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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21)화 (21/120)
  • 21화

    “이제 좀 긴장이 풀리십니까?”

    “네.”

    고개를 끄덕인 이네스가 얼른 감사 인사를 입에 담았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서식스 공작의 지지 자체가 이네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녹이 라이언과 완벽히 선을 그어 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이런저런 뒷말이 많았을 테니까.’

    이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이네스가 가만히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공작 각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것처럼, 에녹이 이네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라이언을 내쫓으신 것 말이에요. 아무래도 보수적인 귀족들은, 귀족이 내쫓겼다는 사실 자체에 불쾌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게다가…….”

    말끝을 흐리던 이네스가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쨌거나 라이언은 현재까지는 제 법적 남편이기는 하니까요.”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아무래도 왕국의 분위기상, 그렇잖아요.”

    이네스는 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두 눈을 내리깔았다.

    적어도 랭커스터 귀족 사회의 분위기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려는 누군가’에게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으며, 남성과 여성의 일을 완벽하게 분리해 둔다.

    가정을 꾸려야 마땅할 여자가, 그림을 그리며 화가로서 사회 진출을 꿈꾼다…… 라는 건.

    ‘충분히 특이하다고 여겨질 만하지.’

    라이언의 일탈은 분명 잘못이지만,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리고 밖으로 나돌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여질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네스는 달랐다.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을 출품하는 것 자체가 전례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흔쾌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준 에녹이 다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나 때문에 공작 각하께서 귀족 사회의 눈총을 받게 된다면…….’

    이네스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빠져들던 그때.

    “그야 잘못한 사람은 백작이니까요.”

    태연한 대답이 들려왔다.

    허를 찔린 이네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잔뜩 놀란 그녀와는 다르게, 에녹은 그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당연히 잘못한 쪽이 자리를 비켜 줘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네스는 입술을 달싹였다.

    원론적으로야 그렇다.

    그러나 사회가 언제나 그렇게 흘러가던가.

    이네스 자신만 해도, 단순히 ‘남편이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요청하지는 못했지 않은가.

    이혼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였었는데…….

    “피해자가 자리를 피해야 하는 건 불공평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눈앞의 에녹은 ‘옳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한 이네스가 ‘옳다’고 생각했기에,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이네스를 돕고 있었다.

    ‘저런 사람은 정말…… 처음이야.’

    이네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존경심을 느꼈다.

    저렇게 자신의 주관을 확고하게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그를 관철하는 저 모습을.

    ‘닮고 싶어.’

    때마침 에녹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씩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귀족 사회의 분위기 정도는 저도 압니다. 하지만.”

    장난기 어린 그 미소가 마치 어린 소년처럼 청량해 보였다.

    “이럴 때 쓰라고 제 신분이 있는 거죠.”

    “그, 공작 각하?”

    “제가 조금 멋대로 군다 한들, 감히 누가 제게 무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보면 오만한 말이었으나, 흠잡을 부분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에녹은 현 국왕의 유일한 남동생이며, 왕국의 왕위 계승권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심지어는 형님인 국왕과의 관계도 무척 좋다고 들었다.

    “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하느니,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휘둘러 올바른 행동을 하는 쪽이 제 취향에 더 맞습니다.”

    그렇게 말을 맺은 에녹은, 다소 머쓱한 얼굴이 되어 입가를 쓸어내렸다.

    “음, 이렇게 말하면 조금 오만해 보이나요?”

    “아뇨.”

    이네스는 단박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한걸요.”

    “속이…… 시원해요?”

    “네. 각하께서는 주변의 시선에 전혀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일을 진행하시잖아요.”

    순간 에녹이 멈칫했다.

    “저는 그럴 수 없으니까, 아니, 여태껏 그런 용기를 내 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이네스는 존경심에 가득 차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에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각하가 존경스러워요.”

    “…….”

    그 대답에, 에녹은 묘한 눈빛으로 이네스를 가만히 시야에 담았다.

    자신이 이네스를 두고 했던 생각을, 그녀도 그를 보며 똑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사실이 어쩐지.

    ‘기쁘군.’

    어쩐지 낯이 간지러운 기분에, 에녹은 괜히 두어 번 짧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백작부인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이번 일로 아마 상당한 논란에 휩싸일 거예요.”

    “네, 각오하고 있어요.”

    “당분간은 백작과 떨어져 호텔에서 지내시는 게 좋겠군요.”

    “그럴 생각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운을 차린 이네스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그런 그녀에게 시선이 가서.

    에녹은 저도 모르게 굳이 할 필요 없는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제가 가끔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네?”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차 싶었던 에녹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혹시나 브라이어튼 백작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아하, 그런 말씀이셨군요?”

    그제야 납득한 이네스가 방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공작 각하께는 항상 신세를 지게 되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그 말을 끝으로, 에녹은 멋쩍음을 이기지 못하고 괜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이네스는 힐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떨리지 않는 손.

    그를 지켜보던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좋아, 힘내자.’

    이네스는 힘주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전시회는 연일 호황이었다.

    이 전시회가 얼마나 큰 이슈인지, 전시회에 방문하여 백작 부부의 그림을 관람하는 게 사교계의 새로운 유행이 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전시회와 그림에 얽힌 백작 부부의 대립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그 소식이 어찌나 뜨거운지, 심지어는 국왕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였다.

    그 증거로, 현재 국왕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엘튼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자신의 인생을 찾기로 결심해……!>

    <그림의 주인은 누구인가?!>

    <브라이어튼 백작 가문의 이혼 소송, 승리자는 누구?!>

    수많은 헤드라인들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엘튼지에서는 이번 이슈를 특집으로 편성하여 계속해서 연속 기사를 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엘튼지의 주인은…….

    “너 꽤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라?”

    국왕, 에드워드가 보던 신문을 접어 내려놓으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 맞은편에는 엘튼지의 사주이자, 에드워드의 하나뿐인 아우인 에녹이 앉아 있었다.

    에녹이 다소 불편한 얼굴로 되물었다.

    “고작 그 말씀을 하시려고 저를 부르셨습니까?”

    “고작? 고작이라니!”

    에드워드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팡팡 두드렸다.

    “그거 아니? 나, 살면서 네가 여인과 이렇게 깊게 얽히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란다.”

    “형님.”

    “내가 그렇-게 선이라도 보면 어떠냐고 권유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에드워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너는 예전부터 레이디들에게 인기가 무척 많았었지? 그런데 정작 본인이 매번 싫다고 하니, 원.”

    “아, 정말 자꾸 이러시기입니까?”

    길게 이어지는 잔소리에 에녹이 질색을 했다.

    에드워드가 손을 휘저으며 재밌어 죽겠다는 양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알았어. 신기해서 그러지.”

    “정말 신기할 것도 많으십니다.”

    시큰둥한 동생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에드워드는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 후 자기가 내킬 만큼 실컷 웃은 후에야,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서 꺼내 놓는 화제는.

    “아무리 일적인 관계라고 한들, 그런 네가 여인과 이렇게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니. 요 몇 달간 해가 서쪽에서 떴나 봐?”

    “…….”

    또 이네스였다.

    에녹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에드워드는 그 시선을 맞받으며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대충 ‘뭐, 불만이냐?’ 정도의 표현이었다.

    “하아.”

    에드워드는 빙글빙글 눈웃음을 지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제 동생을 응시했다.

    신이 심혈을 기울여 직접 빚어낸 듯한 눈부신 외모.

    국왕의 하나뿐인 남동생으로서, 왕위계승권까지 갖고 있는 고귀한 신분.

    왕국 최고의 언론사인 엘튼사의 사주로써 쌓아 올린 부와 명예.

    수많은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해 주는 그 뛰어난 안목까지.

    자신의 동생이어서 좋게 봐 주는 게 아니라, 에녹은 랭커스터 왕국 그 누구라도 원할 법한 신랑감이었다.

    그런 에녹의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여성과의 관계.

    에녹은 왕족으로서 제 행동거지를 조심했고, 그의 사생활은 무척 깨끗했다.

    다만 그 깨끗함이 너무하여 여태 결혼을 하지 않은 게 문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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