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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7)화 (17/120)

17화

에녹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란다.

“으앗, 깜짝이야! 소리라도 내고 들어오시지!”

“…….”

그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방 안을 휘감고 있던 압도적인 분위기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에녹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이미 노크도 두 번이나 하고,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양해도 구했습니다만.”

“아, 그랬어요?”

그 대답에, 이네스가 계면쩍은 얼굴이 되어 에녹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주변 소리를 하나도 못 듣는 경우가 있어서.”

“집중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합니다.”

“심지어는 저번에 란트 부인이 저를 다섯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다며, 마구 짜증을 내는 거 있죠? 아, 란트 부인은 화방 주인의 이름이에요.”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던 이네스가, 에녹이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가리켰다.

“그건 그렇고 손에 든 건 뭐예요?”

“음식입니다.”

“음식이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이네스가 멈칫 굳어졌다.

“란트 부인에게 듣자 하니, 식사조차 거르고 그림을 그리는 때가 많다고 하더군요.”

“어…….”

“그래서 별 건 아니지만 요깃거리를 몇 가지 사 와 봤습니다.”

탁자를 끌어당긴 에녹이 종이봉투를 열고, 물건들을 하나둘씩 꺼내어 늘어놓기 시작했다.

치즈와 갖가지 과일, 미트파이, 주스 한 병, 그리고 이네스가 즐겨 먹는 바게트 샌드위치도 있었다.

심지어는 식기들까지 모조리 챙겨 왔다.

순식간에 차려지는 음식들을 멀거니 바라보던 이네스가 에녹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식사를 거를까 봐 염려스러워서?”

“그럼 이 많은 음식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사들이겠습니까?”

어깨를 으쓱인 에녹이 능숙한 손길로 미트파이 한 조각을 잘라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접시를 이네스 앞에 밀어 준다.

“드시지요.”

“…….”

그러고 보면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 준 적이 없는 것 같다.

언제나 라이언을 챙기느라 동동거리기만 했었는데…….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에, 이네스가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한 이네스가 포크를 들었다.

미트파이를 커다랗게 잘라 입에 넣자, 잘 익은 고기와 바삭한 파이지가 어우러져 고소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그러던 중.

‘응?’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에녹이 어쩐지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엄청나게 대단한 것을 궁금해 하는 양, 목소리를 깔며 묻는다는 것이.

“입에 맞으십니까?”

“네?”

“나름대로 소문이 괜찮은 곳에서 사온다고 했습니다만, 입에 맞지 않으신다면 편히 말씀해 주시지요.”

“…….”

누군가가 머리를 세게 때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멍해졌던 이네스가 애써 에녹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맛있어요.”

“…….”

그 대답에, 에녹이 면밀하게 이네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러고는 미간을 좁히며 단언한다.

“거짓말 마십시오.”

“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는, 사람들은 보통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요.”

아.

허를 찔린 이네스가 두 눈을 깜빡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쓸어내려 본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수많은 감정으로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만져졌다.

“정말이에요, 맛있어요. 그냥 전…….”

잠시 말끝을 흐리던 이네스가, 이내 입술을 꾹 당겨 물었다.

“그냥, 조금 새삼스러워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살면서 그 누구도…… 심지어는 제 남편인 라이언조차도.”

누군가가 커다란 돌덩이로 목구멍을 꽉 막아 둔 것만 같아서.

이네스가 힘겹게 말을 토해 내었다.

“단 한 번도 제 입맛을 고려해 준 적 없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부모님을 제외하면, 공작 각하가 처음이에요.”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서글픈 미소였다.

“제 입맛을 고려해 준 사람 말이에요.”

“…….”

복잡한 기분으로 그런 이네스를 내려다보던 에녹이, 이내 차분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제가 더 신경 쓰도록 하죠.”

“이런, 부담 드리려고 말씀드린 건 아니었는데요.”

“부담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제가 신경 쓰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 대꾸한 에녹이 투명한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한가득 따라 내주었다.

“자, 더 드시죠.”

“각하께서는 안 드세요? 혼자 먹기 싫은데.”

이네스의 장난스러운 채근에, 에녹 또한 식기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네스는 다시 한번 가슴이 아렸다.

‘만약 라이언이라면 어땠을까.’

아마 라이언은, 그녀와 못 이기는 척 함께 식사를 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면박을 주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쯤 생각하던 이네스는 애써 라이언의 생각을 털어 냈다.

그녀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분명 에녹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이네스는 그렇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말이죠, 오늘 란트 부인이…….”

제가 겪었던 소소한 일들을 재잘거리는 그 목소리가 경쾌했다.

에녹은 그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치면서 동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에녹은.

‘부모님을 제외하면, 공작 각하가 처음이에요.’

‘제 입맛을 고려해 준 사람 말이에요.’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흡사 손톱 아래에 박힌 자그마한 가시처럼.

❀ ❀ ❀

미술전이 개최되기까지 일주일 정도 남은 시점.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

“훌륭하군요.”

그림을 살펴본 에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찬사에, 이네스가 안도한 얼굴을 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두 가지의 그림은 각자 화방 거리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연작 느낌으로, 하나는 아침의 풍경을 그렸고 다른 하나는 저녁의 풍경을 그렸다.

불타오르는 것 같은 황혼의 화려한 색감이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이건 마치…… 연작 같군요.”

“일부러 그런 느낌을 주도록 작업한 거예요.”

에녹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네스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딱 보자마자 의아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에요.”

“뭐, 그런 의도라면 완벽하게 성공했네요.”

“다른 분도 아닌 공작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위안이 되네요.”

어깨를 으쓱인 이네스가 포장지로 그림 하나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굳이 포장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제게 맡겨 주시면 알아서 미술전에 접수할 텐데요.”

그 질문에 이네스가 멈칫 손을 멈추었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던 끝에, 이네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에녹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백작부인.”

“라이언이…… 궁금해할지도 모르잖아요?”

포장지를 움켜쥔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제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말이에요.”

그 목소리에 서려 있는 일말의 기대.

적어도 남편이 자신의 예술적 성취에는 관심을 가져 줄 거라고 믿는.

그렇게라도 라이언에게 희망을 걸어 보고 싶은…….

“…….”

그 미세한 기대감을 눈치챈 순간, 에녹은 기분이 확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굉장히 유쾌한 기분이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이네스가 화들짝 놀라며 움켜쥐고 있던 포장지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런. 포장지가 다 구겨졌네요. 아까워라.”

그 구깃구깃해진 포장지가 흡사 라이언에게 바쳤던 자신의 애정 같아서.

이네스는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워낙에 씁쓸한 기분이었기에, 이네스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에녹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그날 저녁.

이네스는 포장한 그림을 들고 타운하우스로 돌아갔다.

“나 왔어.”

“오셨어요, 마님?”

하녀는 이네스를 맞아들이며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으나, 밝은 표정까지 완전히 꾸며 낼 수는 없었다.

그 어두운 표정을 보자마자 이네스는 바로 눈치를 챘다.

“라이언이 아직 귀가하지 않은 거구나. 그렇지?”

“아, 마님. 그것이…….”

무어라 대답하려 입술을 달싹거리던 하녀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네스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런 하녀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이네스의 눈치를 조금 살피는 것 같던 라이언은, 최근 며칠간 계속 밖으로만 나돌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 귀가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을 완성해서 갖고 온다고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까.

‘바보 같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에 들고 있는 그림이 가뿐하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나, 도대체 무엇을 기대한 건지.’

이네스는 스스로를 한껏 비웃었다.

‘정말로 라이언이 내 그림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사실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라이언이 관심이 있는 건 이네스의 예술 세계가 아니라, 그녀의 그림이 가져다주는 명성뿐이라는 것쯤은.

때마침 이네스의 손에 들린 그림 꾸러미를 발견한 하녀가,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마님, 그 꾸러미는 이리 주세요. 제가 챙길게요.”

“괜찮아.”

고개를 가로저은 이네스가 몸을 돌렸다.

“나는 이만 들어가서 쉴 테니까, 라이언이 귀가하면 좀 부탁해.”

“예, 그러겠습니다.”

멀어지는 이네스의 뒷모습을 향해, 하녀가 꾸벅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가여우신 분.’

그녀를 응시하는 하녀의 눈동자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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