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7)화 (7/120)

7화

“헉!”

깜짝 놀란 라이언이 뒤를 돌아보았다.

서식스 공작, 에녹 피츠로이 폰 랭커스터.

라이언이 어떻게든 말 한마디를 붙여 보고 싶어서 마음을 졸였던 그 남자가, 시큰둥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브라이어튼 백작이 발표했던 그림들이 꽤 괜찮아서, 인사라도 한 번 나누려고 찾아온 건데.”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이네스에게 잠시 닿았다가, 라이언에게로 향했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백작부인보다는 오히려 백작이 가문의 체면에 대해 좀 더 고려해야 할 것 같군요.”

“고, 공작 각하.”

“아무리 감정이 격해졌다고 해도 그렇지, 왕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에서 언성을 높이는 추태를 보이는 건…….”

에녹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체면에 하등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

라이언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동시에 에녹이 여상하게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제가 알기로는, 백작이 미술계에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시점은 백작부인과의 결혼 이후 아닙니까?”

순간 라이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백작께서 여태까지 보여 주신 눈부신 성취에는,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백작부인이 도와준 덕도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그건.”

“또한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아내를 그렇게 면박 주는 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을 맺은 에녹이 살짝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에녹은 그대로 몸을 물렸다.

다시 한번 사람들이 에녹을 둘러쌌다.

어떻게든 에녹에게 관심 한 자락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네스는 이채 서린 눈으로 멀어지는 에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노력을…… 알아주었어.’

여태껏 그 누구도 이네스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서 더욱 라이언에게 목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남편이 웃어 주는 것을 바라여 전전긍긍하던 시간.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신을 맞추고, 그의 취향을 고려하여, 삶 전체를 라이언에게 온전히 바쳤던 것까지 모두.

‘공작 각하께서는 알아주신 거야.’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져서, 이네스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처음으로 이네스의 존재를 알아준 사람.

그리고 지금 그녀는.

‘각하께 인정받고 싶어.’

한 사람의 화가로서, 그녀의 서명이 담긴 작품으로.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아니라, ‘이네스 브라이어튼’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 ❀ ❀

닫힌 유리문 너머로 경쾌한 왈츠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후우.”

무도회장에 딸린 발코니에 기대선 에녹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피곤하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티를 즐길 것만 같은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사실 에녹은 사람 많은 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이번 신년 무도회에 참석한 것도 국왕인 형의 신신당부가 있어서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미혼으로 살 생각이야? 너도 이제 결혼해서 정착해야지.’

‘아니, 전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고…….’

‘그래도 이번 무도회는 참석하도록 해. 혹시 알아? 네 마음에 드는 레이디가 있을지.’

그 잔소리를 이기지 못해 참석하기는 했으나, 한시바삐 공작저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에녹은 슬쩍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언제쯤 눈치껏 연회장에서 빠져도 될지, 시간을 가늠하던 그때.

“다시 뵙습니다, 서식스 공작 각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녹이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눈 쌓인 자작나무처럼 우아한 외양의 여인이, 에녹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에녹은 다소 놀란 낯을 했다.

이네스 브라이어튼.

브라이어튼 백작 가문은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 중 하나였기에, 에녹 또한 이네스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다.

이네스는 백작가의 하나뿐인 상속녀로, 한때 왕국 최고의 신붓감으로 불리던 여자였다.

라이언과 결혼한 이후로는 외부 활동조차 자제하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들었다.

다만 그녀의 특기할 점은.

‘백작부인과 결혼한 이후로, 백작이 떠오르는 신예 화가가 되었다는 거지.’

사실 저렇게 혜성처럼 등장하는 화가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보통 유명한 화가들은 어렸을 적부터 약간이라도 그림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어렸을 적에는 그림에 전혀 흥미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갑자기 수많은 미술전을 휩쓸며 천재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래서 에녹은 추측해 보았다.

‘백작부인과 결혼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할 필요 없이 그림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기에 그런 건가?’

물론 환경이 나아지면서 재능을 꽃피우는 예술가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고트 자작가가 다소 한미한 귀족가일지라도, 차남의 예술적 재능을 지원 못 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을 텐데…….

잠시 미심쩍은 얼굴이 되었던 에녹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백작부인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순간 에녹은 보았다.

갓 피어난 새싹처럼 연연하던 녹색 눈동자가 금세 날카로워지는 것을.

이네스가 곧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식스 공작께서는.”

잠시 말을 고르는 것 같던 그녀가, 이내 에녹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제 남편이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지 아시나요?”

“…….”

“그건.”

이네스는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두 손을 꼭 쥐었다.

장갑을 낀 손안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릴 수 없기에 그런 거예요.”

순간 에녹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네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나, 성공한 걸까?’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최대한 서식스 공작의 흥미를 끌 수 있는 화제를 제시하는 것.

‘적어도…… 내 말에 흥미는 느낄 거야.’

에녹은 예술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몇몇 예술가를 발굴하여 후원까지 할 정도였다.

또한 라이언은 그런 에녹이 주목하는 떠오르는 신예.

그런 라이언을 두고 ‘사실은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라고 선언했으니, 그 말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기는 할 터였다.

‘하지만 단순한 흥미로 끝날지, 아니면 내 손을 기꺼이 맞잡아 줄 거래로 진행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니까.’

이네스는 입 안이 바작바작 마르는 것을 느꼈다.

잠시의 침묵 끝에 에녹이 대답했다.

“그릴 수 없다, 라.”

짙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무슨 의미죠?”

“라이언의 이름으로 발표된 그림들은, 사실 그가 그린 게 아니라는 소리예요.”

이네스가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며 말을 이었다.

“라이언 대신 그림을 그려 준 진짜 화가가 있어요.”

“그 말,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럼요.”

고개를 끄덕인 이네스가 팔에 걸고 있는 가방을 뒤적였다.

무엇을 하고 있나 살펴봤더니, 이네스가 가방에서 꺼내 놓은 물건은.

‘메모지와 연필?’

에녹이 다소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이네스의 기이한 행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녀는 난간에 메모지를 깔더니, 바쁘게 연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연필이 사각사각 메모지 위를 스치는 소리가 한참을 울렸다.

그 후.

“보세요.”

이네스가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그 위에는 소묘로 에녹의 얼굴과 어깨까지 그려져 있었다.

비록 메모지 자체가 작아서 섬세하게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에녹의 얼굴이며 신체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선.’

스케치가 그려진 선 자체가 무척 눈에 익었다.

이네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에녹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브라이어튼 백작?”

“네.”

이네스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식스 공작께서도 아마 잘 아실 거예요. 초상화는 단기간에 화가의 유명세를 떨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말이에요.”

초상화.

화가에게 있어 여러모로 효과적인 작품 활동이었다.

아직 사진술은 그리 발전하지 않아, 신문 같은 데서만 간간이 흑백사진을 이용하는 실정.

이 상황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바로 초상화였다.

귀족들 사이의 혼담에서도 상대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초상화가 오갔고, 그 외로도 귀족들의 가정에는 가족 초상화 한 점쯤은 걸어 두고는 했다.

그리하여 초상화는 화가가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무엇보다도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빠르게 입소문을 탈 수 있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신예, 브라이어튼 백작은 단 한 번도 초상화를 그린 적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라이언에게 온갖 찬사를 보냈다.

천재의 괴벽, 귀족의 고고함.

돈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 무척 훌륭하다며, 사람들은 연이어 호평했지만.

‘사실 그게 아니지.’

이네스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릴 수 없었던 거야.’

초상화는 무조건 상대를 앞에 두고 그려야 했다.

그리고 초상화의 대상이, 초상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계속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라이언은 초상화를 그릴 수 없었다.

여태껏 그의 이름으로 출품됐던 그림들은 모두 이네스가 대신 그려 주었기 때문에.

초상화를 그리면 자신의 실력이 들통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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