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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8)화 (18/120)
  • 18화

    ❀ ❀ ❀

    라이언은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뜬 늦은 아침에야 귀가했다.

    “……이네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이네스가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

    라이언이 게슴츠레한 눈을 껌뻑이더니, 갈지자 걸음으로 이네스 곁에 다가왔다.

    라이언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지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림은?”

    말도 없이 외박해서 미안하다는 사과 같은 건 없었다.

    대뜸 자기의 용건만을 묻는 그 태도에, 이네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이미 당신 이름으로 접수했어.”

    “그래, 잘했어 이네스!”

    싱글벙글 웃어 대던 라이언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욱!”

    전날 과음한 탓에,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이 입을 틀어막은 채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갔다.

    “…….”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조용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저 꼴을 보고서도 입맛이 남아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잠시 후.

    “으으, 죽겠네.”

    라이언이 비틀거리며 다시 돌아 나왔다.

    식탁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주저앉은 라이언이, 곁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를 괜히 닦달했다.

    “어후, 속 쓰려. 가서 뭐라도 좀 갖고 와!”

    “예, 백작님.”

    난감한 얼굴로 물러난 하녀가, 이내 숙취 해소에 좋은 꿀차를 가져다주었다.

    그 꿀차를 벌컥벌컥 마신 라이언이, 탕 소리가 나도록 식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이네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야, 라이언.”

    “왜?”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그도 그럴 것이, 라이언의 이름으로 접수된 그림 아닌가.

    이네스가 만약 라이언의 입장이었더라면, 그림이 접수되기 전에 한 번 살펴보기라도 할 텐데.

    라이언은 아예 그림을 확인할 생각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증거로, 라이언의 얼굴에는 의아함만이 가득했다.

    “그걸 내가 왜 궁금해해야 하는데?”

    “…….”

    이네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라이언을 응시하던 이네스가 대꾸했다.

    “당신 이름으로 접수된 그림이잖아. 최소한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뭐, 이네스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안 그래?”

    어깨를 으쓱여 보인 라이언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우, 어제 밤을 샜더니 피곤하네. 좀 자야겠어.”

    그렇게 라이언은 자리를 휙 떠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네스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 이네스. 새삼스럽게 상처받을 필요 없어.’

    사실 라이언은 언제나 그랬다.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라이언에게 있어 사람들의 선망과 명성을 거머쥘 도구였을 뿐.

    그러나 이제.

    ‘그 그림은 너를 공격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가 될 거야.’

    아직까지는 라이언의 저런 몰상식한 언사에 가슴 아플 때도 있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다.

    이네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그리하여 마침내 미술전 개막일.

    이네스는 아침 일찍 타운하우스를 나섰다.

    개막 시간에 맞춰 미술전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서식스 공작의 미술전은 왕실이 소유한 상설 전시관을 통으로 빌려 진행한다고 했다.

    사실 왕실의 전시관을 빌린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왕실 전시관은 기본적으로 명장들, 혹은 왕립예술협회에 소속된 예술가들의 예술품만을 전시하는 곳이었으므로.

    아무리 현 국왕의 하나뿐인 동생이라지만, 그런 곳에 신인과 기성을 가리지 않고 작품을 전시하는 것 자체가…….

    ‘확실히 공작 각하께서는 수완이 상당하셔.’

    이네스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중.

    “세상에.”

    눈앞에 펼쳐진 혼잡한 풍경에, 이네스는 다소 당황하여 두 눈을 깜빡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설 전시관 주변에 각계 고위층의 마차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그만큼 서식스 공작의 미술전이 사교계의 뜨거운 화제였기 때문이겠으나…….

    ‘그래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릴 줄이야.’

    온몸을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에, 이네스가 입 안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전시관에 들어가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똑똑.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응?”

    이네스가 의아한 얼굴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젊은 남성 한 명이 마차 밖에 서서 이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십니까?”

    단정하게 차려입은 제복을 보아하니, 왕실 상설 전시관에 소속된 직원인 것 같았다.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서식스 공작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워낙에 주변이 혼잡하니, 제가 따로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이네스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공작 각하께서…….’

    그러고 보면, 얼핏 흘리듯이 말한 적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서식스 공작의 미술전이니, 분명 미술전에 몰리는 인파가 상당할 거라고.

    그러니 아침 일찍 방문하여 그림이 잘 전시됐는지 보고 가겠다고.

    하지만.

    ‘그 말을 기억해 두셨다가, 미리 직원을 배치해 두신 거야? ……나를 위해?’

    에녹은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세심한 배려를 해 준다.

    ……라이언과는 다르게.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때마침 저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에, 이네스가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 가지.”

    그렇게 직원의 도움을 받아서, 인고의 시간을 보낸 끝에야.

    이네스는 마침내 전시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전시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은 온통 벌집을 쑤신 것처럼 시끄러웠다.

    “그 그림 봤어요?”

    귀부인 중 한 명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브라이어튼 백작이 출품했다는 그 그림 말이에요!”

    순간 이네스는 환희에 차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됐어!’

    이네스가 성공한 것이다!

    “어째서 브라이어튼 백작부인과 동일한 그림이죠?”

    “그러니까 말이에요, 저는 연작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건 그렇고 백작부인께서도 그림을 그릴 줄 아셨던 거예요?”

    그 귀부인뿐 아니라, 다른 관람객들도 그림에 의혹을 품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브라이어튼 백작이 그림을 두 점 그려서, 자신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으로 동시 출품을 한 걸까요?”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다들 한마디씩 말을 얹느라, 로비는 온통 시끄러웠다.

    그러던 중.

    관람객들 중 한 사람이 입구에 서 있는 이네스를 발견했다.

    “세상에,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뭐라고요? 백작부인께서 오셨어요?”

    “어디, 어디에 계신가요?”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이네스에게로 쏠렸다.

    이네스는 그만 당황해 버렸다.

    ‘물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내가 목표하던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 수많은 사람들이 형형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질책하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브라이어튼 백작과 백작부인의 그림이 비슷한 건 알겠어요.”

    누군가가 삐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귀부인이 그림을 출품할 수가 있죠?”

    “무릇 귀부인이란 가정을 지키고 보살펴야 하는데.”

    “게다가 브라이어튼 백작가는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잖아요.”

    “그런 가문의 안주인이, 가문의 품위가 손상되는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수군거리는 속삭임들이 흡사 칼로 온몸을 난도질하는 듯하다.

    밀려드는 긴장감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괜찮아.’

    이네스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라이언과 샬럿에게 배신당하고, 평생을 조롱당하며, 모욕당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

    잠시 흐려졌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았다.

    주먹을 꾹 움켜 쥔 이네스가,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관객들의 시선을 똑바로 직시했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반응만을 보여 주지는 않을 거라는 것,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무어라 제멋대로 지껄여 댄다 한들, 이네스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저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움츠러들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이 일은…… 내가 선택한 거야.’

    내 그림을, 내 인생을 되찾기 위해.

    그녀의 눈동자에 결기가 서렸다.

    이네스는 당당한 걸음으로 관객들 쪽으로 다가갔다.

    ‘뭐, 뭐야?’

    ‘당연히 기가 죽을 줄 알았는데…….’

    ‘전혀 부끄러워하지를 않잖아?’

    오히려 관객들이 다소 기가 눌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이네스를 부르는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제각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서식스 공작 각하!”

    에녹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킨 에녹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이네스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사람들이 물결이 갈라지듯 물러났다.

    마침내 에녹이 이네스 앞에 섰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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