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건 바로, 그녀들은 모두 남편과 사별한 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남편이 있는 여성들은 자신의 가주 직위를 남편에게 넘기는 게 당연시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가문을 상속받았던 쪽은 그녀들임에도.
‘그러니 일단 이혼부터 하겠다는 건 합리적이야.’
다만 랭커스터 사회 전반에 깔린 이혼을 무척 꺼려 하는 풍조상, ‘이혼을 도와 달라’며 찾아오기란 정말 어려웠을 텐데.
에녹을 홀로 찾아와 설득할 정도의 담대함을 갖추고 있다는 점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흥미롭군.’
에녹은 이네스에 대한 평가를 다소 상향시켰다.
그러나 에녹이 그녀의 말에 허를 찔렸다거나, 그녀를 높게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에녹은 아직 이네스의 대답을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다.
“흥미로운 대답입니다만, 그 대답만으로는 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단순히 삶과 그림을 되찾고 싶은 거라면, 굳이 이혼하기보다는 좀 더 온건한 방법이 있을 텐데요.”
“온건한 방법이라면…….”
“브라이어튼 백작과 대화를 해 보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네스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백작을 몰락시키는 것까지 감수하며 이혼을 원하는 거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아닙니까?”
“…….”
그 질문에 이네스는 처음으로 오랫동안 침묵했다.
잘근 입술을 깨무는가 싶더니, 고개를 숙여 에녹의 시선을 피했다.
무릎에 올려놓은 양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답을 듣는 것은 어려운가요. 이해는 합니다, 누구에게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다만 저는 저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과는 협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편은 저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요.”
바로 그때.
고개 숙인 이네스의 입술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고백에, 에녹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동시에 이네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한 명 있지요.”
“절친한 친구라면…….”
에녹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신년 무도회에서 이네스가 당돌한 제안을 한 이래로, 에녹 또한 이네스에 대해 웬만큼 정보를 모아 봤었다.
그를 통해 알게 된 바, 여태까지 이네스는 무척 협소한 인간관계만을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남편, 그리고 단 한 사람의 친구.
그랬기에 쉽사리 떠올릴 수 있었다.
“제이슨 남작 영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각하께서도 아시는군요.”
이네스가 흐리게 웃었다.
사실 모르는 편이 더 이상하다.
결혼한 이래로, 이네스는 평생 라이언과 샬럿만을 곁에 두고 살았으니까.
“제 남편은 제가 아닌 샬럿을 사랑하고 있어요.”
“…….”
얼음장 같은 침묵이 흘렀다.
대화하는 내내 여유를 잃지 않았던 에녹은, 드물게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이네스는 목 위로 치받는 감정을 꾹꾹 억눌렀다.
“샬럿 또한…… 마찬가지고요.”
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니.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이네스의 조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하지만 각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불륜 정도로는 이혼 소송을 진행하기 어려워요.”
“예, 아무래도 그렇겠죠.”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동의했다.
랭커스터 왕국은 사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가부장적이며 보수적인 국가였다.
나이가 찬 사람들은 무조건 결혼해야 하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명확히 정해 놓는 등.
‘불륜을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청구한다 한들, 재판관이 남편과 다시 잘 지내보라고 회유나 할 테지.’
에녹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물론 사회적으로 불륜 자체가 지탄받는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그뿐.
부인이 포용력 있게 남편을 받아 주라며 권유할 것이었다.
‘하긴, 현 국왕이신 내 형님만 해도…….’
매번 시기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에녹에게 결혼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에녹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때마침 감정을 갈무리한 이네스가 냉정한 얼굴로 에녹을 마주 보았다.
“다만 이 사실을 그대로 묻어 두려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언제 터트리시려는 겁니까?”
“나중에 제 이혼이 마무리된 후에 후속 기사로 내보내려고 해요.”
그 계획적인 대답에, 에녹은 내심 조금 놀랐다.
적어도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은 감정에 휩쓸려 그 자신을 찾아온 건 아닌 것 같다.
에녹이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이혼이 끝난 후 후속 기사를 내어 백작에 대한 추문을 부채질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이네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 혼자서만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은 없어.’
샬럿 또한 이네스를 기만하였으니, 마땅히 두 사람 모두 대가를 치러야 함이 옳았다.
‘샬럿의 오랜 꿈은 좋은 혼사를 찾아 신분 상승을 이루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추문은 훌륭한 복수가 될 것이다.
“제 남편의 작품이 모조리 거짓이라는 것과, 지저분한 사생활에 대한 후속 기사까지 엘튼지의 단독 독점으로 나간다면.”
이네스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되물었다.
“독자들의 상당한 호기심을 끌 것 같은데. 저의 생각이 틀렸나요?”
“……백작부인의 말씀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부정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언론사의 사주로 재직했던 경험이 에녹 자신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 기사들을 연속으로 터뜨리기만 하면, 분명 엘튼지의 판매 부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잠시 말을 고르던 에녹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만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저는 당신이 걱정됩니다.”
나를?
이네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추문을 엘튼지에서 보도하는 그 순간, 백작과 제이슨 남작은 물론이고 백작부인까지 호사가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될 겁니다.”
“……각하.”
“제 입으로 이렇게까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엘튼지는 왕국 신민의 8할 이상이 구독하고 있는 대형 신문이죠. 영향력 또한 어마어마합니다.”
평소 말수가 적던 에녹은 드물게 길게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네스가 염려스럽다는 소리다.
“백작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더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사주의 입장으로서는 이 기사가 무척 탐이 나기도 하고요. 하지만…….”
에녹은 그렇게, 한숨과 함께 말을 맺었다.
“마음을 결정하시기 전에, 스스로가 입을 상처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고려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네스는 조금 먹먹해졌다.
남편도, 절친한 친구도, 단 한 번도 나를 걱정해 준 적 없었는데.
과거로 회귀한 후에야 마주한 이 남자만이…… 나를 걱정해 주지 않는가.
‘정말 우습네.’
입 안의 보드라운 살을 짓씹던 이네스가, 단단한 시선으로 에녹을 마주 보았다.
“그래도 하고 싶어요.”
“백작부인.”
“물론 각하의 입장에서는 제가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어요. 제 살 파먹기일 수도 있다는 것쯤은 저도…….”
“아뇨, 그럴 리가요.”
중언부언 이어지는 이네스의 말을 가로막으며, 에녹은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인이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 뭐라고?
이네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백작부인께서 제게 거짓을 말씀하신 게 아니라면, 백작부인께서는 그저 피해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일 따름이었다.
“피해자가 어떤 형태로 복수하고 싶든 그건 피해자의 마음이죠. 제가 더 왈가왈부할 문제도 아니고요.”
그렇게 대답한 에녹이 사무적인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어쨌든 백작부인께서 기사를 내시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신 거죠?”
“네, 맞습니다.”
이네스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백작부인께서 정말로 피해자인지, 아니면 백작과 제이슨 남작 영애가 무고한지는 교차 검증을 해 봐야 합니다.”
어느새 에녹은 냉정한 언론사의 사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 브라이어튼 백작과 제이슨 남작 영애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에녹이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엘튼지는 확실한 사실만을 실으니까요. 일단 두 사람이 불륜 관계인지에 대해서 확인해 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네, 저도 그편이 좋을 것 같네요. 납득하실 만큼 조사해 주세요.”
“좋아요. 그러면 이제 백작의 사생활은 이쯤에서 접어 두고, 가장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이야기해야겠군요.”
그렇게 운을 뗀 에녹이 이네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브라이어튼 백작의 이름으로 발표된 그림들은, 사실 모두 백작부인께서 그리셨다는 것 말입니다.”
“…….”
이네스는 에녹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아무것도 꿇릴 것이 없다는 양, 똑바로 마주 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