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3)화 (13/120)
  • 13화

    이네스는 방으로 들어섰다.

    라이언은 술기운에 완전히 정신을 잃고,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드르렁-푸우, 컥, 컥컥!”

    큰 소리로 코를 골다가 목이 막혔는지 캑캑거린다.

    그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

    한참을 라이언을 노려보던 이네스는, 손을 뻗어 그의 셔츠 목덜미를 뒤집어 보았다.

    동시에 진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하.”

    이네스는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셔츠 목깃 위로, 붉은 립스틱 자국이 보란 듯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샬럿이었다.

    ❀ ❀ ❀

    며칠 후.

    에녹은 수많은 서류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서류들에 담겨 있는 것은 라이언의 여성 편력, 그리고 라이언이 현재 교류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목록이었다.

    “이것 참, 불륜을 저지르면서 이렇게 뻔뻔할 수도 있군.”

    에녹이 기가 막힌 웃음을 흘렸다.

    라이언은 애초에 자신의 불륜을 숨기려는 노력 자체를 거의 안 한 것처럼 보였다.

    딱히 대단한 조사를 한 것도 아닌데, 수많은 증거가 쏟아져 나왔다.

    온갖 술집에서 쓴 어마어마한 금액의 술값.

    대놓고 고급 접대부들을 불러들여 방탕한 시간을 보냈던 것.

    그리고.

    ‘제이슨 남작 영애.’

    흑백사진 속 샬럿은, 마치 자신이 라이언의 부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일전에 만났던 이네스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렸다.

    ‘……남편은 저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요.’

    제 남편에 대한 아무런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은, 그 담담한 목소리.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던 남자에게, 단 한 번도 사랑받았던 적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의 절망감은 어땠을까.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겠군.’

    다만 이네스는 스스로의 평판까지 망칠 것까지 감수하면서 진흙탕 싸움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녹은 알고 있었다.

    그 무력해 보이던 이네스는, 아주 조그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섭도록 그림에 집중하는 진녹색 눈동자, 그리고 망설임 없이 움직이던 손.

    그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지.’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도 무척 아름답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에녹 스스로가 그렇게 몰입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였을까.

    그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남았다.

    ‘어쨌든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의 말이 진실인지에 대한 교차 검증은 얼추 끝났어.’

    그 결과, 이네스의 말에는 한 점 거짓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약속을 지켜야겠지.’

    에녹은 종을 울려 노집사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각하.”

    “미술전을 하나 열 생각이니 준비해 주게.”

    “명 받들겠습니다.”

    다소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으나, 노집사는 전혀 놀라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에녹의 기행은 언제나 이유가 있었으므로.

    “이름은…… 그래.”

    에녹이 싱긋 웃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미소였다.

    “서식스의 예술가들, 정도면 좋겠군.”

    뭐, 사실 여기까지는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에녹은 이미 몇 번이나 예술가들을 지원해 왔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에녹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번 미술전은 신분의 고하와 성별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작품을 접수받도록 해.”

    “예?”

    순간 노집사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여성이 미술전에 그림을 출품했던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법적으로 여성이 예술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금제는 없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여성은 당연히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실제로 여성들 스스로도 ‘다소 유난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여태껏 여성의 이름으로 발표된 예술 작품은 거의 전무했는데…….

    “무언가 문제라도?”

    에녹의 질문에 노집사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각하.”

    노집사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 미술전을 통해,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 ❀ ❀

    서식스 공작이 미술전을 연다는 소식에, 랭커스터 사교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다.

    다들 기대감으로 두 눈을 빛냈다.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 미술전을 여신다지요?”

    “공작께서 주최하시는 이런 행사는 꽤 드물지 않았나요?”

    “맞아요, 저는 벌써 기대가 돼서……!”

    서식스 공작이 미술전을 여는 이유는, ‘전도가 유망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해 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출품작들의 주제는 자유.

    원하는 자는 성별과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든 미술전에 작품을 낼 수 있으나, 그 수많은 작품 중 미술전 본심에 올라갈 수 있는 작품은 극소수라고.

    “서식스 공작 각하를 포함한 심사단이 직접 선별한다지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왕국 내 화가들은 모두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 눈이 뒤집혔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혜택이 어마어마하잖아요. 그 미술전 본심에 올라간 예술가들은, 공작 각하께서 직접 후원을 하신다니까요.”

    “서식스 공작 각하의 후원이라. 정말 어마어마한 기회 아닌가요?”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온통 서식스 공작의 미술전 이야기만 떠들어 댔다.

    “심지어 ‘서식스의 예술가’라는 이름까지 붙이셨잖아요.”

    “주최자이신 서식스 공작께서도, 이번 미술전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반증이겠죠?”

    하지만 반발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반발은, 기성 예술가들의 모임인 왕립예술협회에서 등장했다.

    “신분의 고하는 그렇다 칩시다, 어차피 평민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림을 출품하기도 어려울 테니까요.”

    “어찌어찌 그려서 출품한다 한들 미술전 본심에도 올라가지 못할 겁니다.”

    그런 오만한 발언을 시작으로,

    “하지만 어떻게 여자의 그림을 올릴 수가 있습니까?”

    “물론 레이디들도 그림을 배우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교양으로 익히는 정도 아닙니까.”

    “귀부인이라면 응당 가정을 지켜야 하고, 좋은 집안의 레이디라면 신부 수업을 받아서 현명한 안주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과연 화가로서 훌륭한 소양을 갖추고는 있는지 의문스럽군요.”

    기성 예술가들은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이번에는 서식스 공작께서 다소 무리하게 미술전을 진행시킨 감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가정을 돌보기에 바쁜 여자들이 어떻게 그림을 출품한다는 말입니까?”

    “차라리 아직 주목받지 못한 다른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더 주는 게 나을 텐데…….”

    그렇게 회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던 중.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운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이네스, 들었어?!”

    그는 바로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현재 이네스가 손수 차린 저녁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은촛대가 부드러운 빛을 드리우고, 갓 조리한 음식들이 따뜻한 김을 뿜어냈다.

    하지만 라이언은 음식에는 손조차 대지 않았다.

    그 대신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이네스를 바라볼 뿐.

    “서식스 공작이 미술전을 연다고 해. 이네스 당신도 들었지?”

    그 흥분된 목소리에,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던 이네스가 힐끔 시선을 들어 올렸다.

    “듣기야 했지. 그게 왜?”

    “그렇게 덤덤하게 굴 게 아니라는 것쯤은, 너도 알잖아?”

    라이언이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나 이네스는 무심한 얼굴로 라이언을 바라볼 뿐이었다.

    라이언은 잔뜩 몸이 달아서 재차 이네스를 채근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식스 공작이 직접 주최하는 미술전이야.”

    “그래서?”

    “아니, 그래서라니?!”

    발끈한 라이언이 언성을 높였다.

    “서식스 공작이 랭커스터의 예술계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는 당신도 잘 알잖아?”

    “알기야 알지.”

    이네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당신, 우리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기억 안 나?!”

    라이언이 왈칵 성을 냈다.

    “남편이 잘되어야 너도 잘되는 거라고 했잖아! 이번 미술전은 내가 더 잘될 기회라고!”

    “…….”

    이네스는 그저 기가 막혔다.

    고트 자작 대부인.

    라이언의 어머니이자, 현 고트 자작 가의 안주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버릇은.

    ‘내 아들이 잘되어야 너도 잘되는 거다, 알겠니?’

    한때는 그 말을 진실이라 믿고 살았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던 이네스는, 어른이 주는 알량한 애정에 무척 약했으니까.

    ‘그 모든 입바른 말은 결국 라이언을 위한 거였는데, 바보같이.’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치를 떨며, 이네스가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음식을 삼키며, 그와 함께 치받는 분노를 꾹꾹 되삼켰다.

    한편 라이언은 흡사 자신이 예술계 전체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양,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다만 특이하긴 해. 어째서 여자들에게도 출품 기회를 열어 주신 건지…….”

    “…….”

    “자고로 여자들이란 가정을 보살피는 게 행복이고 기쁨인데.”

    “…….”

    “아무래도 서식스 공작께서는 아직 미혼이셔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불평불만은 그야말로 끝없이 이어졌다.

    입맛이 뚝 떨어진 이네스가, 차라리 이쯤에서 식사를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때.

    “그래서 말인데, 이네스.”

    때마침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라이언이 이네스에게 말을 붙였다.

    “당신이 이번 출품작을 좀 그려 줘야겠어.”

    “…….”

    부탁도 아닌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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