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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4)화 (14/120)
  • 14화

    이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라이언을 마주 볼 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초조해진 라이언이 이네스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이네스, 그려 줄 거지? 응?”

    그도 그럴 것이, 이네스가 그림을 그려 주지 않으면 저 미술전에 출품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이건 신이 주신 기회야!’

    무려 서식스 공작의 눈에 들 기회가 아닌가!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던 라이언이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절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어떻게든 이네스를 회유해서라도…….’

    라이언이 짜증스럽게 이네스를 채근했다.

    “왜 대답이 없어, 내 말 듣고 있기는 한 거야?”

    동시에 이네스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그녀가 소리가 나도록 식기를 내려놓았다.

    탁!

    깜짝 놀란 라이언이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이네스?”

    “그거 알아, 라이언?”

    이네스가 냉랭한 시선으로 라이언을 응시했다.

    “당신이 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한 거, 지난달 이후 오늘이 처음이야.”

    “그, 그랬나?”

    라이언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 알잖아.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집에 못 들어올 수도 있고…….”

    “그래서 그 바쁜 사회생활을 하던 와중, 이런 부탁을 할 때에만 일찍 귀가하는 거야?”

    “…….”

    라이언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네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나 보네.”

    그 냉정한 반응에 아차 싶었는지, 라이언이 어린아이처럼 이네스를 졸라 대기 시작했다.

    “그, 그래서 안 그려 줄 거야?”

    “…….”

    “이네스, 응?”

    “…….”

    “앞으로는 일찍 들어올게. 그, 그래. 식사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하도록 노력할 테니까…….”

    그 안달복달하는 모습이 그저 한심했다.

    게다가 그녀를 회유하겠답시고 하는 말이,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식사하기’라.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이면.’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던 이네스가,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생각은 해 볼게.”

    “고마워, 이네스!”

    활짝 밝아진 라이언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네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맙기는 뭘, 너를 몰락시키기 위해 직접 놓아 둔 덫인데.’

    나야말로 고마워, 라이언.

    당신이 직접 덫 안으로 기어 들어가 줘서.

    이네스가 방긋 웃었다.

    잘 갈린 칼날 같은 미소였다.

    ❀ ❀ ❀

    그 후.

    이네스는 다시 한번 에녹을 만났다.

    “라이언이 제게 미술전에 출품할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더군요.”

    그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미술전에 각자 라이언과 이네스의 이름으로 그림을 동시에 출품하여, 미술전을 방문한 대중들에게 판단을 맡긴다.

    당연히 두 그림은 모두 이네스가 그릴 것이다.

    두 개의 동일한 그림으로 인해 빚어지는 혼란은 엘튼지에서 대대적으로 기사화하기로 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스캔들일 될 것이다.

    “역시, 그럴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짧게 혀를 차던 에녹이 이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여 부담스럽지는 않으십니까?”

    이번 미술전은 개최 전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잔뜩 끌어모은 상태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뜨거운 감자는, 여성 화가의 출품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며 권장하는 것.

    그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그 상황에서 그림을 출품한다면.

    심지어는 그 출품 과정에서 떠오르는 신예 작가, 브라이어튼 백작의 대리 화가 문제가 밝혀지고.

    그 대리 화가가 이네스임이 알려진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논란에 휩싸일 터.

    이네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부담스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녹색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그래도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백작부인.”

    “제 삶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요. 아니, 견뎌야만 해요.”

    에녹은 이채 서린 눈으로 그런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 에녹이 이네스를 대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이네스는 겉보기로는 그저 연약한 귀부인일 뿐이지만, 의외로 심지가 굳고 담대한 구석이 있었다.

    ‘나와는 정말 달라.’

    정계의 일이라든지, 귀족 사회에서 에녹에게 멋대로 거는 기대라든지.

    모든 일을 회피하려 드는 자신과는 다르게, 이네스는 그 어떤 문제를 대할 때도 맞부딪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점이 신기하고, 색다르며, 조금은.

    ‘존경스럽군.’

    에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훌륭합니다.”

    “별말씀을요. 공작 각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텐데요.”

    에녹의 칭찬에, 이네스는 말갛게 웃어 보였다.

    “…….”

    그 말간 미소가 어쩐지 잔상처럼 시야에 남아서.

    에녹은 괜히 사무적으로 제안했다.

    “혹시 그림을 그릴 장소가 따로 필요하시다면, 제가 지원해 드리죠.”

    그러자 이네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저도 구할 수 있어요.”

    “브라이어튼 백작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하려면, 다소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에녹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이네스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저도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어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따로 생각해 두셨다…… 라. 그렇다면 무슨 그림을 그릴지도 이미 정해 두신 겁니까?”

    “네. 화방 거리의 풍경을 그려 볼까 해요.”

    “화방 거리요?”

    뜻밖의 대답에 에녹이 조금 놀랐다.

    화방 거리.

    온갖 화방과 소규모 미술상들,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주로 세 들어 사는 하숙집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다만 이네스는 랭커스터에서도 손꼽히는 고위 귀족이었다.

    보통의 귀족들은 평민 지구는 거의 오가지 않는 편이니, 막연히 이네스 또한 화방 지구에 방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이네스는 오히려 의아한 낯이 되어 에녹을 마주 볼 따름이었다.

    “화방 거리에 가야만 화구들을 살 수 있잖아요?”

    “아, 백작부인께서는 직접 화방에서 화구들을 구매하십니까?”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귀족들은 필요한 물건들은 시종을 보내서 사 오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네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일 따름이었다.

    “네. 제가 쓸 물건은 직접 살펴보는 게 마음이 편해서요.”

    “……그렇군요.”

    에녹은 머쓱하게 턱을 쓸어내렸다.

    이네스와 함께 있다 보면 자꾸만 허를 찔리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저 허를 찌르는 면이 무척 흥미롭단 말이지.’

    에녹이 물끄러미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자주 오가다 보니, 은근히 거리 구경이 재밌더라고요.”

    이네스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라이언은 평민들의 거리에 드나드는 것 자체를 천박하다며 질색하니까, 라이언을 마주칠 일도 없고요.”

    “그건 확실히 그렇겠군요.”

    “네. 그래서 그쪽에서 방을 빌려 임시로 아틀리에로 사용하려고요. 화방 거리에는 하숙집들도 많으니까, 그중에서 하나를 빌리면…….”

    한참을 신이 나서 재잘거리던 이네스가 문득 머쓱한 얼굴을 했다.

    “이런, 공작 각하께서는 별로 관심도 없으실 이야기일 텐데. 제가 너무 신이 나서 떠들었네요.”

    “아닙니다. 처음 접해 보는 이야기라 재미있었어요.”

    다행스럽게도 에녹은 지루한 얼굴은 아니었다.

    속으로 안도한 이네스가 에녹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다면 저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요?”

    “……벌써 돌아가시려고요?”

    어라, 이상하다?

    이네스는 두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 좀 아쉬워하시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에이, 내가 너무 과민한 탓이지.’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이네스가 대답했다.

    “아, 이왕 나온 김에 화방에도 들르고, 아틀리에를 빌리러 갈까 해서요.”

    그러자 에녹이 훌쩍 몸을 일으켰다.

    “모셔다드리죠.”

    “네?”

    이네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에녹은 덤덤한 얼굴로 이네스를 마주 볼 따름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도 랭던 외곽으로는 한 번도 나가보지 않은 것 같아서요.”

    “아, 그러셨어요……?”

    “일국의 왕족이면서도 서민의 생활에 너무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말에, 이네스는 그만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모처럼 백작부인께서 가실 때, 저도 함께 방문해 보고자 합니다만. 물론 백작부인께서 불편하시다면…….”

    “아, 아뇨!”

    듣다못한 이네스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같이 가요! 각하께서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데 어떻게 제가 거절할 수 있겠어요?”

    “아하, 감사합니다.”

    에녹이 말끔한 낯으로 씩 웃어 보였다.

    그런 에녹을 한참 노려보던 이네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정말, 공작 각하께서도 의외로 짓궂으신 면이 있다니까.’

    여하튼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시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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