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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4)화 (4/120)
  • 4화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지금?”

    라이언이 성마른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남편이 귀가했는데 밖에서 맞아 주지도 않고. 아내로서의 책임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예전이라면 라이언이 저렇게 화를 낼 때마다 바짝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췄겠지.

    하지만.

    “피차 마찬가지 아니야?”

    이네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뜻밖의 반응에 라이언이 멈칫했다.

    ‘뭐지?’

    이네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을 텐데. 내가 아프다고 말이야.”

    사실이었다.

    이네스가 두문불출하는 동안, 이네스의 측근 하녀인 메리가 걱정이 심했었다.

    메리는 라이언에게 계속 사람을 보냈지만, 이네스는 그냥 두었다.

    라이언이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아내가 며칠 동안이나 앓아누워 있는데도 얼굴조차 보여 주질 않았잖아.”

    “아니, 그건…….”

    “남편으로서의 책임감이 있다면, 최소한 그렇게까지 무심하게 굴지는 않았겠지. 안 그래?”

    이네스는 라이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라이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할 말이 없어진 라이언이 괜히 언성을 높였다.

    “바, 바깥일이 급하니까 그렇지! 그런 것 하나도 이해 못 해 줘?!”

    거짓말.

    이네스는 남편의 흐트러진 옷가지를 보며 조소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셔츠 목덜미에는 붉은 키스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샬럿이 보란 듯이 남겨 놓은 흔적이었다.

    과거에는 그를 못 본 체 넘어가기를 수차례였다.

    그리고 지금은…….

    ‘이번에도 모른 척해야겠지.’

    이네스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녀가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분명 어떻게든 이네스를 회유하려 들 테니까.

    하지만 속이 역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절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정돈하며, 이네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 그래.”

    마침 화제를 바꿀 기회가 생겨서 다행스럽다는 양, 라이언이 냉큼 입을 열었다.

    “이번에 신년 무도회가 열리는 건 알고 있지?”

    “신년 무도회?”

    이네스도 알고는 있었다.

    신년 무도회.

    왕실에서 일 년에 한 번, 지난해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맞아들이는 의미로 여는 파티.

    귀족들은 왕족들과 안면을 트기 위해서라도 눈에 불을 켜고 참석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게 나와 상관이 있나.’

    어차피 라이언의 기반을 닦아 주기 위해 가는 것뿐인데.

    이네스가 다소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그때.

    “모처럼 서식스 공작께서도 참석하신다니까.”

    순간 이네스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깐, 서식스 공작이라고?’

    여태껏 서식스 공작을 어떻게 만날지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해결책이 나올 줄이야!

    라이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알고 있지? 서식스 공작께서 왕국의 예술계에 얼마나 영향력 있으신 분인지.”

    “…….”

    “이번에 공작께 무조건 잘 보여야 해. 그러니까 이네스 당신도 여러모로 신경 좀 쓰고…….”

    라이언이 무어라고 더 떠들어 댔으나 이네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만날 수 있어.’

    심장이 쿵쿵 뛰어서, 이네스는 손으로 지그시 가슴을 눌렀다.

    ‘내 운명을 바꿀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

    그러려면 어떻게든 서식스 공작을 그녀의 편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이네스는 두 눈을 빛냈다.

    ❀ ❀ ❀

    달칵.

    문이 닫혔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라이언이 미심쩍은 얼굴로 닫힌 방문을 힐끔 돌아보았다.

    오늘의 이네스는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라이언, 너무 보고 싶었어!’

    평소의 이네스였더라면 일단 그를 보자마자 애정에 가득 찬 눈빛을 했을 것이고,

    ‘오늘은 좀 어땠어?’

    반가워 죽겠다는 양 라이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을 것이며,

    ‘식사는 했어? 피곤하지는 않아? 씻을래?’

    지겨우리만큼 이것저것 그의 안부를 물어 왔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눈동자.’

    아무런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아, 무심하기만 한 그 시선.

    마치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를 대하는 것만 같던…….

    ‘아냐,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구는 거지.’

    라이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깟 게 그래 봤자, 어차피 평생을 나만 바라보고 산 여자잖아?’

    내일쯤 다시 찾아가서 잘 달래 주면,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을 것이다.

    원래 그런 여자이니까.

    ‘그럼 샬럿이나 만나러 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라이언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 ❀ ❀

    며칠 후.

    이네스는 달갑지 않은 사람을 마주했다.

    “마님, 제이슨 남작 영애께서 오셨어요.”

    하녀가 환한 얼굴로 이네스에게 고했다.

    최근 이네스가 기운이 없어 보였기에, 절친한 친구인 샬럿의 방문이 내심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네스의 반응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는데.

    “약속조차 없이?”

    오히려 이네스의 만면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이다.

    “오늘 제이슨 남작 영애가 방문하겠다고 미리 말을 전해 뒀었니?”

    “어, 아뇨.”

    사실 이네스의 지적 자체는 타당했다.

    상대의 집에 방문하기 전, 미리 약속을 잡고 양해를 구하는 건 기본 예의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브라이어튼 백작가는 상당한 명문가였다.

    이렇게 편하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네스!”

    한 여인이 방 안으로 고개를 쏙 내밀더니, 발랄한 목소리로 이네스를 불렀다.

    붉은 고수머리, 그리고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화려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이네스는 굳은 얼굴로 여인을 마주했다.

    “샬럿.”

    샬럿 제이슨.

    어렸을 적부터 이네스와 우정을 나누었던 절친한 친구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적, 이네스를 곁에서 위로해 주던 사람도 바로 샬럿이었다.

    “두통이 심하다며? 그래서 병문안 왔어.”

    샬럿이 이네스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문안을 왔다고 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빈손이었다.

    ‘언제나 그랬지.’

    선물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다만 샬럿이 아프다고 할 때마다, 온갖 몸에 좋은 음식이며 선물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갔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이렇게나 서로를 대하는 마음 자체가 다른데, 나 혼자 진짜 우정이라고 믿고…….’

    그런데 그때.

    “제이슨 남작 영애께서 오셨다고?”

    반가움이 가득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라이언이 불쑥 방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브라이어튼 백작님. 이네스가 아프다고 해서 병문안을 왔어요.”

    분명 오늘 이전에도 만나 몇 번이나 몸을 섞었을 텐데도, 샬럿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치미를 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라이언이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이네스가 정말 좋은 친구를 두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시다니…….”

    “어머나, 별말씀을요.”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네스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관찰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아.’

    샬럿이 라이언을 바라보는 달콤한 시선.

    라이언이 샬럿에게 다정하게 웃어 주는 모습.

    여태까지 그녀 자신만 몰랐다.

    ‘바보 같게도.’

    때마침 라이언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눈 샬럿이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있잖아, 이네스. 나 하나 부탁 좀 해도 돼?”

    샬럿이 가슴에 양손을 모으며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제 곧 신년 무도회가 열리잖아.”

    “그런데?”

    “나 신년 무도회에 타고 갈 마차가 없어서…….”

    샬럿이 보란 듯이 양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나도 너희 마차에 좀 얻어 타고 가면 안 될까?”

    “…….”

    품에 꼭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가녀린 모습이었다.

    아마 예전이라면 저 촉촉한 눈빛에 벌써 마음이 약해졌을 것을 테지만.

    ‘놀랍도록 아무런 기분이 안 드네.’

    한편 덤덤한 이네스를 마주하며, 샬럿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기분을 느꼈다.

    ‘뭔가 좀 이상한데?’

    평소의 이네스였더라면 이미, 자신의 간절한 부탁에 이미 그러마고 대답했을 터.

    그러나 지금의 이네스는 그저 물끄러미 샬럿을 마주 볼 뿐이었다.

    “이네스, 너랑 나는 가장 친한 친구잖아.”

    참다못한 샬럿이 살살 이네스를 꾀어냈다.

    “게다가 브라이어튼 백작님과도 친분이 있고. 응?”

    그렇게 운을 뗀 샬럿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이네스의 양손에 제 손을 겹쳤다.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샬럿이 처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내가 너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거.”

    사실 샬럿의 가문인 제이슨 남작가는 몰락 귀족에 가까웠다.

    보통의 경우라면 명문가로 손꼽히는 브라이어튼 백작가와 교분을 나눌 수조차 없는.

    하지만 어렸을 적의 우연한 인연을 계기로, 샬럿은 이네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이네스를 발판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여 여러 명사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다.

    “만약 내가 브라이어튼 백작 부부와 같은 마차를 탄다면, 사람들이 날 조금 덜 무시할 것 같기도 하고…….”

    “이 손 놔.”

    동시에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당황한 샬럿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이네스?”

    이네스는 더러운 것을 털어 내듯 샬럿의 손을 쳐 냈다.

    “함부로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거,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것쯤은 너도 잘 알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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