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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1)화 (11/120)
  • 11화

    에녹은 이네스의 저 당당함이 묘하게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일은 확실히 알아보고 진행해야 하는 법.

    “일전에 제게 연필 소묘를 보여 주시기는 했으나, 그 손바닥만 한 그림으로는 화풍을 명확히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 조그만 소묘만으로도, 이네스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더 정확히는, 평소 브라이어튼 백작이 외부에 공개했던 습작 스케치와 선이 일치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에녹은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원했다.

    “마침 제가 브라이어튼 백작이 그린 그림들을 몇 가지 수집해 두었습니다. 정물화와 풍경화지요.”

    그림을 수집해 뒀다고?

    이네스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중 정물화를 한 점 내어드릴 테니, 그와 동일한 그림을 그려 주시지요.”

    비록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권유보다는 오히려 명령에 가까웠다.

    순간 이네스는 직감했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서식스 공작의 도움은 없던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을.

    “물론 보고 그린다 한들 완벽히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렵겠죠. 다만 화풍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설명을 덧붙인 에녹이 몸을 일으켰다.

    “그림을 그릴 물품들은 다른 방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함께 가시죠.”

    “좋아요.”

    이네스 또한 긴장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걷던 에녹이 마침 생각났다는 것처럼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아 참, 그전에 백작부인께서 미리 알아 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만약 백작께서도 그림에 대한 소양이 웬만큼 있으시다면, 이혼 소송이 지저분해질 수 있어요.”

    에녹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백작이 부부라서 화풍이 비슷해졌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거든요.”

    “그건…….”

    잠시 말끝을 흐리던 이네스가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선명한 비웃음이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십니까?”

    “왜냐하면 라이언의 조잡한 그림을 감히 제게 갖다 대는 것 자체가 저에 대한 모욕이니까요.”

    아주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라이언의 그림은 제 발뒤꿈치조차 따라오지 못해요.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군요.”

    다소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대답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에녹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기 좋군.’

    이네스의 자신만만한 얼굴은 꽤 보기 좋았다.

    ❀ ❀ ❀

    에녹이 이네스에게 안내한 곳은 채광이 잘 되는 널찍한 방 안이었다.

    넓은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함빡 들어왔고, 그 가운데에는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구겨진 테이블보와 그 위로 온통 흩어진 갖가지 과일들, 푸른 줄무늬가 들어간 도자기 물병까지.

    그 모습이 이네스에게는 모조리 익숙했다.

    “여긴…….”

    진녹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물건들은 이네스가 예전에 그렸던 정물화 속 소품과 거의 동일했으므로.

    햇빛이 환하게 흘러들어 오는 모습까지 모두, 이네스가 그림을 그렸던 아틀리에의 풍경과 같았다.

    ‘그 아틀리에도, 저 정물들을 그린 그림도…… 오로지 라이언을 위해서 준비한 거였는데.’

    입 안에 쓴맛이 가득 고였다.

    이네스는 애써 괜찮은 척 표정을 정돈하며 에녹을 돌아보았다.

    “어째 저 물건들이 무척 익숙한데, 공작 각하께서 ‘물병과 과일이 있는 정물’을 구매하셨던 건가요?”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힐끗 곁눈질로 한쪽을 가리켰다.

    “또한 말씀드렸던 그림은 저기에 있습니다.”

    무심결에 그쪽을 돌아본 이네스는, 부드럽게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저 그림을 공작 각하의 타운하우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특이하게 수채화로 그려진 정물화였다.

    빛이 들어오는 곳은 과감하게 흰 종이로 남기고, 다른 부분들은 물을 많이 사용하여 투명한 느낌이 나도록 채색했다.

    “그렇습니까? 전 처음 봤을 때부터 저 그림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요. 꽤나 독특한 화풍이었거든요.”

    에녹이 물끄러미 정물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왕국에서는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려서 질감도 함께 표현하는 유화가 주류죠. 한데, 백작부인께서는 특이하게도 외국에서 전래된 수채화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하시더군요.”

    원래 서식스 공작께서 이렇게 말이 많으신 분이었던가?

    이네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한편 에녹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흰 물감을 섞어 물감의 농도 조절을 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물로만 색채를 조절하시지요? 그 투명한 색감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어쩐지 공작 각하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뜬 것처럼 들리는데, 혹시 내 착각인가?

    이네스가 의아한 얼굴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에녹이 다소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아, 부끄러워하신다.’

    이네스는 최대한 모르는 척해 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

    “풋.”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에녹이 뚱하니 입을 열었다.

    “그, 제가 다소 흥분한 건 인정하겠습니다만. 그렇게 웃으시면 부끄럽습니다.”

    “아, 죄송해요. 일부러 공작 각하를 민망하게 하려 함은 아니었어요.”

    크흠, 이네스는 짧게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의자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설명을 잇는다.

    “사실 수채화 쪽은 왕국에서 많이 낯선 기법이기는 하죠. 저도 부모님이 아니었으면 접하지 못했을 거예요.”

    “부모님이라면, 전대 브라이어튼 백작 부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이네스는 그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께서는 젊었을 적 여행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는데, 그때 처음으로 수채화에 대해 접하셨다고 해요.”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네.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는 하셨는데, 저도 그 취향을 물려받은 셈이죠.”

    하얀 손이 의자에 걸려 있던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능숙하게 앞치마 매듭을 지은 후, 자리에 앉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한참을 붓을 놓고 지내다가, 라이언과 결혼하며 다시 그림에 매진하게 됐어요. 라이언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네스는 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길게 했네요.”

    다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네스가, 잘 깎인 연필을 집어 들었다.

    순간 에녹은 조금 놀랐다.

    이네스의 입술에 걸렸던 가냘픈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이네스는 허리를 곧게 펴고, 하얀 도화지를 똑바로 응시하며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화지에 연필심이 스치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울렸다.

    ‘대단하군.’

    에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의 이네스는 아예 주변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그림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하고 있었다.

    옅은 선과 흐린 명암으로 스케치를 끝낸 이네스가 팔레트에 물감을 쭉 짜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양, 확고하게 붓을 움직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름

    에녹은 팔짱을 낀 채, 이네스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두 눈에 빠짐없이 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네스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황홀하군.’

    그런 감탄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러던 중.

    “세상에.”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이네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각하, 계속 뒤에 서 계셨던 거예요?”

    이네스는 뒤를 돌아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에녹은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선 채 이네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에녹의 얼굴 위로, 붉은빛이 빗겨 내렸다.

    황혼이었다.

    벌써 해가 지고 있다는 소리다.

    “지금 얼마나 시간이 지났죠? 이런…….”

    내가 아침부터 방문했던 것을 고려하면, 최소 열 시간 이상은 지났다는 소리인데.

    이네스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죠?”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시지요.”

    고개를 가로저은 에녹이 성큼성큼 정물화 앞으로 다가갔다.

    푸른 눈동자가 정물화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그림은 미완성이에요. 조금 손을 봐야만…….”

    “확실히 브라이어튼 백작의 화풍이 맞네요.”

    그림을 살피던 에녹이 단언했다.

    이네스가 바짝 얼어붙었다.

    “본인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완벽하게 같은 화풍으로 그릴 수 없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예술적 소양을 가졌다면, 아니 그러한 소양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의심하는 쪽이 머저리이겠군요.”

    툭 말을 뱉은 에녹이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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