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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3)화 (3/120)

3화

마치 차가운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던 것처럼, 온몸이 저릿하고 무거웠다.

“……님!”

“…….”

“마님!!”

순간 이네스가 두 눈을 번쩍 떴다.

“헉, 허억, 헉……!”

“세상에, 마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식은땀 좀 봐!”

놀란 하녀가 이네스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피곤하셨나 봐요, 이런 중요한 날에 마님께서 깜빡 잠드시기도 하고.”

“……중요한 날?”

이네스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하녀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오늘은 마님의 결혼기념일이잖아요. 만찬을 손수 준비하실 정도로 기대하셨으면서.”

“결혼…… 기념일이라고?”

순간 이네스가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결혼기념일.

그 단어가 마치 칼날처럼 섬뜩하게 와 닿았다.

“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니?”

“1825년 5월 28일이에요.”

그 여상한 대답에, 이네스가 바짝 얼어붙었다.

그날이었다.

그녀가 목숨을 잃었던 날로부터 3년 전.

남편과 절친한 친구의 불륜을 처음 목격했던 날.

그녀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던 최악의 결혼기념일로, 다시 한번 되돌아왔다.

‘……이럴 수가.’

이네스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던 그때.

“마님, 얼굴이 너무 초췌해요. 의사를 부를까요?”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혼란에 빠져 있던 이네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행방을 알아내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니, 괜찮아. 그보다 라이언은?”

순간 하녀가 멈칫했다.

“그, 그게.”

“아직도 안 돌아왔니?”

“……네에.”

하녀는 제가 잘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무룩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이네스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렇구나.”

아직도 아틀리에에서 샬럿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나 보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 당장 얼굴을 보게 되면, 분명 치받는 감정을 이기지 못할 테니까.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숨처럼 중얼거린 이네스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식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은 깨끗한 식당.

그 가운데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식탁이 보였다.

이네스가 손수 차린 식탁이었다.

와인도, 촛대도, 음식도, 식탁보도, 식탁을 꾸민 꽃까지도 모조리.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게 없었다.

그중, 이네스는 화병에 꽂혀 있는 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이 아릴 정도로 새빨간 장미.

……샬럿의 머리카락과 닮은.

“정말로 꿈이 아니었네.”

이네스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결혼기념일 당일에도 자리를 비운 라이언을 마주하며, 역으로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와 닿는다.

‘아마 지금 아틀리에로 가면…… 라이언과 샬럿이 몸을 섞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겠지.’

멍하니 그 자리에 선 채 장미를 노려보던 이네스가, 장미 한 송이를 뽑아 들었다.

그대로 우그러뜨린다.

“마, 마님?”

놀란 하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네스는 쓰레기를 내버리듯 손안에서 뭉그러진 장미 꽃송이를 털어 냈다.

그러고는 차갑게 명령했다.

“이것들, 다 갖다 버려.”

“예?”

“어차피 남편은 오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네스가 뒤돌아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마님? 마님!”

놀란 하녀가 이네스를 부축하려 들었다.

이네스는 마구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녀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버릇처럼 ‘괜찮다’라고 중얼거리던 그녀가 순간 울컥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단 말인가.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데.

한때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사실,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 없는데…….

‘오늘만, 오늘만이야.’

오늘만 슬퍼하고 모두 털어 버리는 거다.

과거의 멍청했던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가여웠고, 라이언에게 바쳤던 애정이 안타까웠고, 샬럿과 나누었던 우정이 너무나도 아까워서.

“윽…… 흐윽. 흐으윽…….”

이네스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라이언은 그림을 그린다는 핑계로 아틀리에에 처박혀 있느라, 타운하우스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에 이네스는 충분히 마음을 정리했다.

‘아마 샬럿과의 밀회가 그만큼 달콤한가 보지?’

이네스가 차갑게 조소했다.

온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던, 격랑 같은 슬픔이 지나가자.

이제 심장 깊은 곳에는 얼음 같은 분노와 배신감만이 남았다.

‘지금까지 충분히 슬퍼했어.’

언제까지나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라이언과의 관계는 이미 끝장났다.

그렇다면 이네스도 이제 조금 현실적으로 변해야만 하지 않는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라이언에게 빼앗긴 모든 것들을 되찾아오는 것.’

이네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현재 브라이어튼 백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은 라이언이었다.

왕국법상 여성이 작위를 상속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는 없었으나, 사회적인 분위기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작위를 이어 봤자 유난하다는 소리나 듣지.’

선심을 쓰듯 말하던 라이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내가 작위를 이을게. 그게 모양새도 보기 좋을 테니까.’

‘……하지만.’

‘나도 남들에게 내세울 번듯한 작위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라이언은 머뭇거리는 이네스를 살살 달랬다.

‘이네스 넌 날 사랑한다며. 남편이 기가 죽어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보기 싫을 거 아냐?’

‘으응…….’

그렇게 정신을 차려 보니, 브라이어튼 백작위는 어느새 라이언이 틀어쥐고 있었다.

그 외로도 시댁인 고트 자작가에 흘러간 재산도 상당했다.

이미 지원한 금액이야 그렇다 쳐도, 브라이어튼의 이름으로 사업 자금을 유치 받은 것도 꽤 있는 것으로 알았다.

‘물론 그 사업들은 번번이 말아먹고 있지.’

라이언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을 걷어 내니, 현실은 이렇게 명확했다.

‘도대체 나, 여태까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지.’

어쩐지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이네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라이언과의 이혼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왕국법상 귀족들의 이혼이 성립되려면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왕국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웬만큼 이슈가 되지 않고서는 이혼 허락이 떨어질 리 없잖아.’

그러던 중.

진녹색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조그만 정물화로 향했다.

이네스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세간에는 라이언의 작품이라 알려져 있기에, 유명 화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받는…….

‘잠깐만.’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네스가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 그림은 내가 그린 거잖아?’

실제로 라이언은 기초 회화만 간신히 교양으로 익힌 정도였다.

고작해야 붓을 놀릴 줄이나 알지, 이렇게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릴 능력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까 작위 문제만 해도 그렇듯, 랭커스터 왕국은 본디 여자가 외부 활동을 하는 것을 그리 긍정적으로 보는 나라가 아니었다.

여자는 집안을 돌보고, 남자는 밖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며 집안을 건사한다.

그게 왕국의 기조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만약 라이언이 쌓아 올린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사실은 가짜임이 밝혀진다면?

‘라이언에게는 분명 커다란 타격이 갈 거야.’

거기에 샬럿과의 불륜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커다란 스캔들이 될 터.

‘그렇다면 국왕 폐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이네스의 두 눈이 반짝이는 것도 잠시.

‘다만 이혼이 가능할 정도의 스캔들로 규모를 키우려면, 언론의 도움이 필수적인데.’

이네스는 다시 한번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현재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언론사는, 왕국 최고의 일간지인 엘튼지를 발간하는 엘튼사였다.

그 정확성과 훌륭한 기사로, 엘튼지는 왕국뿐 아니라 전 대륙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현재 엘튼사를 소유한 사람은.

‘서식스 공작 각하지.’

에녹 피츠로이 폰 랭커스터.

별명은 국왕보다도 더 유명한 남자.

에녹은 여러모로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왕가의 직계로서, 현 국왕 다음가는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왕자였다.

돌연 쇠락해 가던 언론사를 인수하는가 싶더니,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주요 언론사로 성장시킨 것이다.

사업에 집중하면서 정계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었고, 지금은 완전히 사업가로 변모했다.

게다가 사생활 또한 깨끗했다.

빼어난 외모로 뭇 여성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음에도, 왕가에 흠집이 날 법한 여성 편력도 전혀 없다.

다만 그 미모와 에녹이 기본적으로 가진 미적 감각이 결합되어, 에녹이 입고 먹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왕국의 유행이 될 정도였다.

물론 에녹이 제 미모를 전략적으로 이용한 건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에녹은 제 미적 감각을 자신의 신문에도 아낌없이 발휘했는데…….

‘그러고 보면, 엘튼지의 예술 면에 내 작품이 실린 적이 있었지.’

정확히는 남편의 이름을 내건 작품이었지만.

엘튼지에 작품이 실린 이래로, 간간이 유명세를 타던 남편은 순식간에 제국 최고의 화가가 되었다.

지금은 과거로 회귀했기에, 엘튼지와의 인연은 사라졌지만 말이다.

‘솔직히…… 그때는 좀 기뻤어.’

비록 자신이 작업한 거라고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재능이 인정받은 것 같아서.

잠시 풀어졌던 이네스의 표정이 이내 결연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서식스 공작의 도움을 얻어야 하는데.’

어떻게 서식스 공작의 관심을 끌지?

아니, 애초에 서식스 공작과 만날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요원한데…….

이네스가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벌컥!

노크조차 없이 문이 열렸다.

그와 함께 한 사내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빈틈없이 빗어 넘기고,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차려입었다.

다만 옷매무새가 다소 흐트러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목구비 자체는 꽤 수려하지만, 얄따란 입술과 반들거리는 회색 눈동자가 어딘지 비열한 느낌을 주었다.

“이네스.”

이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마주했다.

그녀를 향해 사납게 두 눈을 부라리는 저 사람은 바로, 이네스의 남편.

브라이어튼 백작, 라이언 고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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