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5)화 (5/120)

5화

“하지만 이네스, 우린 친구…….”

“친구일수록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지.”

이네스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랭커스터 왕국은 친지나 연인이 아닌 이상, 친밀한 신체 접촉은 지양하는 분위기였으므로.

샬럿의 행동은 명백한 무례가 맞았다.

멍해진 샬럿을 향해 이네스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 부탁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

“어, 어째서?”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지만, 부부 동반 마차에 합석한다니.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마 샬럿이 저런 부탁을 한다는 건, 브라이어튼 백작가와 이만큼 친밀하다고 외부에 과시하기 위함일 테고.

또한.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겠지.’

이네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은 사라진 미래에서, 그에 대한 뒷말도 상당히 들었었다.

그때는 샬럿과 라이언의 불륜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그저 순수한 우정일 뿐이다’라며 두 사람을 감싸기에 바빴지만…….

‘더 이상 내 명예가 실추되는 꼴은 못 봐 줘.’

한편 샬럿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이네스를 보며, 라이언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아니, 왜 그렇게 매몰차게 굴어?”

“매몰차다니, 당신이야말로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라이언이 타박했으나, 이네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을 되받아쳤다.

“오히려 샬럿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거절하는 게 맞지 않아?”

“뭐라고?”

“나야 샬럿과 절친한 사이이고, 라이언 당신도 샬럿과 오랜 친분을 나누었으니 상관없다 쳐도.”

이네스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샬럿은 남들의 시선을 조금 신경 써야 할 입장이잖아?”

“아니, 남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해?”

“중요하지. 샬럿은 아직 미혼인 데다가, 결혼에도 관심이 무척 많으니까.”

이네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방긋 눈웃음을 지었다.

“나한테도 몇 번이나 신사분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었는걸.”

“이, 이네스. 그게…….”

샬럿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라이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가슴이 뜨끔하겠지.’

이네스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라이언 앞에서는, 오로지 라이언에게 평생의 순정을 바치는 척 굴었을 테니까 말이야.

“결혼에 생각이 있다면, 여러모로 오해를 살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

이네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을 꾸며 내며, 샬럿을 돌아보았다.

“잠깐만, 그게…….”

“나야 상관없지만,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네 행실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 것 같아서 그래.”

“편견?”

“그래, 유부남과 지나치게 친밀하게 지낸다는 편견 말이야.”

순간 샬럿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설마, 나와 라이언의 관계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살짝 눈치를 살폈으나, 이네스는 그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럼 그렇지.’

샬럿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행실에 대한 편견이라니, 마치 나보고 천박하다고 말하는 것 같잖아.’

……설마, 그 순진한 이네스가 그럴 리가.

샬럿이 내심 속으로 고개를 가로젓던 그때.

“제이슨 남작 영애께서 결혼에 욕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차.’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감각에, 샬럿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이언이 뚫어져라 저를 노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게…….”

샬럿은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이네스가 더 빨랐다.

“라이언 당신도 항상 그러잖아? 좋은 남자를 만나서 안정을 찾는 게 여자의 최고 행복이라고.”

“이, 이네스!”

“샬럿도 그런 꿈을 꾸는 것뿐이야.”

샬럿을 감싸는 척, 이네스는 라이언을 더 들쑤셔 놓았다.

“그래도 샬럿이 참 소녀 같은 구석이 있어서, 일전에는 토드 경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지 뭐야?”

순간 라이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윌리엄 토드.

토드 자작가의 삼남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왕실 기사단까지 입단한 수재였다.

라이언과 동갑내기로 두 사람은 사사건건 비교당했다.

‘더 정확히는 라이언과의 비교를 통해 윌리엄의 능력이 더 빛났었지.’

이네스와의 결혼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라이언과는 달리, 윌리엄은 자기 스스로 있을 자리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이네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샬럿이 글쎄, 토드 경께 드리겠다면서 직접 손수건에 수까지 놓던걸?”

“…….”

“내 친구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

“……그래, 그렇군.”

간신히 그 대답만을 내어놓고, 라이언은 침묵했다.

어금니를 앙다물고 있는지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꽤 상했나 보지?’

흐뭇한 시선으로 라이언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두 사람은 대화 나누고 있어.”

그렇게 밖으로 빠져나온 이네스는 슬그머니 방문에 기대섰다.

귀를 기울이자, 방문 밖으로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토드? 토드라고? 어떻게 그 자식에게 손수건이니 뭐니 갖다 바칠 수 있어?”

하, 기가 막힌 웃음을 터뜨린 후.

라이언은 재차 캐물었다.

“샬럿, 너 지금 나 말고 다른 남자들에게 꼬리 치고 다녔던 거야?”

“나, 나도 언제까지 당신 애인 노릇만 하며 살 수는 없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여!”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던 이네스가 피식 웃었다.

‘예전에도 저런 적이 있었지.’

회귀 전 과거.

샬럿은 결혼에, 정확히는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에 대한 욕심이 강했다.

이네스는 그런 샬럿에게 어떻게든 좋은 남자를 소개시켜 주려고 애를 썼었다.

샬럿이 괜찮은 짝을 만난다면 라이언과 헤어져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된다면, 라이언 또한 이네스에게 돌아오리라고 믿었기에.

‘하지만 뭐, 그 후에도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어깨를 으쓱인 이네스가 뒤돌아섰다.

이제 그런 너절한 것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신년 무도회.’

그곳에서 어떻게든 서식스 공작을 만나야만 했다.

진녹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

그 후, 신년 무도회 당일

이네스는 긴장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떨어지는 은백색 드레스.

어깨 위로는 하얀 모피를 둘러 포인트를 주었고, 귓불에는 눈동자 색과 맞춘 에메랄드 귀고리를 달았다.

비록 화려한 장식은 없었으나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왕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드레스의 재질 자체가 값비싼 것인 데다가, 몸에 두른 모피와 귀고리가 어마어마한 가격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귀고리도 오랜만에 착용해 보네.’

이네스는 추억에 잠긴 손길로 귓가를 매만졌다.

에메랄드 귀고리가 귓불에서 달랑거리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께서 이 귀고리를 무척 아끼셨는데.’

이 에메랄드 귀고리는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듣기로, 이 귀고리 한 쌍의 가격만으로도 마차 한 대는 구매할 수 있다고 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며, 직접 유명한 장인에게 제작을 맡겼다고.

하지만 전생의 이네스는 이 귀고리를 몇 번 착용해 보지도 못했다.

‘도대체 그 귀고리는 뭐야? 너무 사치스럽잖아. 한 가문의 안주인이면 검소할 줄도 알아야지.’

그런 식으로 라이언이 눈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대로 정신병원에 끌려가 평생을 보내게 되었더라면.

……이 귀고리는 샬럿의 것이 되었을까?

이네스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마님, 마차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때마침 하녀의 부름이 들려왔다.

“알았어, 내려갈게.”

이네스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저택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이언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옷차림이 너무 화려한 거 아냐?”

대번에 질책이 날아들었다.

“난 사치스러운 여자는 싫어한다고 했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철없이 값비싼 드레스를 차려입고…….”

“내가 좋아.”

“뭐?”

순간 라이언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이네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덧붙였다.

“당신의 취향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좋아서 이렇게 꾸민 거야.”

“……이네스?”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검소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었지?”

또각, 또각.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과 부딪히며 또렷한 소리를 냈다.

라이언의 바로 앞에 선 이네스가, 손을 뻗어 제 남편의 옷깃을 매만졌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깔끔하게 각이 잡힌 최고급 정장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목을 감싼 넥타이로 향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그래도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체면을 생각해야지.”

넥타이를 정돈해 주는 척 힘을 주어 넥타이를 조이자.

‘큭.’

순식간에 조여 오는 숨에, 라이언이 움찔 어깨를 굳혔다.

“당신이 이렇게 의상실에서 맞춘 최고급 정장을 차려입고, 동방에서 넘어온 비단 넥타이를 착용한 이유도.”

이네스는 그대로 사르르 눈매를 접어 보였다.

“모두 백작가의 체면을 위해서 그런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나도 앞으로는 백작가의 체면을 좀 생각하려고.”

이네스가 여상하게 말을 맺었다.

“크흠, 흠.”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라이언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스스로의 사치스러움을 변명하기 위해 했던 말이 고스란히 제게로 되돌아온 상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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