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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2)화 (12/120)

12화

“멋진 예술가를 한 명 알게 되었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이네스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각하.”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이네스가 환하게 웃었다.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미소였다.

그 미소를 응시하던 에녹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고개를 갸웃하는 이네스에게, 에녹이 장난스럽게 말을 맺었다.

“백작부인께서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거,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런가요?”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그녀의 입술은 커다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게요. 여태껏 웃을 일이 너무 적었었는데…….”

이네스는 후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각하 덕택에 오랜만에 웃네요.”

그리고 에녹은.

“…….”

어쩐지 이쪽이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서.

그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 ❀ ❀

에녹은 이네스를 타운하우스의 정문까지 직접 바래다주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공작 각하께서도 편안한 밤 되세요.”

인사를 나눈 후, 마차에 막 오르려던 이네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깜빡했네요.”

“예?”

이네스는 가방을 뒤적이는가 싶더니, 손수건을 꺼내어 에녹에게 건넸다.

일전 신년 무도회에서 에녹이 빌려줬던 손수건이었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해사하게 웃어 보인 이네스가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창밖으로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함과 동시에,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에녹은 힐끔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손수건에서는 희미하게 향기가 떠돌고 있었다.

이네스 특유의 향기였다.

“…….”

한참 동안 손수건을 내려다보던 에녹은, 이내 피식 웃으며 손수건을 접어 품 안에 집어넣었다.

묘하게 유쾌한 기분이었다.

‘이번 거래는 무척 만족스럽군.’

아무래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애초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굉장히 매력적인 거래를 제안받았다.

사실 이네스가 대가로 제시한 ‘유명세’는, 이미 엘튼지의 입장에서는 차고도 넘치는 요소이기는 했다.

엘튼사는 왕국 굴지의 언론사였고, 독자층도 확고했으며, 자금 기반도 튼튼했으니까.

하지만 온실 안의 꽃처럼 곱게 지냈을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무척 흥미로웠다.

게다가.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은 정계에 몸을 담지 않았으니, 아마 알지 못하겠지만…….’

에녹이 이네스를 도움으로써 따로 얻게 되는 이득이 있었다.

그건 바로, 원치 않는 정계의 관심에게서 멀어지는 것.

현 국왕이자 에녹의 형인 에드워드는 선대 국왕의 적장자이자, 랭커스터 왕가의 완벽한 적통이었다.

하지만 그런 에드워드의 왕위가 위협받던 때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에녹이 아직 어린 소년이던 시절이었다.

‘에녹 왕자께서 비록 나이는 어리시지만 워낙에 출중하시니, 에드워드 왕자님의 왕세자 책봉은 조금 미루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에녹 왕자께서 조금 더 자라신 후에 결정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몇몇 귀족들이 똘똘 뭉쳐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에녹을 왕세자위에 올려 쥐락펴락하고 싶었는지, 혹은 랭커스터 왕가를 견제할 용도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였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 사이에서 어린 에녹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던 건 사실이었다.

에녹은 친애하는 형님의 왕위를 빼앗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저 때문에 분란이 일어나는 것도 싫었으니까.

다만 선대 국왕은 형제 사이를 걱정해서라도 에드워드를 왕으로 삼을 생각은 확고했고, 그렇게 문제는 봉합되는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귀족들은 끈질겼다.

최대한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려 해도, 자꾸만 시시때때로 에녹을 들쑤셔 놓고는 했다.

‘서식스 공작 각하, 이제 슬슬 정계에 입문하실 때도 되셨잖습니까?’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는 공작 각하를 항상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에녹을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하여 국왕을 견제하려 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에녹은 이네스를 도우려 결심한 것이었다.

‘랭커스터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 브라이어튼 백작가에서 이혼 소송이 진행되다.’

‘왕국 예술계의 떠오르는 신예인 브라이어튼 백작의 명성은 사실, 백작부인을 대리 화가로 세워 이루어낸 것이었다.’

그 자신이 언론인이었기에 더 잘 알았다.

저 화제들은 단숨에 국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자극적이었고.

엘튼지에서 저 화제들을 다루고, 에녹이 그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떻게든 에녹을 회유하려 드는 귀족들도 제풀에 사그라들 터였다.

다른 일에 열중하는 것만큼, 에녹이 정계에 관심이 없음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것도 없으니까.

그랬기에 에녹은 이미 이네스를 돕기로 마음을 결정한 참이었다.

거기다 한 가지의 사감을 더한다면…….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은…… 천재야.’

여태껏 예술계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고, 몇몇은 스스로 발굴하여 지원하기도 해 줬던 에녹이었다.

수많은 명장들의 그림을 봤고, 예술적인 소양을 길렀다.

나름대로 보는 눈도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여태껏 그런 에녹을 이토록이나 매혹시켰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 개인의 사정이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나, 그것보다도 에녹을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이유는.

‘백작의 그늘에 가려져, 그 천재성이 사장되는 걸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어.’

그 자체가 왕국의 예술계에도 큰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은…… 백작부인의 말이 사실인지를 먼저 알아보자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에녹이 다시 타운하우스 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과는 별개로, 에녹의 심장은.

새로운 천재를 만났다는 것에 대한 흥분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 ❀ ❀

늦은 저녁, 이네스는 브라이어튼의 타운하우스로 발을 들였다.

“오셨어요, 마님!”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이네스를 맞아들였다.

코트를 벗어 하녀에게 넘겨주며, 이네스가 무심결에 질문을 던졌다.

“라이언은?”

평생을 몸에 새겨진, 거의 버릇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하녀는 대번에 기가 죽었다.

“그…… 아직 오시지 않으셨어요.”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에, 이네스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애초에 돌아왔을 거라고 생각 안 했으니까.”

솔직히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인데, 하녀가 저런 표정을 지으니 조금 미안했다.

‘그나마 라이언이 매일 집을 비우니까, 나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어서 그건 좋네.’

그렇게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중.

이네스는 하녀가 안타까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마님…….”

“그보다 나 배고파. 저녁 식사는 뭐야?”

이네스가 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어 그렇게 묻자, 하녀도 얼른 표정을 고쳤다.

“아, 아직 식전이셨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주방에 소식을…….”

그런데 그때.

덜컹, 쿠당탕!

“배, 백작님?!”

누군가가 성대하게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렸다.

놀란 이네스와 하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술에 취한 라이언이 바닥에 널브러져 앉아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으…….”

고개를 마구 휘젓던 라이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네스를 올려다보았다.

“이네스?”

기가 막힌 시선으로 라이언을 내려다보던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이렇게까지 술에 취해 돌아다닐 시간은 아니지 않아?”

“아니,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럴 수도 있지……!”

라이언이 와락 언성을 높였다.

어찌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혀까지 잔뜩 꼬여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이네스가 성큼성큼 라이언 곁으로 다가갔다.

“일어나, 다른 사람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렇게 쏘아붙이던 이네스가 미간을 구겼다.

머리를 아찔하게 하는 짙은 술 냄새가 훅 풍겨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향수 냄새.’

여자의 향수 냄새였다.

코를 찌를 것 같은 술 냄새 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짙은 장미 향.

이네스는 입술을 깨물며 시종들에게 말을 붙였다.

“미안하지만 라이언을 침실로 옮겨 주겠어?”

“예, 마님.”

시종들 두엇이 달라붙은 후에야, 라이언을 둘러업을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이언의 진상짓은 그쯤에서 끝나지 않았는데.

“에잇, 이것 놔!”

술기운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라이언은, 발버둥을 치며 한참 행패를 부린 후에야 침실로 옮겨졌다.

머리가 쿡쿡 쑤시는 기분에, 이네스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정말 미안하군. 자네들을 볼 면목이 없어.”

“아닙니다, 마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대답하는 시종들은, 라이언이 몸부림치는 것을 말리느라 옷가지며 얼굴이 온통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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