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6)화 (6/120)
  • 6화

    라이언은 항상 이네스에게는 검소하라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제 몸에 걸치는 것은 모조리 최고급으로 맞췄다.

    남자는 바깥일을 많이 하니까, 보는 눈이 있어서 그렇다는 핑계였다.

    그리고 그런 차림의 라이언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샬럿이었지.’

    언제나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던 샬럿.

    이네스는 이를테면 꽃받침이었다.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있던 샬럿 곁에서, 이네스는 샬럿의 미모를 돋보이게 해 주는 엑스트라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 초라한 차림으로 나서면, 주변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겠어?”

    “의, 의심이라니?”

    “브라이어튼 백작이 어찌나 백작부인을 홀대하면, 저렇게나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걸까? ……라고 말이야.”

    정곡을 찔렸는지, 라이언은 빳빳하게 굳어졌다.

    사실 저 말은 이네스가 회귀 전에 실제로 들었던 말이었다.

    애초에 라이언이 브라이어튼 백작이 될 수 있었던 자체가, 이네스와 결혼을 했던 덕이었기에.

    이네스가 외부 출입을 삼가고 라이언의 내조에만 집중한 후에도, 그 소문은 꽤 끈질기게 라이언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었다.

    ‘백작부인의 얼굴을 본 지도 정말 오래되었는데…….’

    ‘백작이 백작부인을 홀대하다 못해, 집 안에만 머무르게 한다면서요?’

    뭐, 그 소문들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 불미스러운 소문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 옷차림에 조금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

    둥글게 눈매를 휜 이네스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건 모두 당신을 위해서야. 알지?”

    “……그래.”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라이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순진한 이네스잖은가.

    그녀는 절대로 다른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네스는 나를 사랑하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맑은 진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라이언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네스가 방긋 웃었다.

    “오늘 무도회는 무척 중요한 자리라며? 가자, 이러다 늦겠어.”

    ❀ ❀ ❀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보석처럼 연회장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산처럼 쌓인 샴페인 잔 위로 황금색 샴페인이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은은하게 깔리는 우아한 음악이 귓전을 간질이고, 송이송이 꽃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눈다.

    그중 귀부인들 몇몇이 이네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브라이어튼 백작부인.”

    예사롭지 않은 시선으로 이네스를 응시하고는, 빙그레 눈웃음을 짓는다.

    “오늘 무척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이네스는 그림처럼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아마 저 말의 속뜻은, ‘평소 그렇게 초라하게 입고 다니더니 웬일이지?’ 정도가 되겠다.

    ‘여태껏 암암리에 내 소문이 얼마나 났으면…….’

    앞에서까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뒤에서는 여태껏 얼마나 무시당하고 있었을까.

    이네스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되삼키던 차.

    “서식스 공작께서 입장하십니다!”

    왕실 시종이 쩌렁쩌렁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순금을 녹여 뽑아낸 것처럼 선명한 금발, 그리고 바다처럼 푸르른 눈동자.

    말 그대로 눈이 부시게 화려한 남자였다.

    그저 무도회장에 입장한 것뿐인데도 그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이네스는 서식스 공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드디어 만났어.’

    목 끝까지 치받는 긴장감을 억누르려, 이네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 이혼, 내 작품, 내 삶.’

    그 모든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한편 주변은 벌집을 쑤신 벌떼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세상에, 서식스 공작 각하께서 오셨네요?”

    “놀라워요, 이런 파티는 거의 참석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아는데.”

    “오늘은 왕실에서 주최하는 신년 무도회여서 오셨나 봐요. 아무래도 국왕 폐하의 하나뿐인 동생이시니까요.”

    뒤이어 국왕과 왕비가 입장하고, 신년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단연 서식스 공작이었다.

    “공작 각하, 잘 지내셨습니까?”

    “이번에 엘튼지에서 발간한 특집 기사는 잘 보았습니다.”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서식스 공작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서식스 공작이야!”

    때마침 이네스 곁으로 다가온 라이언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작 각하의 후원만 받을 수 있으면, 내 명성은 더더욱 높아질 수 있을 거야!”

    하기야 맞는 말이었다.

    서식스 공작은 천재만을 골라 지원하기로 이름 높은 사람이었으니까.

    공작이 지원하는 예술가는 모두 제국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치렀다.

    그리하여 붙은 별명이 ‘황금을 보는 신사.’

    “어떻게든 공작 각하께 말을 붙여 봐야 하는데……!”

    라이언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람들이 거의 장벽처럼 공작 곁을 둘러싸고 있었기에, 도무지 공작 곁으로 다가갈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이네스?”

    누군가가 이네스를 불렀다.

    미미하게 불쾌감이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붉은 장미 꽃다발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샬럿이 서 있었다.

    “너 옷차림이 그게 뭐야?”

    이네스를 위아래로 뜯어본 샬럿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내가 말했잖아, 넌 이렇게 화려하게 입는 것보다 수수한 차림을 하는 편이 훨씬 예쁘다고.”

    “글쎄, 남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보다는 내 마음에 드는 편이 더 좋아서.”

    이네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샬럿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반응은 도대체 뭐야?’

    평소의 이네스였더라면 분명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이상해?’

    ‘음…… 좀 안 어울리긴 하는데.’

    일단 그렇게 운을 떼어 두고, 잠시 고민하는 척 시간을 둔 후에.

    ‘화장이라도 고치면 좀 나을 것 같아. 같이 휴게실로 갈까?’

    그렇게 이네스를 꼬여 내어 휴게실로 향하면 그만이었다.

    그 후, 최대한 촌스럽게 화장을 고쳐 주고 다시 무도회장으로 향한다.

    어쨌든 이네스는 명문가 중 하나인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었기에, 그녀에게 예의상 인사를 건네려는 신사들은 꽤 있었다.

    그럼 이네스 곁에 서서, 이네스와 대비되는 제 화려한 미모를 부각시키며 기다리다가.

    이네스와 인사를 나눈 신사들이 줄줄이 춤 신청을 하면,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고르고는 했었는데…….

    “하지만 이네스, 그건…….”

    “그보다 샬럿, 나 오늘 위컴 남작부인께 아름답다는 칭찬을 들었거든.”

    이네스는 수줍은 척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칭찬을 받아 본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듣게 되어서 정말 기뻐.”

    “……그, 그래?”

    “내 취향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가 봐. 그렇지?”

    “…….”

    샬럿은 차마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만약 여기서 ‘네 취향은 별로야’라고 말한다면, 이네스를 칭찬한 위컴 남작부인의 취향이 별로라는 말이 되었으므로.

    “예전에 샬럿 네 말대로 치장할 때에는, 한 번도 그런 칭찬을 들어 본 적 없었는데.”

    이네스가 해사하게 웃었다.

    “남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취향대로 치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이네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동시에 라이언이 득달같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샬럿은 당신을 위해서 말해 준 거잖아.”

    “…….”

    이네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샬럿의 남자 문제로 말다툼을 한 것과는 별개로, 두 사람의 끈끈한 애정은 아직까지 현상 유지되고 있나 보다.

    이렇게까지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

    “제이슨 영애만큼 당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라이언.”

    “꼭 그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줘야겠어? 응?”

    이네스는 기가 막혔다.

    ‘적어도 라이언이 내 자존심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 것 같네.’

    애초에 이네스는 면박을 준 적이 없었다.

    ‘네 옷차림이 별로다’라는 말에, ‘내 취향대로 입고 싶다’라고 대응한 것이 어떻게 면박이라고 할 수 있나.

    오히려 상대의 옷차림에 대해 제멋대로 왈가왈부한다는 점에서, 샬럿이 더 무례하면 무례하지 않은가.

    하지만 라이언의 언성은 계속해서 높아질 따름이었다.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체면이 있지, 그렇게 치졸하게 굴어서야 되겠어?”

    어느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라이언은 그 시선을 느끼며, 짐짓 어깨를 쭉 폈다.

    ‘이건 기회야.’

    최근 이네스의 행동이 묘하게 거슬릴 때가 있었다.

    예전처럼 순종적인 아내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기를 꺾어 놓는 게 불가피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앞에서, 이네스가 내게 쩔쩔매며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 줘야만 해.’

    그렇지 않아도 라이언이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작위까지 이은 것에 대한 뒷말이 많았었다.

    최근에는 라이언이 미술 쪽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기에, 사람들도 예전보다는 다소 말을 조심하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이네스를 밟아 두지 않으면 언제 기어오를지 몰라.’

    라이언은 괜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렇게 행동할 때마다 내가 더 창피……!”

    그런데 그때.

    “이런.”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귀에 착 감기는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좋지 못한 때에 찾아온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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