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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24)화 (24/120)
  • 24화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어머님과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네스?”

    “정말로 화를 내기 전에 이만 돌아가도록 하세요.”

    이네스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네스를 바라보던 자작 대부인은, 이내 흉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사람이 기껏 좋게 좋게 말해 주려 하니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네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야말로 여태까지의 인연을 봐서, 좋게 좋게 말씀드리려 했는데.”

    “뭐야?!”

    그러나 이네스는 자작 대부인에게는 전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슬쩍 시선을 반쯤 열린 문밖으로 고정시켰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그렇게 이네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브라이어튼 백작 부인, 호텔 가드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네. 문은 열려 있으니 들어오세요.”

    이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고트 자작 대부인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이네스와 호텔 가드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 누구야, 이 사람들?”

    “누구긴요. 해밀턴 호텔의 가드들이죠.”

    이네스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에녹이 굳이 이네스를 해밀턴 호텔에 머무르게 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객실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5분 이내로 호텔 가드들이 출동하는 것이 규약에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이네스는 냉정한 얼굴로 입술을 떼어 냈다.

    “어머님을 정중히 밖으로 모셔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호텔 가드들이 고트 자작 대부인에게 다가갔다.

    그저 거리만 좁히는 것이었는데도, 덩치가 커다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압박감이 상당했다.

    자작 대부인이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나, 날 강제로 내보낸다고?”

    “네, 그러려고요.”

    “나는 네 시어머니고 웃어른이야! 어떻게 이런 심한 짓을!”

    “글쎄요. 먼저 제가 머무르는 호텔에 쳐들어와, 이런저런 무례한 말씀을 하신 쪽은 어머님이신걸요.”

    해사하게 눈매를 휘어 보인 이네스가 이내 호텔 가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 일은 해밀턴 호텔에 정식으로 항의를 할 생각이에요.”

    “아…….”

    그 날선 목소리에, 가드들이 다소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취재진이든, 제 친지라 주장하는 자이든. 누구를 불문하고, 저를 찾아온 사람들은 모조리 막아 달라고 요청했을 텐데요.”

    “그, 죄송합니다. 하지만 자작 대부인께서 워낙 확고하게 가족이라고 주장하셔서…….”

    “변명은 필요 없으니, 당장 모셔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이네스는 더 말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물러났다.

    호텔 가드들이 황급히 자작 대부인에게 말을 붙였다.

    “가시죠, 자작 대부인.”

    “나, 나는 귀족이야! 저 애의 시어머니라고! 이렇게 사람을 끌고 갈 수는 없어!”

    고트 자작 대부인은 몇 번 뻗대 보려 했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자꾸 이러시면 치안대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호텔 가드들이 최후통첩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익!”

    고트 자작 대부인은 눈알이 빠지도록 이네스를 노려봤으나, 이네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사하게 웃으며 되물을 뿐.

    “안 가세요?”

    그렇게 일련의 소동이 끝나고.

    스위트룸에 혼자 남은 이네스가 이마를 짚었다.

    “후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독하게 피곤했다.

    ‘괜찮아. 이혼만 끝나면…….’

    이네스는 애써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 ❀ ❀

    한편, 에드워드와의 대담을 끝낸 후.

    에녹은 해밀턴 호텔을 찾았다.

    ‘형님께서는 도대체 왜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하셔 가지고…….’

    입 안으로 투덜거리기는 했으나, 이러나저러나 이네스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에녹이 미간을 좁혔다.

    창문 너머로, 호텔 입구부터 구름처럼 진을 치고 있는 취재진들이 보였다.

    “돌아가십시오! 취재는 거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희 호텔은 투숙객의 프라이버시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호텔 직원들은 우중우중 몰려선 취재진들을 물리느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그, 있잖아요.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이 호텔에 묵고 있다던데.”

    개중 몇몇 투숙객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취재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도 꽤 피곤하겠는데…….’

    그러던 중.

    에녹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 멀리, 호텔 입구에서부터 가드들에게 둘러싸여 걸어 나오는 중년의 귀부인 한 명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사실 그뿐이라면 에녹이 별달리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겠으나.

    “두고 보자, 이네스! 네가 날 이렇게 박대하고도 괜찮을 것 같아?!”

    귀부인의 고함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주변을 울릴 정도였다.

    이네스.

    에녹은 귓속에 내리꽂히는 익숙한 이름에 주목했다.

    이네스의 이름을 친밀하게 부르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네스와 관련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어쩜 이럴 수가 있는지, 두고 봐!”

    귀부인은 잔뜩 신경질을 내며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녹이 명령을 내렸다.

    “마차를 멈추게.”

    길가에 부드럽게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려선 에녹이 귀부인이 탄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일단 저 여인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 보긴 해야겠는데.’

    그보다는 호텔 입구를 막은 취재진들이 영 거슬렸다.

    여기서 에녹이 등장한다면, 순식간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거 안 되겠군.’

    에녹은 혀를 차며 호텔 뒷문으로 돌아갔다.

    몇몇 귀빈들이 은밀하게 움직일 때 사용하는 장소였다.

    다행히도 이 문까지 취재진들이 발견하지는 못한 듯했다.

    이네스의 방에 도달한 에녹이 똑똑 노크를 했다.

    “접니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

    에녹이 그렇게 말한 후에야, 달칵 방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이네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안도했다는 양 활짝 웃어 보인다.

    “오셨어요?”

    “예. 잘 계셨습니까?”

    “으음. 네, 뭐.”

    이네스가 괜히 눈동자를 굴리며 에녹의 시선을 피했다.

    동시에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한 귀부인이, 백작부인의 이름을 고래고래 부르면서 나오던데요.”

    “…….”

    아, 다 보셨구나.

    창피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네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그, 그분은…… 저희 시어머니예요. 고트 자작 대부인이요.”

    “아하, 그렇군요.”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인 에녹이, 금세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래서 자작 대부인께서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그것이.”

    얼굴이 화끈거리는 감각에, 이네스는 괜히 손 부채질을 하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에녹은 사양하지 않고 스위트룸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에녹을 제 앞에 앉혀 두고도, 이네스는 한참을 망설였다.

    ‘뭔가 내 치부를 드러내는 기분이야.’

    물론 여태까지 겪어 왔던 에녹의 성격상, 그녀를 비웃거나 조롱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나도 공작 각하께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은데.’

    이네스는 무릎 위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현재 이네스에게 있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그 사람은 단연 에녹이었다.

    그녀의 삶을 뒤바꿀 기회를 준 사람.

    그런 그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어머님께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호텔로 밀고 들어올 줄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고뇌하는 이네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말씀하기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 그래도.”

    “백작부인께서 불편해하시는 게 훤히 보이는데, 굳이 캐내고 싶지는 않거든요.”

    에녹은 정말로 괜찮다는 얼굴이었다.

    이네스는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는…… 내 편이 되어 주셔.’

    모두가 흥밋거리로 이네스의 일을 소비하려 들 때, 그녀를 유일하게 지지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무언가를 더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수치스러울 일일지언정, 비밀을 만드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아니에요, 말씀드릴게요.”

    마음을 정한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고트 자작 대부인께서 이번 일에 대해 항의하러 찾아오셨는데…….”

    처음에는 말문을 열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막상 말하기 시작하니 이처럼 말이 술술 나올 수도 없었다.

    어쩐지 하소연 같기도 하고, 고자질 같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그리고 그 긴 이야기 동안, 에녹은 이네스의 말에 단 한 번도 토를 달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네스의 말에 묵묵히 귀를 기울일 뿐.

    아마 라이언이었더라면…….

    ‘아무리 그래도 내 어머니는 너보다 어른이잖아? 그러니 네가 좀 더 숙이고 들어갔어야 하는 거 아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머니도 그만큼 잘 모셔야지!’

    ……아마 구구절절 선생질을 하려 들지 않았을까.

    이네스는 어쩐지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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