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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6)화 (16/120)
  • 16화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긴장감에 이네스가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이네스를 마주하며, 에녹은 그야말로 싱그럽게 웃었다.

    “제게 저녁 사세요.”

    “네?”

    뜻밖의 제안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에녹은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일단은 이 샌드위치로 눈감아 드릴 테니까요.”

    “…….”

    이네스는 한참 동안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린다.

    “공작 각하께서는 꽤…… 장난스러운 성격이신가 봐요?”

    “제 말이 장난처럼 들리십니까? 저는 진심인데요.”

    순간 에녹이 진지한 낯으로 되물었다.

    결국 백기를 든 쪽은 이네스였다.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저녁 식사를 대접해 드릴게요.”

    “약속하신 겁니다.”

    그 확답을 들은 후에야 에녹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네스는 그런 에녹을 힐끔 곁눈질했다.

    ‘그래도…… 나를 배려해 주신 거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내가 이혼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었는데.

    에녹이 저렇게 장난스럽게 말을 붙여 준 덕택에, 그 막막함도 조금 가신 것 같다.

    때마침 에녹이 제안했다.

    “타운하우스 근처까지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샌드위치를 먹으며 마차를 타러 걸어갔다.

    마음이 다소 가벼워진 이네스가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샌드위치, 꽤 맛있지 않나요? 사실 저, 화방에 들를 때마다 매번 사 먹었었는데…….”

    에녹은 그런 이네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길가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돌아다니고, 레이디의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듣는 것.

    사실 에녹에게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에녹은 평생을 왕족으로 살아왔고, 숨을 쉬는 것보다도 자연스럽게 귀족적인 생활을 영위했었으니까.

    그런데도.

    ‘즐겁군.’

    에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이네스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그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에녹 자신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 불쑥 튀어나온 이유는.

    “저도 가끔 백작부인의 아틀리에에 들려도 되겠습니까?”

    “네?”

    뜻밖의 말에, 이네스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하.”

    이네스는 그제야 납득한 얼굴을 했다.

    “그럼요, 애초에 이 일은 공작 각하의 도움이 없다면 성립되기 어려운걸요. 마음껏 살펴보세요.”

    이네스는 보란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테니까요.”

    “아뇨, 꼭 그런 의미는 아니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말을 부정하려던 에녹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왜 내가 변명하고 있지?’

    그들은 계약 관계였다.

    이네스는 엘튼지에 특종을 가져다주기로 약속했고, 에녹은 그녀의 특종을 최대한 잘 포장하여 터뜨리는 일을 맡았다.

    이네스는 이 특종을 차후 그녀가 이혼 소송을 하는 근거로 삼고자 하고.

    에녹은 엘튼지에서 이 특종을 단독으로 보도함으로써, 그가 소유한 신문의 명성이 더더욱 높아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한 이 모든 일의 근간은 이네스의 그림이므로, 그녀의 그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건 마치, 내가 백작부인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던 에녹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이네스와의 계약이 아무래도 워낙에 큰 건이라 그런지, 다소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다.

    에녹은 그렇게 제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 ❀ ❀

    그렇게 브라이어튼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이네스는, 다소 달갑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바로 웬일로 일찍 귀가한 라이언이었다.

    “도대체 어디를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 거야?”

    라이언이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이네스에게 눈을 부라려 보였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봐, 라이언이 벌써 집에 돌아올 줄이야.’

    이네스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이 시간에 집에서 당신을 보다니, 별일이네. 오늘은 안 바빠?”

    “크흠, 흠!”

    정곡을 찔린 라이언은, 괜히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그, 당신과 저녁 식사를 하려고 일찍 왔지.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

    “…….”

    이네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슬그머니 이네스의 눈치를 살피던 라이언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뭐어, 그리고 당신의 그림 진행 상황도 어떤지 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럴 줄 알았지.

    이네스가 짧게 조소했다.

    결국 라이언은 이네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녀가 그릴 그림이 궁금하여 일찍 귀가한 것이었다.

    이네스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림은 여러모로 구상하고 있으니 걱정 마.”

    “아, 그래?”

    그 무뚝뚝한 대답에도, 라이언의 얼굴은 비 갠 하늘처럼 활짝 펴졌다.

    하녀에게 겉옷을 벗어 맡기며 이네스가 말을 이었다.

    “어딜 다녀왔냐고 했었지?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느라 잠시 외출했었어. 미술전 주제가 자유라기에 좀 더 고민되더라고.”

    그렇게 대충 둘러대자, 라이언이 우물쭈물 질문을 던졌다.

    “그, 그랬구나. 피곤하겠네? 그럼 저녁 식사는…….”

    ……내가 피곤한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도 없으면서.

    물끄러미 라이언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휙 몸을 돌렸다.

    “그림을 구상하느라 머리가 아파서, 좀 쉬고 싶어. 당신 혼자 먹어.”

    “아, 그럴게. 고생해, 이네스.”

    예의상 한 번쯤 더 권해 보기라도 할 텐데.

    라이언은 그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이네스는 돌덩이가 가슴을 꽉 메운 것 같은 답답함을 억누르며, 침실로 들어갔다.

    달칵.

    방문이 닫혔다.

    “……하아.”

    동시에 이네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 에녹을 만나고 돌아와서 그런 걸까, 자꾸만 에녹과 라이언의 행동을 비교하게 된다.

    이네스의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가벼운 농담으로 풀어 주려던 에녹.

    그리고 그녀를 마주하자마자 다짜고짜 그림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던 라이언.

    그 마음 씀씀이 자체가 너무나도 차이가 나지 않는가.

    “남보다도 못한 남편이라니, 이것 참.”

    이네스는 이마를 짚은 채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미술전까지는 약 한 달이 남은 상황.

    이네스는 화방 거리의 아틀리에를 오가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 두 개를 동시에 완성시켜야 했기에 시간이 다소 빠듯했다.

    또한 에녹은 제 말을 충실히 지켰다.

    아틀리에에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면서, 그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직접 살펴본 것이다.

    그 와중 에녹은 화방 주인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었는데.

    “오셨어요?”

    처음에는 에녹 특유의 기품 때문에 다소 기가 죽었던 화방 주인이었으나, 이제 그것도 익숙해졌다.

    화방 주인이 이네스의 아틀리에가 있는 천장 쪽을 흘끗거리며 에녹에게 말을 붙였다.

    “이네스 말이죠, 끼니까지 거르면서 그림을 그린다니까요?”

    “……그렇습니까?”

    에녹이 미간을 좁혔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지 않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건강부터 먼저 챙겨야 할 텐데.

    이네스의 나쁜 버릇이 도진 것 같다.

    한번 몰입하면 계속 그림에만 매달리는 버릇 말이다.

    “아무래도 서식스 공작 각하의 미술전에 그림을 출품하려는 것 같은데, 그림도 좋지만 저러다 몸 상하겠어요.”

    화방 주인이 들으란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그게 에녹이 양손에 바리바리 음식을 싸 들고 이네스의 아틀리에로 향하게 된 경위였다.

    똑똑똑.

    방문을 노크한 이후 잠시 기다렸으나 대답은 없었다.

    미간을 좁힌 에녹이 문고리를 쥐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달칵.

    문은 잠그지 않았는지 쉽게 열렸다.

    무심결에 방 안으로 들어서던 에녹이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건…….’

    널찍한 창문 너머로 들이치는 석양의 붉은 빛깔이 방 안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로는 이젤 두 개가 나란히 놓인 채였다.

    바닥에 놓인 물통, 물감을 짠 팔레트.

    그리고 방 안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듯 앉아 있는 이네스.

    온통 물감이 묻어 얼룩덜룩한 앞치마를 대충 걸친 채, 섬세한 동작으로 붓을 놀린다.

    지금의 그녀는 온전히 그림에 몰입하여 그 어떤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이었다.

    그 누군가에게, 그 누군가를 둘러싼 공기에, 그 누군가가 바라보는 풍경에.

    범접할 수 없다고 느끼고, 압도당하여, 순식간에 경도되는 감각.

    마치.

    ‘마법 같지 않은가.’

    에녹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드르륵.

    순간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고 싶었나 보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네스가, 뒷걸음질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두 그림을 응시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림들을 관찰하는가 싶더니, 다시 그림 앞으로 걸어가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에녹은 도무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에녹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응?”

    때마침 인기척을 느낀 이네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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