그리고 이네스가 라이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라이언의 연인이 되었다.

    교묘하게 이네스를 고립시킨 것이다.

    제 말 한마디 한마디에 휘둘리는 이네스를 구경하는 건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계집애…… 요새 뭔가 좀 달라졌어.’

    샬럿의 두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그 소심하던 이네스가, 서식스 공작의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하여 일을 공론화할 줄은 몰랐다.

    ‘설마 이네스가 나와 라이언의 관계까지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샬럿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몸을 사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샬럿은 라이언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현재 이네스의 남편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네스를 이긴 거야.’

    그 승리감은 퍽 감미로웠다.

    ❀ ❀ ❀

    서식스 타운하우스의 집무실 안.

    종이 위를 펜촉이 긁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우.”

    에녹이 이마를 짚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에녹이 힐끗 시선을 돌려 탁상 달력을 살펴보았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의 이혼 소송일까지 단 하루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괜히 심란한가 보군.’

    소송일이 코앞이어서 그런가, 자꾸만 생각이 백작부인에게로 쏠렸다.

    ‘백작부인도 지금쯤 꽤 마음이 복잡할 텐데.’

    사실 에녹은 이네스에게 별장을 빌려준 이래로, 일부러 이네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괜히 마음만 어수선해졌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별장 쪽으로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을 아예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자꾸만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에게 신경이 쓰이니까.’

    에녹은 미간을 구겼다.

    그녀의 반짝이는 재능에 매료당해서 그런 걸까.

    평소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에녹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이네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엉망이 되고 만다.

    현 상태 자체가 무척 낯선 나머지, 차라리 이네스를 만나지 않으면 괜찮아질까 싶었지만.

    모조리 허사였다.

    그나마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여태껏 몇 번이고 별장으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멈추기는 했었지만.

    ‘어쩐지 얼굴을 보지 않으니까 더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에녹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펜을 움켜쥐었다.

    다시 한번 서류를 내려다보았으나,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씨일 따름이었다.

    “…….”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에녹은,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계속 자리에 앉아 있어 봐야, 더 이상 일에 집중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는 다급한 손길로 의자에 걸어 둔 겉옷부터 챙겨 들었다.

    ‘그래, 이건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야.’

    에녹은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이네스의 별처럼 빛나는 천재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이혼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코앞에 닥친 이혼 소송을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이네스도 최상의 상태로 만전을 기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건 사감 때문에 백작부인을 방문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실은 에녹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이네스의 상태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기에,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모순점을 알아채자, 그의 기분은 더더욱 저조해졌다.

    “…….”

    그럼에도 에녹은 조급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에녹을 발견하고 허리를 조아렸다.

    “어디로 모실까요, 각하?”

    에녹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멜던 하우스로 간다.”

    멜던 하우스.

    이네스에게 빌려준 별장의 이름이었다.

    ❀ ❀ ❀

    이네스는 햇빛이 잘 드는 커다란 창문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진녹색 눈동자가 밖을 유심히 관찰하는가 싶더니, 품 안에 끌어안은 스케치북 위에 바쁘게 연필을 놀린다.

    그렇게 그림에 열중하던 그때.

    “어?”

    무심히 주변의 풍경을 훑던 이네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저 멀리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차의 외양이 어쩐지 익숙하다.

    “공작 각하 아냐?”

    놀란 이네스가 파드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에녹이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이네스가 황급히 일 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서식스 공작 각하!”

    “아,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이네스를 발견한 에녹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웃어 보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공작 각하께서는 잘 지내셨고요?”

    “예. 저도 잘 있었습니다.”

    이네스는 다소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서식스 공작께서 이 별장을 빌려준 이래로 처음 만나는 것 같아.’

    그러던 중.

    이네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뭐지, 이 기분은?’

    최근 이상하게 우울한 바람에, 끼니조차 대충 깨작거리고는 했었는데.

    에녹을 마주하자마자 그 우울함이 사르륵 녹아 사라지는 것 같다.

    ‘역시 공작 각하께서는 대단해.’

    이 감정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는, 라이언에게 인정받고자 했던 예전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각하는 라이언과는 달라.’

    아마 이성적인 애정을 느꼈던 라이언과는 달리, 에녹을 향한 감정은 순수한 존경심이어서 그런 거겠지.

    이네스는 홀로 그렇게 납득했다.

    어쨌든 에녹과 함께 있으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상대방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그녀를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때마침 에녹이 힐끔 이네스의 팔 안을 바라보았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나 보군요.”

    “아, 네.”

    이네스가 민망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워낙 경황이 없던 탓에, 스케치북과 연필까지 모조리 들고 온 것이다.

    에녹이 가볍게 제안했다.

    “잠시 산책이라도 나갈까요?”

    “산책이요?”

    “예. 듣자하니 계속 별장 안에만 계셨다고 들었는데, 답답하실 것 같아서요.”

    “아…….”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다소 머뭇거렸다.

    에녹과 산책하는 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래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저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공작 각하의 평판이…….”

    “일전에 이 근처는 사유지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변은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이네스가 걱정스러워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에녹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전 사실 누군가가 백작부인을 목격한다 한들, 별로 상관없습니다.”

    “네? 하지만…….”

    “백작부인은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죠. 그런데 왜 부인께서 그렇게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전전긍긍하셔야 합니까?”

    “…….”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폐부를 푹 찌르는 질문을 던질 줄이야.

    이네스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에녹은 여상하게 말을 덧붙였다.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 몸을 숨기고, 잘못한 사람이 밖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것. 저는 그 자체가 마음에 안 듭니다.”

    “……그건.”

    “물론 백작부인께서 불편해하시는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에녹은 힘을 주어 말을 맺었다.

    “백작부인께서 좀 더 당당해지셔도 된다는 겁니다.”

    “…….”

    이네스는 멍하니 에녹을 응시했다.

    에녹이 저렇게 단호하게 말해 줄 때마다, 자꾸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올곧고,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타인의 시선 따위에 개의치 않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그 모습 자체가 반짝반짝 빛나서.

    언제나 움츠러들어 있었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

    동시에 에녹이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쯤 설명을 드렸으니, 함께 산책을 나가는 것 정도는 허락해 주시겠죠?”

    “…….”

    잠시 침묵하던 이네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요.”

    그리하여 두 사람은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시골 특유의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메웠다.

    비록 날씨는 아직 차가웠으나, 춥다기보다는 오히려 상쾌한 느낌이었다.

    구두 굽이 얼어붙은 낙엽을 짓밟을 때마다 알싸하면서도 청량한 겨울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에녹이 흘끗 이네스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이혼 소송까지 단 하루가 남았군요. 마음은 좀 어떠십니까?”

    “음…… 잘 모르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기대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그렇게 말을 잇던 이네스가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구름 낀 하늘처럼 흐려져 있었다.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요.”

    “어째서 두려우십니까?”

    순간 에녹이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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