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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5)화 (15/120)
  • 15화

    ❀ ❀ ❀

    랭커스터의 수도, 랭던의 외곽.

    화방 거리는 서민들이 주로 오가는 상업지구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숙집들과, 가난한 화가들이 밥값이며 숙박비 대신 그려 준 알록달록한 간판들.

    그리고 거리 군데군데에 콕콕 박혀 있는 화방들까지.

    에녹은 신기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무척 색다르군요. 저희들과는 생활 양식이 많이 다른 느낌인데요.”

    경쾌한 걸음걸이로 앞서 걷던 이네스가, 힐끔 뒤를 돌아보며 씩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전 여길 무척 좋아해요.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자유롭잖아요?”

    “확실히 그러네요.”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귀족 지구와 평민 지구의 거리가 떨어져 있다 한들, 같은 랭던에 있는 지구들인데.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게 신기했다.

    한편 익숙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이네스가 화방 한 군데에 쏙 들어갔다.

    “어서 오십…… 아!”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인이 환한 얼굴로 이네스를 맞아들였다.

    “이네스 아냐? 이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잘 지내셨어요?”

    이네스도 스스럼없이 마주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녹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 이네스라고 부른 건가?’

    아무래도 화방 주인은 이네스의 진짜 신분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때마침 이네스가 슬쩍 에녹을 돌아보았다.

    ‘죄송하지만 말을 좀 맞춰 주세요.’

    살짝 윙크를 해 보인 그녀가 다시 화방 주인에게로 돌아섰다.

    에녹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러고 보면 백작부인은 평민들과도 굉장히 허물없이 지내는군.’

    귀족 우월주의를 사람으로 빚어낸 것 같은 라이언과는 상당히 다른 행보이지 않은가.

    한편 이네스는 화방 주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감이 떨어져서 들렀어요. 그리고 붓도 좀 보고 싶고…….”

    “아, 그럼 이쪽으로 오라고. 마침 새 붓이 들어왔는데, 품질은 내가 자부하지.”

    화방 주인이 이네스를 갖가지 붓이 진열된 곳으로 안내했다.

    이네스가 꼼꼼하게 붓을 살펴보았다.

    “이 붓, 무슨 털로 만들어진 거예요?”

    “담비 털이야.”

    “흠, 다른 건 더 없어요?”

    “그 외로는 족제비 털도 있는데…….”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그런데 이네스, 저 신사분은 도대체 누구야?”

    화방 주인이 목소리를 낮춰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이네스가 남자와 화방에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설마 애인이기라도 한 거야?”

    “에이, 그럴 리가요. 그냥 지인…….”

    무심결에 그렇게 대답하던 이네스가 문득 헛숨을 몰아쉬었다.

    ‘아차, 공작 각하께서도 계시지!’

    붓에 정신이 팔린 바람에, 각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 버렸다!

    화들짝 놀란 이네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에녹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어, 그러니까…….’

    입술만을 달싹이던 이네스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에녹은 별달리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으아, 내가 못 살아!’

    이네스는 화닥닥 화방 주인을 돌아보았다.

    “붓은 이걸로 포장해 주세요.”

    “그래그래, 알겠어.”

    화방 주인은 희희낙락 붓을 포장하러 갔다.

    종종걸음으로 에녹에게로 다가간 이네스가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제가 화구들에 너무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아뇨, 괜찮습니다.”

    고개를 가로저은 에녹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아틀리에를 보러 가시는 겁니까?”

    “네, 그래야죠.”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던 차.

    “아니, 이네스. 화방 거리에서 아틀리에를 구하려고?”

    막 붓을 포장해서 들고 온 화방 주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럴 거면 우리 화방 위층이 비어 있는데. 어때?”

    “아, 여기 위층 말씀이신가요?”

    “그래. 5층인데 햇빛도 무척 잘 들고 괜찮아. 우리 아들이 쓰던 방인데 지금은 학교를 다니느라 비어 있거든.”

    화방 주인이 수더분하게 웃어 보였다.

    “어디서 덤터기를 써서 이상한 방 계약하고 오지 말고, 응?”

    “음…… 일단 보고 결정할게요.”

    “좋아, 이네스 마음에도 쏙 들걸?”

    화방 주인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때, 훌륭하지?”

    두 사람을 위층 방으로 데리고 온 화방 주인은, 자랑스럽게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방의 면면을 살펴보던 이네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이 괜찮다고 자신하실 만하네요.”

    일단 방의 넓이가 상당했다.

    온갖 화구들을 갖다 두어도 모자람 없을 정도였다.

    그 중 이네스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방의 전면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 창문이었다.

    창문 쪽으로 사뿐사뿐 다가간 이네스가 슬쩍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와.’

    순간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짧게 감탄했다.

    창문 너머로 화방 거리의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었다.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길과 오밀조밀한 건물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모인 장소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좋아.’

    마음을 결정한 이네스가 밝은 얼굴로 화방 주인을 돌아보았다.

    “이 방, 계약할게요.”

    ❀ ❀ ❀

    그렇게 아틀리에 계약까지 마치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었다.

    ‘음, 내 나름대로는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이네스는 힐끔 에녹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에녹은 그렇지 않아도 바쁜 사람이었다.

    현 국왕의 하나뿐인 남동생, 제국 유일의 공작.

    그 이름들이 휘황하게 빛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름에 따르는 수많은 업무가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공작 각하께서 먼저 따라오겠다고 하신 건 맞지만, 그래도 내가 좀 더 눈치 있게 굴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네스가 그렇게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중.

    에녹이 설핏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오늘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그, 죄송해요, 오늘 공작 각하의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 네?”

    반사적으로 사과하던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으,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요.”

    “진심입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지요.”

    그래도 내가 너무 미안한데!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던 이네스는, 문득 맞은편에 위치한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다.

    바게트를 이용하여 만드는 샌드위치가 유명하며, 이네스 자신도 화방 거리를 오갈 적 몇 번 사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순간 이네스가 화색이 되어 에녹을 돌아보았다.

    “혹시 샌드위치 좋아하세요?”

    “……글쎄요, 싫어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뜬금없는 질문에 에녹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에녹의 대답을 듣자마자 이네스가 척척 샌드위치 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 샌드위치를 팔던 가게 주인이, 이네스를 마주하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척을 했다.

    “어머나, 이네스 아니야?”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이네스는 주인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가 싶더니, 바게트 샌드위치를 두 개 구매했다.

    그러고는 총총 에녹에게로 되돌아와, 샌드위치를 불쑥 내민다.

    “오늘 저 때문에 시간을 많이 빼앗기셨는데, 그 답례라기에는 뭐하지만요.”

    이네스는 냉큼 에녹의 손에 샌드위치를 쥐여 주었다.

    “여기 샌드위치 진짜 맛있거든요. 저 믿고 드셔도 돼요.”

    “…….”

    에녹은 조금 얼떨떨해졌다.

    동시에 이네스가 아차 하며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러고 보니 공작 각하께서는…… 길거리에서 샌드위치를 사 드신 적은 없었죠?”

    도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

    그 대단하신 서식스 공작께서 이런 샌드위치를 드실 리가 없잖아!

    이네스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에 빠져들던 차.

    에녹이 눈매를 살긋이 휘며 대꾸했다.

    “제 하루를 샌드위치 하나로 대신하는 겁니까? 이건 좀 너무한걸요.”

    ……아니, 내가 따라와 달라고 한 적 없잖아?

    이네스는 조금 억울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오늘 혼자 신이 나서 에녹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것은 자신이었기에.

    풀이 죽은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샌드위치는 다시 돌려주세요. 어떻게든 제가 공작 각하의 하루에 걸맞는 물건을 찾아볼…….”

    “이런, 돌려드린다고는 안 했습니다만.”

    장난스럽게 대꾸한 에녹이, 긴 손가락으로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고는 보란 듯이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네스는 홀린 것처럼 그런 에녹을 응시했다.

    ‘저 사람은 무슨, 길거리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조차 그림 같네.’

    샌드위치를 씹어 삼킨 에녹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만 수지가 안 맞는다는 소리죠.”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네스의 불퉁한 질문에, 에녹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하죠. 이번 일이 모두 마무리되고, 백작부인께서 다시 브라이어튼 백작의 작위를 되찾게 되면.”

    순간 이네스가 덜컥 굳어졌다.

    완벽하게 이혼을 끝마친다면, 라이언에게 양도했던 백작 작위도 그녀가 다시 회수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브라이어튼 백작 작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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