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저 사람,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아니에요?”
“저도 엘튼지에서 봤어요. 그, 이번에 서식스 공작 각하의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한…….”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고 했으나, 무어라 말하는지는 다 들렸다.
고트 자작 대부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뭐 하니, 이네스?”
“어머님.”
“어른이 직접 찾아왔는데 냉큼 안으로 맞아들이지 않고.”
이네스의 방어적인 태도에도 자작 대부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네스의 허락 없이도 방 안으로 성큼 발걸음을 들이고는, 주변을 커다랗게 휘둘러본다.
거실과 응접실, 그리고 침실이 분리되어 있는 스위트룸.
벽지며 침구, 자그마한 생필품 하나까지 모조리 고급스러웠다.
‘서식스 공작의 자존심이 있지, 제가 선택한 예술가가 불편하게 생활하는 걸 눈 뜨고 보고 있으란 말입니까?’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며 에녹이 직접 잡아 준 방이었다.
방 안을 뜯어보듯 관찰하던 자작 대부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너, 정말 팔자 좋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이네스를 매도한다.
“네가 그렇게 집을 나가고 나서, 네 남편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는데 말이야.”
“…….”
그럴 리가.
이네스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마 지금쯤 샬럿을 끌어안고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지 않을까.
감히 남편에게 대들었다며, 침대 안 안줏거리로 이네스를 잘근잘근 씹어 대면서 말이다.
냉소적으로 생각하던 이네스가 자작 대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그게 지금 나한테 물을 말이야?!”
고트 자작 대부인이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찾아오느라 고생하셨다는 안부의 말은 쏙 빼놓고! 넌 어쩜 애가 그렇게 이기적이니?”
“어머님.”
“말마따나, 내가 오면 안 될 곳을 온 것도 아니고.”
자작 대부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네스를 마주 보았다.
“내가 내 며느리를 찾아오는 게 뭐가 어때서?”
“어머님, 어머님께서도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저는 이제 라이언과 이혼할 생각…….”
“이혼? 이혼이라고?!”
고트 자작 대부인은 기가 막힌다는 것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네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잔뜩 흥분한 자작 대부인과 달리, 이네스는 여전히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더 이상 라이언과 부부로 살고 싶지 않아요.”
“하, 어이가 없어서! 뭐? 부부로 살고 싶지 않아?”
자작 대부인이 미간을 좁히며 이네스에게로 다가섰다.
길게 뻗은 검지가 이네스의 이마를 쿡쿡 찔러 댄다.
“네 주제를 알아야지, 고아인 데다가 자식조차 낳지 못한 계집이!”
“…….”
“어딜 감히 내 귀한 아들을 내쫓으려고 들어?!”
고트 자작 대부인은 보란 듯이 두 눈을 부라려 보였다.
“네가 이딴 식으로 행동하는 게, 브라이어튼 백작가에게는 좋을 것 같아?”
순간 이네스의 눈동자에 새파랗게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고트 자작 대부인은 이네스의 분노 따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호통을 치며 어른 행세를 하는 것에 워낙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땅에 구르는 꼴을 보고 싶어?”
그렇게 쏘아붙이며, 고트 자작 대부인이 흡족하게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좋아, 이쯤 말했으면 말귀를 잘 알아들었겠지?’
그런 판단이 들어서였다.
사실 자작 대부인의 판단은 그리 틀리지만은 않았다.
예전의 이네스였다면 분명 이쯤 압박하면 순순히 고개를 숙였을 테니까.
그러나.
탁!
이네스는 손을 뻗어, 다시 한번 제 이마에 손을 대려는 자작 대부인의 손목을 와락 움켜쥐었다.
자작 대부인이 경악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사람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귀족의 품위에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지요.”
지, 지금 저 계집애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고트 자작 대부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네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명예에 대해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만, 어머님.”
이네스가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를 마주하며, 고트 자작 대부인은 어째서인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머님께서는 다소 주제넘은 걱정을 하고 계시네요.”
“주제넘었다고?!”
“그럼요. 애초부터 라이언이 브라이어튼 백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저와의 결혼 덕택이잖아요?”
“뭐야!”
고트 자작 대부인이 꽥 고함을 질렀으나, 이네스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 말은 즉, 이혼이 성립되는 그 순간부터.”
“이네스, 너 지금 뭐라고……!”
“라이언은 더 이상 브라이어튼 백작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마치 ‘오늘은 점심 식사로 스테이크를 먹을 생각이에요’라고 말하듯, 그저 일상적인 어조로.
이네스는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 말은 즉, 어머님께서는 백작가에 있어 외부자이시니.”
“아니, 그, 예의조차 모르고, 너는, 이게……!”
“어머님께서 굳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랍니다.”
놀란 자작 대부인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저 붕어처럼 입술만을 뻐끔거릴 뿐.
그러거나 말거나, 이네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또한 제가 아이를 낳지 못한 이유가 제 탓인지, 라이언의 탓인지는 조금 따져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무, 뭐? 그럼 내 아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양, 이네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뺨을 감싸며 들으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쉰다.
“저뿐 아니라 샬럿과도 수없는 밤을 보낸 것으로 아는데, 샬럿도 아직 아이를 갖지 못했거든요.”
“세, 세상에, 지금 망측하게 무슨 소리를!”
“아마 저보다도 샬럿과 훨씬 많이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이네스는 얄밉게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직도 두 여자 중 단 한 쪽도 임신시키지 못한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생식 능력에 있어서는 저보다는 라이언의 문제가 더 큰 것이 아닌지…….”
“야!!”
순간 참지 못하고, 자작 대부인이 다시 한번 와락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네스는 그에 놀라거나 위축되기는커녕,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야, 라니요, 어머님. 그런 상스러운 호칭은 귀족의 품위에 어긋나요.”
“어딜 어른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고 그러니!”
“그러고 보니, 이번에 서식스 공작 각하의 전시회장에서도 라이언이 무척 상스러운 언행을 보였었는데. 관람객들 반응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
“그만하지 못해?!”
자작 대부인이 발작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이네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일단 입을 다물었다.
고트 자작 대부인이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저 계집애가 언제부터 저렇게 어른에게 대들게 되었지?’
이래도 네, 저래도 네, 하며 순종적으로 행동하던 이네스는 간데없었다.
오히려 웃는 낯으로 사람의 속을 박박 긁어 놓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참자. 참아야만 해.’
고트 자작 대부인은 짧게 심호흡을 했다.제 아들들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어머니, 우리 가문이 브라이어튼 백작 가문에게서 얼마나 이득을 보고 있는지 아시지요? 절대로 이혼이 성립되도록 둬서는 안 됩니다.’
현 고트 자작인 첫째 아들의 절박한 말과,
‘이네스랑 이혼하면 제게 남는 게 없다고요! 제가 브라이어튼 백작이어야 장차 우리 가문에게도 더 도움이 될 것 아닙니까?’
둘째 아들 라이언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애원까지.
‘그래, 내가 우리 아들들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자작 대부인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네스, 네가 어려서 잘 모르는 거란다.”
……이건 또 뭐지.
이네스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고트 자작 대부인을 마주 보았다.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니, 이제는 회유 쪽으로 넘어가려나 보다.
“물론 네 입장에서야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 내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니, 네가 얼마나 속상했겠니?”
“…….”
이네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고트 자작 대부인은 은근슬쩍 라이언의 불륜만을 문제 삼고 있지 않은가.
현재 가장 뜨거운 쟁점인 ‘이네스의 화가로서의 명성을 빼앗았다는 것’은, 자작 대부인에게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남자들이란 다 그래. 밖으로 좀 나돌아도 언젠가는 부인인 네게로 돌아올 거야.”
“…….”
“내가 라이언을 잘 타일러 보마. 그러니까 너도 마음을 좀 풀고, 응?”
자신을 달래는 고트 자작 대부인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희미한 서글픔을 느꼈다.
예전에는 자작 대부인이 부부 관계에 참견하는 것 자체가, 어머니의 정이라고 생각했었다.
채 성년조차 되지 못했을 적 부모를 잃었기에, 부모의 정에 굶주려 있었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