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라, 라이언. 그게 무슨…….’
‘아, 시끄러워! 내 일에 참견하지 마, 알았어?!’
라이언은 제 옷깃을 정돈해 주던 이네스의 손을 탁 쳐 내고는, 보무도 당당하게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후 연락 두절이 된 지 벌써 3일.
하지만 이네스는 쉽사리 라이언에게 사람조차 보내지 못했다.
라이언이 또 화를 낼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아!”
이네스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창문 너머로 타운하우스의 정문에 마차가 멈춰 서는 모습이 보였다.
이네스는 귀부인으로서의 체통조차 잊어버리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라이언!”
마차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술에 잔뜩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라이언이 마차 안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네스는 직접 마차 문을 열고 라이언을 부축하려 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
마차 안에 고여 있던 공기가 그녀에게로 훅 쏟아졌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진한 술 냄새, 그리고 그에 뒤섞인 달큼한 향수 냄새.
‘……이 향수 냄새는 분명 여성용인데.’
머리 위로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이네스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선 채, 코를 골며 세상모르고 잠든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정신을 차리면 물어보자.
분명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줄 거야…….
❀ ❀ ❀
하지만 다음 날,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난 라이언은.
“뭐? 향수?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을 따름이었다.
오히려 질렸다는 양 이네스에게 타박을 준다.
“그렇게 예민해서야, 앞으로 우리가 부부로 제대로 살 수나 있겠어?”
“부, 부부로 살 수 없다는 건 무슨 소리야?”
“네가 이렇게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데, 부부 생활이 지속될 수는 있겠느냐는 소리야.”
라이언은 들으란 듯이 빈정거렸다.
“참 꼴이 좋겠어, 유서 깊은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상속녀가 이혼당했다고 하면?”
“…….”
이네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왕국에서도 명문가로 손꼽히는, 유서 깊은 브라이어튼 백작가.
브라이어튼 백작가는 이네스의 자랑이었고, 부모님이 남겨 주신 가장 소중한 유산이었다.
그런 브라이어튼의 가주 자리까지 라이언에게 넘겼던 건, 사회적으로 여성 가주보다는 남성 가주가 더욱 인정받는 풍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만큼 이네스가 라이언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라이언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그와 함께 나란히 웃고 싶었기에.
하지만 라이언은 이제 그 ‘부부 생활’과 ‘브라이어튼’을 묶어 이네스를 협박하고 있었다.
이네스가 그를, 그리고 브라이어튼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했기에.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녀가 절대로 자신을 떠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어서…….
“하지만 요새 너무 외박이 잦았던 건 사실이잖아.”
참다못한 이네스가 그렇게 항변했으나.
“이네스, 지금 네가 날 훈계하는 거야?”
라이언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네스를 위아래로 흘겨볼 따름이었다.
“남자가 사회생활을 한다는데 좀 이해해 줘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철없이 굴 건데?”
“…….”
그 싸늘한 대답에, 이네스는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 ❀ ❀
그렇게 이네스가 라이언과의 관계 때문에 홀로 마음고생을 하던 때.
“이네스, 오랜만이야!”
마치 그들 부부가 다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샬럿이 방문했다.
예고조차 하지 않은 방문에 이네스는 조금 당황했으나.
“친구끼리 무슨 연락을 하고 와. 그렇지, 이네스?”
넉살 좋은 샬럿의 말에 이네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과의 관계 때문에 머리가 혼란한 와중.
제 유일한 친구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인 샬럿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늘 이 근처에서 약속이 있는데, 시간이 중간에 뜨는 바람에 잠깐 놀러 왔어.”
“…….”
제 선약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며, 이네스는 대기하고 있다가 제가 언제 들이닥치든 무조건 받아 줘야 한다는 양.
아주 당당한 태도였다.
샬럿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해 줄 거지, 이네스?”
“으, 응.”
당연히 이네스가 자신을 환대해야 한다는 듯한 그 말투에, 이네스는 언제나처럼 최고급 차와 다과들을 준비했다.
그 화려한 티 테이블 앞에서, 샬럿은 크나큰 은혜라도 베푸는 양 입을 열었다.
“뭔가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해 봐.”
“…….”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물론 이네스가 정상적인 상태였더라면, 타이밍 좋게 이네스를 방문해서 충동질을 하는 샬럿을 의심해 보았을 테지만.
이네스는 현재, 라이언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게, 사실은…….”
그리하여 이네스는 조심스럽게 이번 일에 대해 입을 열었으나.
“글쎄, 그건 네 잘못 아냐?”
되돌아온 건 어리둥절해하는 샬럿의 대답뿐이었다.
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내 잘못이라고?”
“당연하지. 그럼 그게 브라이어튼 백작님의 잘못이겠어?”
“…….”
순간 이네스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분명 라이언이 잘못한 건데, 모두가 이네스더러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샬럿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네가 남자를 다소 옥죄는 성격이기는 하잖아.”
“……내가?”
“응. 남자들은 말이지, 너처럼 집착하는 여자는 완전 질색한다?”
샬럿은 다과로 나온 고급 과자를 오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들들 볶아 대니까, 브라이어튼 백작께서도 네게 질리신 거 아닐까?”
“그,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으음, 만약 나라면…….”
고민에 빠진 척 고개를 갸웃거리던 샬럿이, 이내 해사하게 웃었다.
“백작님을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아.”
“……라이언을? 하지만.”
“사실 백작님께서 워낙에 자유분방한 성격이시잖아. 조금 풀어 주는 게 장기적으로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던 샬럿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앗, 약속 시간이 다 됐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다음에 또 보자!”
이네스는 망연한 시선으로, 후다닥 밖으로 빠져나가는 샬럿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이 근처에서 있다는 약속’이, 라이언과의 밀회였다는 것을.
❀ ❀ ❀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이네스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정말로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이해심이 적은 게 문제인가?’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라이언이 내게로 돌아올까?’
‘내가 나쁜 거야, 내가 잘못한 거야. 라이언을 만족시키지 못한 내가…….’
끝없는 자기 비하와 자기혐오, 스스로에 대한 검열 속에서.
이네스는 점점 피폐해져만 갔다.
그러던 중, 그녀는 라이언과 샬럿 사이의 불륜을 목격했다.
차라리 그를 계기로 라이언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아틀리에에서의 일 이후로, 라이언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이네스를 설득했다.
“미안해, 이번 일은 그냥…… 내가 잠시 일탈한 것뿐이야.”
여태껏 냉랭하게 굴었던 건 간데없이, 라이언은 멍해진 이네스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남자들은 가끔 애같이 군다잖아. 당신이 이해해 줘, 응?”
“하지만 라이언…….”
“샬럿은 내가 금방 정리할 테니까.”
라이언은 이네스의 귓가에 밀어를 쏟아 넣었다.
“내 아내는 너뿐이야, 이네스.”
“…….”
“내가 조금만 더 성공을 거두면, 이네스 너를 꼭 행복하게 해 줄게.”
그 달콤한 말을 거절하기에는, 이네스는 아직 라이언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랬기에.
“이네스, 요새는 새로 작업하는 건 없어?”
“이번에는 정물화를 좀 그려 줬으면 하는데.”
이네스가 그린 작품들은 모조리 라이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다시없을 명작이라며 칭송받았다.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그동안 이네스는 수없이 그림을 그리고, 고트 자작가에 이권을 넘기고, 라이언을 내조했다.
어떻게든 라이언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그에게 알량한 애정 한 조각이라도 받아 보고 싶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여태까지 고생했어, 이네스.”
라이언이 웃으며 이네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랜만에 듣는 다정한 말에, 이네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던 그때.
“그러니 슬슬 우리 관계도 이만 정리하자.”
“……그게 무슨 소리야?”
“보여, 이네스?”
라이언이 서류 하나를 이네스에게 들이밀었다.
“너는 더 이상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아니야.”
“뭐?”
“그냥 정신병자일 뿐이지.”
모 대형 정신병원에서 발급한 그 서류에는, 이네스의 정신 질환 병력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과도한 의부증, 집착증, 피해망상증, 환청과 환시…….
다만 문제는, 이네스는 저 정신병원에 발을 들인 적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
“입원 절차는 이미 마쳐 두었어. 이제 곧 정신병원에서 널 데리러 올 거야.”
“시, 싫어, 싫……!”
마구 고개를 가로젓던 이네스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라이언이 미간을 좁혔다.
“이네스?”
동시에 이네스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망쳐야 해. 평생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낼 수는 없어!’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어떻게든 라이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끼이익-쿵!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마차에 사람이 치였어!”
주변이 온통 소란해졌다.
이네스는 허섭스레기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고통은 없었다.
그저 혼미할 뿐.
‘그러고 보면…… 난 평생 라이언을 위해서만 살아왔던 것 같아.’
여태껏 라이언이 쌓아 올린 명예, 재산, 작위까지.
모두 이네스가 쥐여 준 것들이었다.
‘되찾고 싶어.’
가슴을 저미는 회한을 끝으로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는, 보잘것없는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