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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22)화 (22/120)
  • 22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슬슬 결혼 적령기도 지날 나이인데.’

    에드워드는 불만스럽게 에녹을 흘겨보다 입을 열었다.

    “여자 보기를 돌처럼 하던 네가, 엘튼지까지 동원해서 일을 이렇게나 키울 줄은 몰랐는데.”

    “그야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에드워드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저 매사에 무덤덤한 녀석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백작부인이 그렇게나 특별해?”

    “예.”

    에녹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천재입니다.”

    “아니…….”

    에드워드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에녹,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고?”

    “그렇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에녹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녀는 장차 왕국의 예술계를 뒤흔들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흠,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라. 아마 이름이 이네스였었지?”

    에드워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네스 브라이어튼.

    브라이어튼 백작 가문은 예로부터 랭커스터 왕국에서도 명문가로 손꼽히는 가문이었다.

    부와 명예, 그리고 왕실과 비견되는 오래된 역사까지.

    모든 것을 거머쥔 가문이라고나 할까.

    그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이자, 한때 왕국 최고의 신붓감이라 일컬어지던 이네스.

    에드워드는 그녀가 사교계에 데뷔하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긴 다갈색 머리카락을 굵게 땋아 내려 생화로 장식하고,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어리고 아리따운 소녀.

    얼핏 요정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 후 이네스는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고,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남편을 얻어서 잘 사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 차분하던 소녀가 이런 사달을 일으킬 정도면, 아마 남편과의 관계도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턱을 괴며 고민하는 것 같던 에드워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전시회에 관람을 가야겠는데.”

    “예? 형님께서요?”

    에녹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에드워드가 뚱하니 제 아우를 마주 보았다.

    “왜, 가면 안 되나? 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예술가라니, 한 번쯤 직접 만나 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만두십시오.”

    에녹이 정색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백작부인은 이리저리 시달리고 있습니다. 괜히 형님까지 나서서 부담을 줄 필요는…….”

    “에녹, 그 반응은 도대체 뭐야?”

    순간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에녹은 흠칫 어깨를 굳혔다.

    에드워드가 저렇게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할 때마다, 일이 좋게 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 아까 전부터 백작부인을 되게 싸고도는 거 알고 있어?”

    “……착각이십니다.”

    “에이, 착각일 리가. 우리가 형제로 살아온 시간이 얼만데?”

    에드워드가 짓궂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백작부인이 신경 쓰이는 거야? 야, 이거 점점 궁금해지는데?”

    “…….”

    에드워드의 미소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에녹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에드워드가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은 현재 어디에 머물고 있지? 이 난리가 났는데, 브라이어튼의 타운하우스에 그대로 있지는 않을 테고.”

    “그건 국왕으로서 내리시는 명령입니까?”

    “뭐, 그렇다면?”

    “그래도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이 녀석이 정말?”

    그렇게 장난스럽게 두 눈을 부라리던 것도 잠시.

    에드워드는 여상하게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뭐, 이혼 소송을 진행한다면 재판정에서라도 백작부인을 보게 될 테니까.”

    이혼.

    그 단어에 에녹이 멈칫했다.

    이네스가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의 자리에서 벗어나, 백작 작위를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

    그리고 그녀가 결혼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혼자 몸으로 돌아온다면…….

    “…….”

    어쩐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왜 이네스만 생각하면 묘하게 초조해지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에녹은 애써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제 형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래서 형님께서는 이번 이혼 재판에 어떤 판결을 내리실 겁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에녹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얄밉게 양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제대로 자료들을 살펴본 후, 그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판결을 내릴 거야. 그런데 그건 왜 궁금해하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야,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에녹에게는 정말 번거롭게도, 에드워드는 제 동생을 놀릴 기회를 놓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에녹은 에드워드의 장난에 한참을 시달려야만 했다.

    ❀ ❀ ❀

    그 시각, 해밀턴 호텔의 꼭대기 층.

    이네스는 커튼을 걷고 창문 밖을 살그머니 내다보았다.

    수많은 취재진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이럴 수가.’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커튼을 다시 친 이네스가 그 자리에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이슈가 된 건 좋아. 좋은데…….’

    뭐, 소기의 목적 자체는 달성하긴 했다.

    처음부터 이혼하기 위해 이슈화를 하려고 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하기 어렵잖아!’

    이네스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전시회가 개최된 첫날 이후.

    이네스는 곧바로 이혼소장을 접수했다.

    그리고 언론사들은 그녀가 이혼소장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르르 몰려와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타운하우스 앞에서 진을 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이네스는 타운하우스를 떠나 해밀턴 호텔에서 머무르기 시작했다.

    물론 라이언이야 언론사에게 시달리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뭐, 언론사에서 몇 번 라이언에게 접촉하긴 한 것 같지만.’

    라이언은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나, 엘튼지에 비하면 다른 평범한 신문들은 그 존재감부터가 달랐다.

    이번 미술전의 일과 맞물려, 사람들의 여론은 대체로 이네스 쪽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였다.

    다만 문제는.

    ‘다른 언론사들이 상당히 집요하다는 거야.’

    타운하우스를 떠나면 그쯤에서 정리될 줄 알았는데.

    언론사들은 현재 이네스를 득달같이 쫓아와, 호텔 앞에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 미리 호텔 영업 방해에 대한 보상을 진행해 주셨기에 망정이지…….’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에녹은 호텔에 양해를 구하고 보상금을 선지급했었다.

    이네스도 에녹과 함께 보상 절차를 진행했고 말이다.

    그때를 떠올리니, 이네스는 자연스럽게 에녹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 각하께서는 어떻게 이 수많은 취재진들을 감당하셨을까?’

    이네스는 새삼 에녹이 존경스러워졌다.

    왕국 최고의 유명인으로서, 당연하다는 듯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다니지 않는가.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애초에 브라이어튼 타운하우스에서도 라이언을 내쫓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귀족들이 뒤에서 나에 대해 얼마나 떠들어 댈지 몰라.’

    이네스는 와락 미간을 구겼다.

    이혼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굳이 구설수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는 철저히 피해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편이 유리할 터.

    ‘그래도.’

    이네스는 가만히 두 눈을 내리깔았다.

    ‘공작 각하였더라면 뭔가 다른 식으로 대처하셨을까?’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기품 있는 남자.

    에녹은 이네스와는 아예 태어나기부터 다른 종류의 사람인 것 같았다.

    저 홀로 반짝반짝 빛나서,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그런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네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구지?’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경계심이 서렸다.

    애초에 에녹은 직접 이 호텔을 잡아 주면서, 웬만한 사람들은 출입을 엄금해 두었다.

    그래서 취재진들조차 호텔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고, 호텔 밖에서만 머무르고 있을 정도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동시에 카랑카랑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이네스를 불렀다.

    “나다, 이네스!”

    아.

    순간 이네스가 얼어붙었다.

    저 목소리, 귀에 익었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저 목소리는…….

    ‘고트 자작 대부인.’

    이네스가 지그시 입술을 짓씹었다.

    고트 자작 대부인은 라이언의 어머니이자, 이네스의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었다.

    아마 친지의 자격으로 밀고 들어온 것 같다.

    ‘방 안에 들여도 되는 걸까.’

    이네스는 잠시 망설였으나.

    “네가 여기 있다는 소식 듣고 왔다!”

    쾅쾅!

    “당장 이 문 열지 못하겠니?”

    쾅쾅쾅!

    “어디 어른을 앞에 세워 두고, 예의 없이! 얘, 이네스!”

    고트 자작 대부인이 마구 문을 두드려 댔다.

    평소 귀족 가문의 기품이며 뭐며 떠들어 댔던 건 간데없었다.

    다른 투숙객들에게도 피해가 갈 것 같아서, 이네스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팔짱을 끼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고트 자작 대부인이었다.

    호기심 어린 투숙객들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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