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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9)화 (9/120)
  • 9화

    ❀ ❀ ❀

    신년 무도회 날, 라이언은 당연하게 외박을 했다.

    평소라면 가슴을 졸였을 이네스는, 이번에는 화를 내거나 라이언을 찾지 않았다.

    ‘뭐, 이럴 줄 알았지.’

    그냥 그렇게 납득했을 뿐이다.

    그 후 이네스는 측근 하녀인 메리를 불러들였다.

    “메리.”

    “네, 마님.”

    “아침에 엘튼지가 배달되면, 무조건 내게 먼저 갖다 주렴.”

    다소 뜬금없는 명령에 메리는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마님.”

    그렇게 메리를 돌려보낸 이네스는,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이제 희망은 서식스 공작뿐이야.’

    어떻게든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되찾을 거야.

    내 인생, 내 작품. 모두.

    진녹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 ❀ ❀

    며칠 후.

    버릇처럼 엘튼지의 광고면을 펼쳐보던 이네스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흘 전 밤, 단둘이 나누었던 환담을 아직 잊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주셨던 선물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선물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좋으니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S로부터.>

    광고면 한구석에 조그맣게 실려 있는 글.

    이네스는 광고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사흘 전 밤이라면 분명…….’

    왕실 주최 신년 무도회가 열렸던 그날이었다.

    서식스 공작과 단둘이 만나, 여태껏 라이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그림에 대한 비밀을 폭로했던 날.

    게다가 S라는 이 이니셜은…….

    ‘서식스 공작이야!’

    어떤 식으로 라이언의 눈을 피해 연락을 주려나 했는데, 설마하니 광고면에 광고를 실을 줄은 몰랐다.

    헛웃음을 짓던 이네스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가볍게 화장을 하고 있자니, 메리가 어리둥절해져서 질문을 던졌다.

    “마님, 외출하시려고요?”

    “응.”

    이네스가 거울 너머로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하녀가 단박에 환한 얼굴이 되어 이네스에게 달라붙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가끔 외출도 하시고, 기분 전환도 하시고 그러셔요.”

    “고마워, 메리.”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제, 드디어.

    인생을 바꾸러 갈 시간이었다.

    ❀ ❀ ❀

    에녹은 응접실에 앉아 골똘히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의 앞에는 오늘 아침에 발행한 엘튼지의 광고면이 펼쳐져 있었다.

    ‘광고면을 주목하라고 말해 뒀으니, 아마 금방 알아보고 찾아오겠지.’

    총명하게 빛나던 진녹색 눈동자가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지금 에녹을 움직이는 건 호기심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라 하면, 왕국에서도 상당히 지체가 높은 귀부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홀로 에녹을 찾아와, 잔뜩 긴장한 얼굴로도 제 의견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그 태도에 서린 절박함도 절박함이었거니와, 무엇보다도.

    ‘브라이어튼 백작이…… 정말로 백작부인을 대리 화가로 두고 있는 거라면.’

    순간 에녹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이런 폐단이 이전부터 오랫동안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적인 왕국의 분위기상, 여성과 평민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다만 여태까지 그런 일들은 단 한 번도 공론화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모두가 여성은 예술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꽤 진보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하는 에녹조차도, 이네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여성을 대리화가로 삼는다’라는 상상 자체를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에녹은 이네스의 말을 들었고, 그런 폐단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건 왕국, 더 나아가 전 대륙 예술계에 대한 기만이지.’

    에녹은 그런 폐단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공작 각하.”

    오랫동안 에녹을 모셔 왔던 노집사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째 생각하자마자 바로 이렇게 찾아오는지.

    헛웃음을 지은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모시도록.”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이네스가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간 안녕하셨나요, 서식스 공작 각하.”

    “예, 저는 잘 지냈습니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께서는?”

    “각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택에 잘 지냈습니다.”

    이네스가 방긋 웃어 보였다.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에녹이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이네스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탐색하듯 마주 보았다.

    그리하여 에녹이 깨달은 점은.

    ‘확실히 기가 죽거나, 무언가 불편한 기색은 없어 보이는군.’

    오히려 이네스는 에녹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웬만한 귀족들도 에녹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는 하는데, 이런 반응은 신선했다.

    ‘재밌네.’

    픽 웃은 에녹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단 이번 일을 제게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 치하하고 싶군요.”

    “그 말씀은…….”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순간 진녹색 눈동자에 선명한 이채가 어렸다.

    그 빛이 무슨 뜻인지는 에녹도 알았다.

    희망이었다.

    “다만 백작부인께서 말씀하셨던 부분에 대해, 좀 더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이리 연락을 드렸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다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에녹이 느긋하게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사실 브라이어튼 백작께서는 그렇게 이름 높은 화가인데도 불구하고, 실제 백작께서 작업하시는 모습을 목격한 자는 하나도 없었거든요.”

    호수처럼 짙푸른 눈동자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가늘어졌다.

    “물론 자신의 작업 과정을 굳이 드러내 보여야 할 이유는 없지만, 또 그렇다 하여 감춰야 할 이유도 없는데 말이죠.”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확실히 백작부인께서 대신 그림을 그린 거라면,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작업 과정을 노출시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납득이 됩니다만.”

    그렇게 운을 뗀 에녹이, 시선을 들어 이네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브라이어튼 백작이 미심쩍게 행동한다 한들, 그것이 제가 백작부인께 협조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이번 일을 알게 된 이상, 에녹은 왕국 예술계를 위해서라도 브라이어튼 백작을 어떻게든 제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단 정말로 브라이어튼 백작이, 백작부인을 대리 화가로 세웠는지를 확인해 봐야 할뿐더러.

    ‘그 제재가 굳이 백작부인을 돕는 방향일 필요는 없으니까.’

    에녹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가 어째서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을 도와드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제게 설명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네스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웬만한 귀족들은 서식스 공작 앞에서는 맥도 추지 못한다더니.’

    실제로 에녹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 압박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겨 내야 해.’

    단단히 마음을 다진 이네스가, 에녹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일단 대리 화가를 세우는 것 자체가 왕국의 예술계를 좀먹는 행위라는 것쯤은, 공작 각하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에녹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그에 힘을 얻은 이네스가,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니 대리 화가 문제는 근절해야 마땅해요. 다만 이건 원론적이며 도덕적인 이유고.”

    순간 진녹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또한 서식스 공작께서 이번 일을 통해 얻으실 이득도 있을 거예요.”

    “……제가 얻을 이득이라면, 어떤?”

    “서식스 공작께서는 엘튼사의 사주이시자 언론인이시지요. 그러니 제가 흥미로운 기삿감을 제공해 드리면 어떨까 싶어요.”

    그녀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가 남편을 무너뜨리는 일련의 과정을, 단독 독점으로 보도할 권리를 드리는 건 어떨까요?”

    순간 에녹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저 순진한 귀부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좋은 의미로 상당히 노회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것과는 별개로.

    “흠, 단독 독점으로 보도할 권리라.”

    이네스의 대답을 곱씹던 에녹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신의 손이라 불리는 화가의 추락이라면…… 엘튼지에서도 다룰 만한 추문이기는 합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내어놓는 것과는 달리, 아직 에녹의 눈동자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 추문을 통해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얻는 건 뭡니까?”

    다행스럽게도 그 질문에는 이미 대답할 말이 정해져 있었다.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제 삶이요.”

    그 대답에, 에녹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이채가 서렸다.

    “더 이상 남편의 그림자 속에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네스가 결연하게 말을 맺었다.

    “제 인생, 제 작품, 제 작위까지. 모든 것을 되찾고 싶어요.”

    “…….”

    에녹은 잠시 침묵했다.

    제 삶을 되찾고 싶다, 라.

    ‘그러고 보면…… 한 번도 저런 방향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랭커스터 왕국은 원칙적으로 여성이 작위를 이을 수 있는 국가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원칙이 얼마나 허울 좋은 것인지는, 왕국 내 귀족 가문들의 가주들 중 여성이 얼마나 있는지만 생각해 봐도 명확했다.

    ‘여성 가주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지.’

    그나마도 그녀들은 나이가 무척 지긋하고 가문 내에서 가장 배분이 높았으며,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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