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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20)화 (20/120)
  • 20화

    “어떻게 된 일이긴, 당신 말대로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잖아.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익……!”

    라이언이 흉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평온한 진녹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배배 뒤틀렸다.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데.

    이네스는 어째서 저렇게 침착한지!

    “내가, 내가 원했던 건!”

    “내 그림을 당신의 이름만으로 출품하는 것이었겠지. 알아.”

    그렇게 답하며, 이네스는 기민하게 주변의 시선을 살폈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저 관람객들은, 오늘 있었던 일을 사교계에 일파만파 퍼뜨려 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지만 내가 당신의 말을 따라 줘야 할 이유는 없잖아?’

    최대한 라이언을 도발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

    그러한 판단으로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

    “뭐?”

    “못 알아들어? 더 이상 당신을 위해 희생하고 싶지 않다고.”

    이네스가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내게 빌붙어서 살 생각이야?”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라이언에게만 은밀하게 속삭인 그 말은…….

    “기생충처럼.”

    순간 라이언의 이성이 뚝 끊겼다.

    “네가 정말 미쳤구나!”

    그 어마어마한 폭언에, 이네스와 라이언의 대치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관람객들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지, 지금 백작께서 뭐라고 하신 건가요?”

    “어떻게 저렇게 상스러운 말을!”

    물론 귀족들도 뒤로는 다 험한 말을 하고 산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는 품위를 위해서라도 언행을 조심하는 것이 일반적일진대.

    하지만 분노로 머리가 새하얗게 된 라이언은 재차 폭언을 쏟아 냈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무너뜨리려 들어?!”

    라이언이 가슴을 부풀리며 위협적으로 이네스에게 다가섰다.

    “하잘것없는 계집 따위가!”

    하지만 이네스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라이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여유로움은 뭐지?’

    이네스는 보통 라이언이 이렇게 언성을 높이며 압박해 오면 금방 수그리고는 했다.

    ‘미안해, 내가 눈치가 없어서 당신을 기분 나쁘게 했나 봐…… 용서해 줘.’

    그런 말이 입버릇일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네스는 달랐다.

    물끄러미 라이언과 시선을 맞추던 이네스가, 짧게 조소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라이언, 주변을 좀 보지 그래?”

    순간 라이언은 머리부터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이언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이, 이게 무슨……?!”

    수십, 수백 쌍의 경악한 눈동자들이 모조리 라이언에게 꽂혀 있었다.

    이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관람객들이었다.

    그리고 그 관람객들 중에는 당연히, 사교계에서 이름 깨나 날린다는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

    얼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제기랄!’

    라이언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실수했어. 도대체 이 분위기를 어떻게 뒤집어야만 하지?’

    그도 그럴 것이 현 상황은 라이언에게 너무 불리했다.

    아무리 흥분해도 그렇지, 모든 관람객들이 보는 앞에서 이네스를 윽박지르는 행동은…….

    동시에 이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또각.

    대리석 바닥 위로 구두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라이언의 코앞까지 다다른 이네스가 시선을 들어 라이언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이야, 라이언.”

    라이언을 부르는 이네스의 목소리는, 온통 격앙된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차분했다.

    “이, 이네스.”

    라이언은 치받는 분을 억누르며 이네스를 달래려 했다.

    “알잖아? 내가 방금 흥분해서 그런 거야, 나는…….”

    “아니.”

    하지만 이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어 라이언의 말을 끊어냈다.

    “흥분했다는 핑계는 대지 마.”

    “그게 무슨 말……!”

    “결혼하자마자 계속 나를 그렇게 대했잖아. 안 그래?”

    얼어붙은 라이언을 향해, 이네스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는 당신을 사랑해서 참았지만, 언제까지나 참고 살 수만은 없어.”

    “이네스!”

    “당신의 하잘것없는 아내 덕택에, 당신이 브라이어튼 백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

    이네스의 입술 사이로 신랄한 말이 흘러나왔다.

    라이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이네스. 지금 뭐라고……?”

    “내가 없었더라면, 지금 당신이 브라이어튼 백작이라고 불릴 수나 있었겠어?”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마치 채찍처럼 라이언의 귓가를 후려갈겼다.

    라이언은 멍한 얼굴로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눈앞의 이네스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저 냉담하고 침착한 얼굴을 한 여자가…… 정말로 내 아내인 이네스가 맞는 건가?’

    이네스는 저러지 않았었는데.

    나만을 열렬히 사랑하다 못해 목을 매고, 가벼운 애정 표현 하나에 온 세상을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그런데 그때.

    “이게 도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살펴보고 있던 에녹이, 라이언과 이네스 사이의 소란을 듣고 되돌아온 것이었다.

    라이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서, 서식스 공작 각하?!”

    “나는 브라이어튼 백작의 그림과, 백작부인의 그림 모두 내 미술전에 출품시켰습니다.”

    에녹이 차분한 시선으로 이네스와 라이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말은 즉, 브라이어튼 백작과 백작부인은 내게 있어 동등한 예술가라는 뜻이지요.”

    “…….”

    라이언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함께 빙해처럼 시린 푸른 눈동자가 라이언에게 똑바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난, 그 누구라도 나의 예술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라이언은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치받는 긴장감이 목을 바짝 조른다.

    “또한 그게 내가 고르고 골라 선택한 예술가 사이의 분쟁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가, 각하, 그래도 저는……!”

    “다만.”

    에녹이 엄정하게 말을 덧붙였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언제까지 예술가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니, 내 입장에서는 백작부인을 좀 더 보호할 수밖에요.”

    라이언이 두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저 말은 곧, 브라이어튼 백작 부부 사이의 분쟁 사이에서.

    에녹이 라이언보다는 이네스를 훨씬 더 믿고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순간 라이언이 헛숨을 삼켰다.

    ‘잠깐, 이번 일을 처음 호외로 보도했던 엘튼지는……!’

    서식스 공작의 소유가 아니었던가!

    에녹은 딱딱하게 굳어 버린 라이언을 일별했다.

    에녹의 눈가는 혐오감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더하자면, 그따위로 사람을 압박하고 언어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 난 정말 치졸하다고 생각합니다.”

    날카롭게 쏘아붙인 에녹이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이네스는 일견 무덤덤한 얼굴이었으나, 라이언은 그녀의 손에 주목했다.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는 손.

    그리고 제가 떨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힘주어 양손을 마주잡고 있는 저 모습까지.

    에녹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두려웠겠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남편에게 겁박당하고 매도당하는 상황이라니.

    아무리 강단 있는 성품이라 한들, 분명 버티기 어려웠을 텐데…….

    에녹은 정중한 동작으로 이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작부인께는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

    “휴게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제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에녹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그렇게 답하는 목소리가 마치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가늘어서.

    “…….”

    에녹은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네스를 보호하듯 감싼 에녹이, 주변을 지키고 있던 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브라이어튼 백작을 밖으로 모셔라.”

    “각하? 각하!”

    라이언이 기겁하며 에녹을 불렀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우르르 몰려온 전시회장 직원들이 라이언의 양팔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라이언은 마구 발버둥을 쳤다.

    “이것 놔! 놓으라고, 내가 누군 줄 알고!”

    라이언의 절박한 고함 소리가 전시장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찌 보면 평민들에게 귀족이 끌려 나가는 상황인데도, 그 어떤 관람객도 라이언을 돕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움과 혐오감이 뒤섞인 오묘한 눈빛으로 라이언을 바라볼 뿐.

    그렇게 라이언은 강제로 전시회장 밖으로 내쫓기고 말았다.

    ❀ ❀ ❀

    인적 없는 휴게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이네스는 가슴에 손을 얹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에녹이 다과 테이블로 다가가더니, 차가운 주스를 한 잔 따라내어 이네스 손에 쥐여 주었다.

    “마셔요. 조금 진정이 될 겁니다.”

    “…….”

    이네스는 입술을 짓씹었다.

    유리컵을 움켜쥔 손이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심해.’

    그녀는 주스 한 잔을 모조리 들이켜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함께 삼켰다.

    달콤하고 차가운 것이 들어가니 조금 정신이 나는 것도 같다.

    에녹이 이네스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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