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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25)화 (25/120)
  • 25화

    동시에 에녹이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고트 자작 대부인의 일을 기사화한다면, 백작부인께서는 불쾌하시겠습니까?”

    “네?”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여유로웠던 에녹은 드물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공작 각하, 어쩐지 기분이 무척 안 좋아 보이시는데…….’

    어째서 그런 거지?

    이네스는 살그머니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에녹이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고트 자작 대부인은 강제로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을 만나려 하고, 협박과 모욕을 일삼았잖습니까.”

    “그, 그렇기는 하지만.”

    “적어도 전, 고트 자작 대부인이 이번에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무섭도록 굳어진 에녹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지금 화를 내고 계신 건가?

    ……나를 위해?

    동시에 에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제가 아닌 백작부인이시니, 제가 멋대로 일을 진행해서는 안 되지요.”

    “그, 공작 각하.”

    “다만 이번 일을 엘튼지에서 소상히 다룬다면, 분명 백작부인의 이혼에도 큰 도움이…….”

    “할게요.”

    이네스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수많은 설명을 준비하던 에녹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사실 뭐, 이혼하면 이제 시어머니도 아닌데요.”

    어깨를 으쓱여 보인 이네스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혼을 위해서라면 이쯤 못 하겠어요?”

    “…….”

    에녹은 그런 이네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저렇게 날 빤히 바라보시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괜히 뺨을 매만져 보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에녹을 불렀다.

    “그, 공작 각하?”

    “……아, 예. 그렇군요.”

    대충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더 이상 해밀턴 호텔에 머물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네, 다른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네스는 다소 어두운 낯이었다.

    나름대로 보안이 철통같다는 해밀턴 호텔마저 이렇게 취재진이 진을 칠 정도라면…….

    ‘내가 머물 수 있는 곳이 너무 적어.’

    브라이어튼 백작가 소유의 별장들은 몇 있었으나, 문제는 그 별장들은 수도 랭던과 너무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조금 있으면 이혼 소송이 시작될 테니, 랭던과 너무 먼 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취재진을 피해 랭던을 떠나 있더라도, 랭던과 30분 이상 떨어진 지역이면 좀 곤란한데.’

    이네스가 그렇게 골머리를 앓던 중.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 별장은 어떻습니까?”

    “네?”

    뜻밖의 제안에, 이네스가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에녹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랭던 근교에 제 소유의 별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런가요?”

    “예. 취재진도 설마 왕족의 별장까지 따라붙지는 않을 테고, 소송을 진행할 시 법원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하지요.”

    설마 나에게 각하의 별장을 빌려주시겠다고?

    이네스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는 당분간 랭던의 타운하우스에 머무를 예정이니, 백작부인께서 원하시는 만큼 편히 계셔도 상관없습니다.”

    에녹은 뭐가 그렇게 문제냐는 양,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미 취재진들에 의해 몇 번이나 곤혹을 치르셨으니, 백작부인이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국민들도 이견이 없을 테고요.”

    “하,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혼자 계셔도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조치를 해 둘 테니까요.”

    잠시 멍해졌던 이네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저는 좋아요. 저는 정말 좋고, 감사한데…… 각하께서는 정말로 괜찮으세요?”

    “무엇이 말입니까?”

    “제게 너무 많은 것을 베푸시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이네스가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미 충분히 도움을 주셨어요, 저 때문에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그런데 그때, 엄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녹이 단호한 눈동자로 이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백작부인께서 여태껏 절 어떤 사람으로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다소 귀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제가 책임지기로 결심한 일까지 내팽개칠 정도로 신의 없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냥.”

    “또한 당신은 제가 선택한, ‘서식스의 예술가’가 아닙니까?”

    서식스의 예술가.

    그 단어가 유난히도 귀에 박혀 들었다.

    “그러니 제가 백작부인을 지키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건…… 공작 각하께서 제 그림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셔서 그런 건가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에녹이 말을 덧붙였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고, 제가 그 사람을 도울 능력이 있는데도 모르는 체 넘어가는 건.”

    “…….”

    “역시 제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죠.”

    어느새 에녹의 아름다운 입술 위로는 가벼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자신의 도움은 별것도 아닌 일이며, 전혀 대단하지 않다는 것처럼.

    ‘공작 각하의 지지가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도 모르고…….’

    감사함이 목 끝까지 치받아서, 이네스는 조금 울컥했다.

    “그렇다면 신세를 좀 질게요. 감사합니다.”

    “신세가 아니죠.”

    정색을 한 에녹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애초에 그러기로 한 거래 아닙니까?”

    “……각하.”

    “저는 이미 엘튼지에 백작부인의 일을 특집 기사로 실었고, 엘튼지의 판매 부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사업가의 얼굴로 되돌아온 에녹이 뿌듯한 어조로 설명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기존 독자층인 귀족들뿐 아니라, 평민들의 구매율이 한껏 올라갔다는 점이 고무적이지요.”

    “그, 그랬나요?”

    “예. 그 말은즉, 전 합당한 대가를 이미 받았다는 소리입니다.”

    에녹이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백작부인께서도 충분히, 부인께서 만족하실 만큼 제게서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 받아야 할 대가를 받는 거라고 생각하십시오.”

    그 대답을 들은 이네스는,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에녹은 ‘애초에 그러기로 한 거래’라며,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 말 자체가 에녹이 이네스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에녹은 이미 이네스에게 치러야 할 대가를 모조리 다 치렀으니까.

    에녹은 엘튼지에 기사를 실음으로써 ‘이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 주기로 약속했었고, 그 약속은 철저히 지켜졌다.

    그럼에도 에녹은 지금 이네스를 보호해 주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는 자신이 베푼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그 어떠한 대가나 감사의 말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다.

    라이언과는 다르게.

    “……그래도요.”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이네스는, 결국 그렇게만 운을 띄웠다.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살포시 미소 짓는다.

    “저, 각하께 항상 감사해요.”

    그리고 그 미소를 보는 순간.

    “…….”

    에녹은 심장 깊은 곳이 간지러워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동시에 이네스가 활기차게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그렇다면 일이 이렇게 된 거, 얼른 자리를 옮길까요?”

    “……그럽시다.”

    황급히 이네스를 따라나서며, 에녹은 괜히 제 옷깃을 매만지며 정돈하는 척했다.

    이상하게 이네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방금 전 그 감각은 뭐였을까?’

    어쩐지 이네스가 제 앞에 있으면, 평소보다 제 행동이 다소 부자연스러워지는 것 같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에녹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 ❀ ❀

    이네스와 에녹이 탄 마차는 랭던 시내를 벗어나 한참을 경쾌하게 달렸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랭던 근교의 호젓한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은 아주 작아서, 가구 수가 채 열 가구도 되지 않는 듯했다.

    이네스는 내심 마을에서 멈춰 서려나 추측했었는데,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여 마을 너머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향했다.

    그 위로는 빨간 지붕과 하얗게 칠한 벽을 가진 예쁘장한 이 층 주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와, 정말 예쁜 곳이네요.”

    마차에서 내려선 이네스가 이마 위로 손 그늘을 만들며 감탄했다.

    “인형 놀이 세트 같아요.”

    화창하게 내리쬐는 햇빛, 새파란 하늘.

    햇빛을 머금어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그림처럼 예쁜 집과, 언덕 아래로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까지.

    에녹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마음에 들다 뿐이겠어요?”

    이네스가 휙 에녹을 돌아보았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주변 풍경이 너무 예뻐요. 당장이라도 그려 보고 싶을 정도예요!”

    “……그 정도입니까?”

    “그럼요!”

    이네스는 보란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에녹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다면 제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판단을 내린 듯하군요.”

    뜻밖의 말에, 주먹을 움켜쥔 채 이네스가 멈칫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니요?”

    “예.”

    에녹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별장에 기본적인 그림 도구를 갖춰 두었거든요. 머무시는 동안 지루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세상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이네스를 향해, 에녹이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별장을 가리켰다.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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