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8)화 (8/120)

8화

“공작께서는 단 한 번이라도, 제 남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신가요?”

이네스의 물음에, 정곡을 찔린 에녹은 잠시 침묵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었지.’

어렸을 적 그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던 행적.

그리고 결혼을 기점으로 갑자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까지.

이네스가 대리로 그림을 그려 주었다면 모조리 퍼즐이 들어맞는다.

한편 이네스는 고민에 빠져 있는 에녹을 살짝 곁눈질했다.

‘좋아, 이 정도면 됐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의심은 이미 충분히 불러일으켰으니, 이제는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할 때였다.

‘서식스 공작은 합리적인 성격이야.’

그러니 이것저것 따지며 생각할수록, 더더욱 현 상황이 수상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될 터였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이네스가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그 그림은 드릴 테니, 한 번 면밀히 살펴보세요.”

그러고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예를 갖추었다.

“그럼 추후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식스 공작 각하.”

그 말을 끝으로, 이네스가 가볍게 뒤돌아섰다.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녹이 이네스를 불러 세웠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네?”

“받으십시오.”

에녹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이네스가 놀란 얼굴을 했다.

“이건…….”

귀퉁이에 섬세하게 수가 놓인 고급스러운 손수건이었다.

에녹이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손에 흑연이 묻었습니다. 닦고 들어가세요.”

“…….”

이네스는 순간 울컥했다.

여태껏 그녀와 아무런 관련조차 없었던 에녹조차도, 그녀의 손에 흑연이 묻었음을 눈치채고 손수건을 건네는데.

이네스의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던 라이언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런 배려를 해 준 적이 없었어.’

마음이 온통 어지러워졌다.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던 이네스가 애써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아 참,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네?”

이네스가 의아한 얼굴로 에녹을 마주 보았다.

에녹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백작부인께서는 엘튼지를 구독하여 보십니까?”

다소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두 눈을 깜빡이던 이네스가 얼른 대답했다.

“예, 매일 보고 있습니다만.”

“잘됐군요.”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엘튼지의 광고면을 유심히 살펴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 예에…….”

저게 무슨 소리일까?

이네스는 어리둥절했으나, 그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단둘이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기라도 한다면, 다소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다.

“그럼 공작 각하, 저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감사합니다.”

양해를 구한 이네스가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한편 에녹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방금 그 표정.’

자신이 손수건을 건넸을 적, 두 눈을 내리깔며 감사 인사를 하던 이네스의 표정.

어쩐지 무척 서글퍼 보였었는데.

‘어째서 백작부인께서는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평소라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사소한 표정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서일까, 에녹은 멀어지는 이네스에게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 ❀

이네스가 연회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라이언이 득달같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이네스, 지금 나랑 장난쳐?”

주변을 휙휙 살펴본 라이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마구 짜증을 냈다.

“이 내가 말이야, 파트너가 없어서 멍청하게 연회장에 서 있어야겠어?”

“…….”

이네스는 물끄러미 그런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꽤 긴 시간 동안 사라졌음에도, 라이언은 오로지 자신의 체면만을 고려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라이언의 입장이었더라면, 라이언이 왜 자리를 비웠는지부터 물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먼저 라이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녀 보고, 그의 안위부터 걱정했을 텐데…….

그들이 서로에게 가진 감정의 크기가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던 이네스가 들으란 듯이 대답했다.

“머리가 아파서 잠시 바람을 좀 쐬고 왔어.”

혹시나 걱정해 줄까 싶어 그렇게 말해 봤지만.

“머리가 아파? 하, 엄살은…….”

라이언은 기가 막힌다는 것처럼 혀를 찰 따름이었다.

‘그래, 당신에게 기대한 내가 멍청했지.’

짧게 조소한 이네스가 라이언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왜 파트너가 없어?”

“뭐?”

“아까 첫 춤도 샬럿과 췄잖아. 그러니 당신은 당연히 샬럿과 있을 줄 알았는데.”

“…….”

정곡을 찔린 라이언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샬럿이 이네스의 친구라지만, 라이언의 법적인 아내는 엄연히 이네스였다.

그럼에도 라이언은 언제나 샬럿에게 먼저 춤을 권했다.

이네스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는 언제나 샬럿이라는 파트너가 있으니까, 내가 어딜 가든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지.”

“……아니, 그건!”

마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은 기분에, 라이언이 발끈했다.

실은 이네스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전, 이네스가 사라지고도 한참 후.

라이언과 샬럿은 이네스의 행방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몇 곡이나 함께 춤을 추었었다.

하지만 그들의 귀를 잡아채던 쑥덕거림이 있었으니.

‘그러고 보면 브라이어튼 백작부인께서는 아까 전부터 자리에 안 계시네요.’

‘백작께서는…… 아, 제이슨 남작 영애와 함께 계시는군요.’

‘브라이어튼 백작 부부께서는 사이가 별로 안 좋으신 걸까요? 보면 매번 따로 계시는 것 같아서요.’

그 쑥덕거림을 들은 후에야, 샬럿은 다소 머쓱한 얼굴로 라이언 곁에서 떨어졌다.

‘백작님,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 그러시지요.’

그렇게 샬럿과 헤어진 후에야 라이언은 이네스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이네스는 자리에 없었고, 그렇게 주위의 눈총에 괜히 뜨끔해지던 차.

이네스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나 이만 돌아가려고, 피곤해.”

때마침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라이언은 대놓고 아쉬운 얼굴을 했다.

“아니, 벌써?”

“…….”

이네스는 묘한 얼굴로 라이언을 응시했다.

머리가 아프다고도 했고, 피곤하니 집에서 쉬어야겠다고 더 말을 했는데도.

‘역시 걱정해 주지 않는구나.’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너무 그렇게 아쉬워할 필요 없어. 당신 혼자서 조금 더 파티를 즐기다 오면 되잖아?”

“그, 그럴까?”

“무려 왕실에서 주최하는 중요한 파티라니, 내가 이해해야지.”

라이언이 어깨를 움찔 굳혔다.

이네스의 목소리에 박힌 가시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 먼저 집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라이언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사회생활이잖아. 당신이 좀 이해해.”

“……그래.”

마지막으로 라이언을 일별한 이네스가 곧장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이 상당히 냉랭해 보였기에, 라이언은 조금 켕기기는 했으나.

‘뭐, 이네스가 화내 봤자 신경 쓸 필요 있나?’

이내 라이언은 속으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들어가는 길에 꽃이라도 한 송이 사 들고 가면 되겠지.’

그렇게 라이언은 즐거운 걸음으로 활기찬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갔다.

❀ ❀ ❀

타운하우스로 돌아가는 마차 안.

이네스는 가슴을 부여잡고 짧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혼자 있게 되자, 뒤늦게 긴장이 탁 풀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서식스 공작 각하와 단둘이 대화하다니.’

물론 그녀의 이혼, 그리고 그녀가 여태껏 그려 왔던 그림들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서식스 공작의 도움이 절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정말로 공작 각하께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라이언과 샬럿은 매번 이네스에게 입이 닳도록 말했었다.

‘너는 그래서 안 돼.’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그냥 얌전히 있어.’

그 단정적이고 조롱 가득한 목소리.

하지만 이네스는 스스로의 힘으로 서식스 공작을 설득해 냈다.

그 증거로, 이 손수건이 있지 않은가.

“…….”

이네스는 에녹이 준 손수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흑연이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는 하얀 손수건.

비록 남들의 눈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테지만, 그녀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 물건이었다.

‘나도 할 수 있어.’

이네스가 용기를 냈음을.

자기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하여 첫발을 떼어 냈음을 증명하는 증거품.

‘……부디 서식스 공작께서 내 제안을 받아 주셔야 할 텐데.’

한참을 손수건을 응시하던 이네스가 손수건을 곱게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달리는 마차 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엉망으로 이지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엉망진창인 그녀의 마음 같아서.

“후우…….”

이네스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