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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26)화 (26/120)
  • 26화

    “네, 네!”

    이네스가 황급히 에녹을 따라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용인들이 정중하게 그들을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녹이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이쪽은 생활을 도와 줄 상주 사용인들입니다. 주방장과 하녀들이지요.”

    “반가워요. 저는 이네스예요.”

    이네스가 인사를 건네자, 사용인들도 다시 고개를 조아려 그에 화답했다.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이들에게 편히 말씀하시면 됩니다. 입이 무거운 이들로 가려 뽑았으니 보안은 걱정 말고요.”

    “감사합니다.”

    그 후, 이네스는 에녹의 안내에 따라 별장 곳곳을 돌아보았다.

    “그 외로는 호위를 좀 남겨 둘 테니, 안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앗, 감사해요.”

    “별장 안의 그 무엇이든 마음대로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감사…….”

    네 번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니 어쩐지 좀 머쓱해졌다.

    무심결에 대답하려던 이네스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 제가 너무 신세를 많이 져서 죄송하네요.”

    “제가 제안한 것이니, 마음 불편해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 이쪽 방은 침실인데…….”

    피식 웃은 에녹이 조곤조곤 별장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소소한 물건 하나하나마다 에녹의 취향이 물씬 느껴졌다.

    그러니까, 별장을 방문한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와, 엄청 고급스럽네!’

    ……되시겠다.

    브라이어튼 백작 가문의 하나뿐인 상속녀로서, 상류층의 고급문화에는 꽤 익숙하다고 자부하는 이네스였으나.

    그런 그녀의 눈에도 이 별장은 흠잡을 데 없이 품위 있어 보였다.

    ‘뭐, 장소에게 기품이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이네스가, 문득 창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곡식이 자라는 너른 평야, 마을 군데군데에 콕콕 박혀 있는 주택들.

    그 모습이 성냥갑으로 만든 집처럼 사랑스러웠다.

    ‘평화롭네.’

    라이언과 샬럿이 사실 불륜 관계였고, 이네스 자신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렇게 과거로 되돌아와, 라이언과 이혼을 위해 소송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멀게만 느껴질 정도로.

    그녀를 둘러싼 주변 풍경은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라이언.’

    어쩔 수 없이 라이언에게로 생각이 흘러갔다.

    이네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동시에 에녹이 그녀를 불렀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린 이네스가 에녹을 돌아보다 말고, 흠칫 어깨를 굳혔다.

    ‘아, 눈 마주쳤다.’

    짙푸른 눈동자가 빤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네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에녹이 두 눈을 가늘게 치떴다.

    “백작부인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대답을 너무 자주 하십니다.”

    “……제가 그랬나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이네스가 조금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에녹이 재차 지적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습니까.”

    “……그건.”

    “말하기 싫다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에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스스로의 생각이나 감정을 두고,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치부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에녹의 눈빛은 어쩐지, 그녀를 무척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자꾸만 심장이 간질거려서.

    “……그렇네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어요.”

    냉큼 대답한 이네스가, 괜히 창밖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달아오른 양 뺨을 에녹에게 들킬 것만 같아서였다.

    “그, 한때는 말이에요.”

    공기 중에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흩어졌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라이언과 함께 와 봤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진녹색 눈동자가 서글픈 빛을 담고 깊이 침잠했다.

    “라이언이 제게 상냥하게 대해 주었으면,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그런 기대를 버리기가 정말 어려웠었는데.”

    ……어째서일까.

    에녹은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항상 이네스는 라이언을 입에 담을 때면 저런 표정을 짓는다.

    발목에 바위를 매달고 바다에 빠지기라도 한 듯한, 막막한 표정.

    그리고 에녹은, 이네스가 라이언을 두고 저런 표정을 짓는 것 자체가.

    ‘불쾌해.’

    동시에 이네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너무 뜬금없는 소리를 했죠?”

    “아뇨, 그럴 수도 있죠.”

    고개를 가로저은 에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

    “다만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네?”

    “백작부인께서 굳이 백작을 떠올리며, 괜히 심력을 소모하는 것 말입니다.”

    ……그걸 왜 서식스 공작께서 불쾌해하시는 거지?

    이네스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에녹의 표정을 살폈다.

    ‘어쩐지 공작 각하께서는 지금, 미묘하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이네스와 에녹은 서로 목표가 일치하는 협력 관계였다.

    물론 에녹이 꽤나 다정하기는 하지만, 그건 이네스가 에녹의 파트너이기 때문에 해 주는 배려일 뿐.

    저렇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일 이유가 없는데…….

    한편 무어라 더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에녹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만 랭던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벌써요?”

    “이미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요. 처리할 일도 좀 있고요.”

    그러자 이네스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공작 각하께서는 바쁜 분이시니 얼른 돌아가셔야죠. 여러모로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저렇게 순순히 알겠다고, 얼른 돌아가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게 거슬린다.

    그렇다고 제가 왜 거슬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에녹은 성마른 걸음걸이로 별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네스 또한 에녹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왔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백작부인께서도 피곤하실 텐데, 푹 쉬시기를.”

    그렇게 이네스와 인사를 나누고도,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녹은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차에 올랐다.

    “서식스의 타운하우스로.”

    “예, 공작 각하.”

    마차가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에녹은 천천히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난 어째서 그렇게 짜증이 났을까?’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백작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릴 때마다.

    누군가가 가슴 속에 불을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속이 뜨거워진다.

    또한 자신이 랭던으로 돌아가겠노라 말했을 때에도.

    ‘하긴, 공작 각하께서는 바쁜 분이시니 얼른 돌아가셔야죠. 여러모로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식적이며 예의 바른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거슬려 하는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백작부인에게 도대체 무슨 대답을 듣기를 바랐던 거였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에녹이 순간 멈칫했다.

    ‘설마 난, 백작부인과 조금 더 길게 시간을 보내기를 바랐던 건가?’

    에녹의 미간이 와락 구겨지는 것도 잠시.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백작부인의 이혼소송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 자신도 너무 예민해진 탓이리라.

    그렇게 온갖 생각에 잠겨 있는 탓에, 에녹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네스가 다시 별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 ❀ ❀

    그 시각.

    라이언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샬럿, 어떡하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던 라이언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곁에 앉은 샬럿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네스가 날 떠나려 들까?”

    “그럴 리가!”

    샬럿이 황급히 라이언의 머리를 꼭 끌어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이네스는 당신 없음 죽고 못 살잖아.”

    “그, 그렇지?”

    “그럼. 이번 일도 다 지나갈 거야, 걱정 마.”

    라이언이 샬럿의 품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샬럿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라이언을 얼렀다.

    “그 계집애가 나빴네, 우리 라이언을 이렇게나 고생시키고.”

    하지만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내뱉는 것과는 달리, 샬럿은 이네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망할 계집애.’

    샬럿이 아드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샬럿에게 있어 이네스는 언제나 질투의 대상이었다.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의 하나뿐인 상속녀.

    사슴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는 외모와, 쓰고 또 써도 줄지 않는 막대한 재산.

    그리고 모두에게 사랑받던 그 상냥한 성품까지.

    그 어느 장소에 가든지 이네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았다.

    그에 반해, 샬럿 자신은 화려한 외모 외로는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지 않은가.

    ‘정말 짜증나.’

    중앙 사교계에는 애초부터 진출할 수 없었던 한미한 남작 가문.

    그 가문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여웠다.

    ‘나와 이네스가 도대체 뭐가 다른데?’

    그 강렬한 열등감.

    ‘고작해야 출신 가문 하나만이 다를 뿐인데, 이렇게나 처지가 달라질 줄이야!’

    그래서 샬럿은 이네스의 단 하나뿐인 친구라는 위치를 최대한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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