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백작부인께서 제 미술전에 이리 찾아 주시니, 무척 기쁩니다.”
마치 사람들의 시선에 꺾일 필요 없다고,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듯한 말투다.
그 인사에 덧붙여, 에녹이 이네스의 장갑 낀 손을 부드럽게 붙들어 올렸다.
촉.
손등에 내려앉는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기본적으로는 고귀한 귀부인을 대하는 신사의 예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까무러칠 듯이 놀라, 에녹과 이네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 방금 보셨어요?”
“서식스 공작께서……!”
그도 그럴 것이, 저 예법은 다른 의미를 품고 있기도 했으니까.
그건 바로, ‘아랫사람의 경의.’
랭커스터 왕국의 귀족들은 국왕의 손등에 키스함으로써 충성 맹세를 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는 레이디와 신사의 예법일지언정, 신분 높은 이가 아랫사람에게 취할 일이 없는 예법이었다.
에녹 또한 형님 부부인 국왕과 왕비 외로는 이 예를 취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은즉.
에녹은 자신이 이네스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를 행동으로써 모두에게 직접 보여 준 것이었다.
“고, 공작 각하?”
이네스 본인이 더더욱 놀라,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에녹이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백작부인께서 출품해 주신 그림 덕택에 제 미술전이 상당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답니다.”
“……영광입니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이네스가 대답했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가다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어떡해, 긴장돼서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아!’
애초에 이네스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데뷔탕트 파티 때에나 그랬던가.
게다가 지금 그녀에게 예를 취한 사람은, 무려 왕국의 하나뿐인 왕제(王弟)인 에녹 폰 랭커스터 아닌가!
“가시지요. 부족하나마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그뿐이랴?
에녹은 자연스럽게 이네스를 에스코트하여 전시관 안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이네스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는 바람에,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백작부인, 저는 백작부인을 잡아먹지 않습니다.”
동시에 짓궂은 속삭임이 들렸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
에녹이 짙푸른 눈을 장난기로 빛내며 이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저더러 긴장하지 말라고요? 이런 상황에서요?”
“긴장하지 말라고는 안 했습니다.”
이네스가 목소리를 낮춰 쏘아붙이자, 에녹이 얄밉게 대꾸했다.
“긴장할 필요 없다고 했지요.”
“그게 그 말……!”
발끈하던 이네스가 문득 홀린 듯이 전시관의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걸려 있는 두 가지의 그림.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을 그린, 그리고 브라이어튼 백작 부부의 이름을 나란히 나눠 가진.
<화방 거리의 아침>
<화방 거리의 저녁>
마치 연작처럼 보이는 그 그림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 서 있었다.
“이 그림들, 브라이어튼 백작 부부께서 하나씩 맡아 그리신 거라고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한 사람의 작품 같은데…….”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동일하게 그릴 수가 있단 말이에요?”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녀의 그림에 의구심을 느끼는 사람들.
그 모습을 응시하며, 이네스는 수많은 감회가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이었다.
‘라이언’의 이름이 아닌, ‘이네스’의 이름으로 만인에게 그림을 선보이는 것은.
때마침 에녹이 한 걸음 앞서 나갔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는 대부분 아실 테지만,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한참 그림들을 관찰하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고, 공작 각하?”
놀란 이네스가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에녹은 차분하게 말을 이을 따름이었다.
“이네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입니다. 또한…….”
에녹이 힐끔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에녹은 그녀의 진녹색 눈동자에서 도무지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반짝이는, 저 찬란한 눈동자.
그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에녹이 말을 이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
“…….”
관람객들은 모두 얼어붙은 것처럼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네스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에녹이, 관람객들을 마주하며 가볍게 입술을 열었다.
“제가 새로이 발굴한 이 뛰어난 예술가에게 주목해 주십시오.”
에녹의 말이 떨어진 그 순간.
마법처럼 관람객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람객들은 제각기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네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저 그림이 브라이어튼 백작부인께서 그리신 게 맞나요?”
“백작님과 너무 화풍이 비슷한데, 그럼 여태껏 백작께서 출품하셨던 그림들은 도대체 뭔가요?”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을 들으며, 이네스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라이언의 그림자를 벗어날 첫걸음을 떼어 냈다.
그 증거로, 모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라이언이 아닌 이네스를.
❀ ❀ ❀
촤아악!
화려한 레이스 커튼을 걷어 내자, 환한 햇살이 방 안으로 눈부시게 부서져 내렸다.
벌써 태양이 높다랗게 뜬 지 오래.
라이언은 짜증스럽게 이마를 구기며 몸을 웅크렸다.
아무래도 어제 너무 과음을 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망치로 머리를 쾅쾅 치는 것 같아서, 라이언은 어금니를 깨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으…….”
“라이언, 라이언!”
하지만 막 다시 잠들려던 차.
누군가의 손길이 곤히 잠들어 있던 라이언을 마구 흔들어 깨웠다.
라이언이 이불을 뒤집어쓰며 몸을 뒤척였다.
“아, 뭔데?!”
“이것 좀 봐, 큰일 났어!”
그에 개의치 않고, 샬럿이 라이언의 코앞에 신문을 들이밀었다.
엘튼지에서 낸 호외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수선을…….”
신경질적으로 말끝을 흐리던 라이언은, 순간 두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떴다.
신문 최상단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머리기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서식스 공작의 미술전에 걸린 두 가지 그림! 브라이어튼 백작이 여태껏 그려 왔던 그림의 비밀은?!>
“이, 이게 도대체 뭐야!”
비명처럼 언성을 높인 라이언이 샬럿의 손에서 신문을 낚아챘다.
신문의 내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의 그림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이번에 백작이 출품한 ‘화방 거리의 아침’과,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출품한 ‘화방 거리의 저녁’이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흡사 연작처럼 보이는 두 작품은, 단순히 두 화가가 서로 부부이기에 가질 수 있는 유사성을 넘어섰으며…….>
“이네스, 이게……?!”
라이언이 아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샬럿이 걱정스럽게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라이언, 어떡해?”
“어쩌긴 어째, 당장 가서 수습해야지!”
라이언은 분을 못 이겨 와락 고함을 내지르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대충 팔에 옷을 꿰어 입은 라이언이,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전시장까지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욱, 토할 것 같군.’
라이언은 과음으로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마차에서 내렸다.
채 가시지 않은 취기로 두어 번 휘청거리기는 했으나, 어쨌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다.
동시에 관람객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라이언에게로 쏠렸다.
“저 사람, 브라이어튼 백작 아니에요?”
“맞네요!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도 이제야 들어오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귀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쑥덕거렸다.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지만 말들이 다 들린다.
그뿐이랴?
나이가 지긋한 몇몇 신사들은 보란 듯이 쯧쯧 혀를 차고 있었다.
그중에는 저와 클럽에서 포커를 치며 함께 술을 마셨던 작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기랄!’
라이언은 속으로 욕설을 짓씹어 뱉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 이네스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에게 잔뜩 둘러싸인 채 환하게 웃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저게!’
라이언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튕겨 올랐다.
‘저 자리는 내 것인데!’
그를 우러러보는 관람객들, 그의 천재성을 찬탄하는 달콤한 목소리.
어떻게든 관심 한 조각이라도 받아 보겠다며 말을 붙이는 수많은 사람들.
‘내 거야, 그건……!’
비록 그 모든 주목은 이네스의 그림을 통해 받는 거였다지만, 그까짓 게 뭐 어떤가?
남편의 바깥일이 잘되어야 아내도 나란히 행복해지는 것인데!
무릇 여자로 태어났으면 조신하게 내조나 할 것을!
“이네스!!”
라이언이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렀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놀란 관람객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수많은 시선에 라이언은 잠시 흠칫했으나, 이내 양어깨에 힘을 주며 척척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그 가운데에 선 이네스가 가까워졌다.
라이언이 와락 이네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갈퀴 같은 손아귀 안쪽으로, 이네스의 어깨가 빳빳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 위로 희미한 두려움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것 놔.”
라이언의 손을 탁 쳐 낸 이네스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허리를 곧게 펴며 라이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