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그림자를 그만두었을 (1)화 (1/120)
  • 1화

    이네스는 멍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남편의 작품 활동을 도와주기 위해 이네스가 직접 발품을 팔아서 얻어 준 아틀리에.

    그 아틀리에에서, 마음 깊이 사랑하는 남편이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여자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열렬하게 키스를 퍼붓는 중이었다.

    그뿐이랴?

    남편의 키스를 받으며 달콤하게 웃는 여자는 바로 이네스의 절친한 친구, 샬럿이었다.

    두 사람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서슬에 근처에 놓여 있는 화구들이 우르르 떨어지고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숨결이 더욱 뜨거워질 뿐.

    “하아, 하…….”

    “아…… 읏. 잠깐만, 거긴…….”

    굴곡 있는 여체를 더듬는 남편의 손길이 끈적거렸다.

    “내 사랑은 오로지 너뿐이야.”

    남편, 라이언의 확언에 샬럿이 달콤한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아, 라이언. 나도…….”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라이언은 샬럿의 목덜미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후우,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채, 라이언이 흥분한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이네스가 너무 울며불며 매달려서 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정말?”

    샬럿이 두 눈을 반짝이며 양팔을 라이언의 목에 휘감았다.

    라이언은 싱긋 웃으며 샬럿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당연하지.”

    드레스 자락이 사르륵 아래로 떨어지고, 뽀얗고 매끄러운 다리가 드러났다.

    라이언의 손이 거미처럼 다리를 더듬고 올라갔다.

    동시에 이네스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렸다.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마구 바닥에 나뒹굴었다.

    작업으로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이네스가 손수 준비해 갖고 왔던 간식들이었다.

    깨진 와인 병에서 핏빛 와인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네스?”

    “라, 라이언.”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그렇게 라이언을 불러 놓고도, 이네스는 한참을 침묵했다.

    도저히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던 남편, 라이언.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친구, 샬럿.

    ‘어떻게, 어떻게 그 둘이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양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네스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그렇게 물으면서도 이네스는 내심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가 오해한 거라고.

    제발 그렇게라도 말해줬으면.

    하지만.

    “왜 당신이 여기에 왔어?”

    오히려 라이언이 이네스를 향해 두 눈을 부라렸다.

    “설마 내 뒤를 밟은 거야?”

    “라이언!”

    “여긴 내 공간이야, 내 아틀리에라고!”

    이네스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라이언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신 원래 이렇게 집착하는 여자였어? 이러니까 내가 밖으로 나돌지!”

    가슴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수많은 항변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으나, 그중 어느 것도 꺼내 놓지 못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인 끝에 간신히 내놓은 말은…….

    “……당신, 슬럼프라고 했었잖아.”

    제가 왜 아틀리에를 찾아왔는지에 대한 변명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찾아온 거야. 작업이 잘 안 된다고 해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고 해서…… 건강을 해칠까 봐.”

    이네스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어째서 자신이 변명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못한 쪽은 라이언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면 미리 연락을 줬어야지!”

    라이언이 이네스를 윽박질렀다.

    겁을 집어먹은 이네스가 반사적으로 두 눈을 내리떴다.

    “바, 방문한다고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이쪽을 바라보는 라이언과 샬럿의 시선이 따가웠다.

    “우리 요새…… 다소 소원했었잖아.”

    그 말을 입에 담으며, 이네스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제 존재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자존감마저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었다.

    ‘비참해.’

    그러고 보면, 최근 라이언은 짜증이 늘었었다.

    ‘하, 영감이 오질 않아, 영감이!’

    이네스가 매번 눈치를 볼 정도로.

    ‘여보, 그래도 마음을 조금 편하게 가지면…….’

    ‘시끄러워, 잔소리 좀 작작 해! 내가 애새끼인 줄 알아?!’

    잔뜩 화를 내며 방 밖으로 나가 버리는 그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마님, 직접 간식 바구니를 챙기시는 거예요? 저희에게 시키지 않으시고…….’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

    바구니에 정성스럽게 간식과 와인을 포장하며, 남편이 조금이라도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기를 기대했었다.

    아주 작은 미소라도 좋으니, 오늘만큼은 제게 웃어 주기를.

    왜냐하면 오늘은…….

    “라이언, 제발.”

    이네스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매달렸다.

    “우리 오늘 결혼기념일이잖아, 응?”

    순간 라이언이 움찔했다.

    여태껏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네스는 충격 받은 얼굴로 라이언을 마주 보았다.

    “……설마 그것까지 잊고 있었어?”

    “사람이 워낙 바쁘다 보면 깜빡할 수도 있지, 유난 떨기는.”

    뻔뻔하게 혀를 찬 라이언이 냉큼 샬럿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자, 샬럿.”

    “여자가 잘해야 남자가 질리지 않는 법인데, 그러게 좀 잘하지 그랬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샬럿이, 라이언의 팔을 끌어안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이네스는 멍하니 바닥에 널브러진 간식 바구니를 응시했다.

    구둣발에 짓밟힌 치즈 조각들, 널브러진 샌드위치, 그리고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흐르는 붉은 와인.

    그 너절한 모습이 저와 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직 철없는 소녀였던 시절.

    이네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이 한날한시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들었어요? 브라이어튼 백작 부부 이야기요.”

    “네, 마차 사고가 크게 나는 바람에…….”

    그렇게 이네스는 브라이어튼 백작가의 유일한 상속녀가 되었다.

    막대한 유산, 그리고 명망 있는 백작가의 후계자.

    이네스는 단숨에 왕국 최고의 신붓감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누구와 결혼할지가 사교계 초미의 관심사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사람이 밝혀졌을 때, 사교계는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다.

    “고트 자작가의 차남이라지요?”

    “운이 좋았네요. 차남이라면 작위는커녕, 재산 한 푼조차 물려받기 어려울 텐데.”

    “단숨에 브라이어튼 백작 작위와 막대한 재산을 움켜쥐다니, 결혼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했어요. 그렇죠?”

    어렸을 적 부모를 잃은 이네스는 외로움에 취약했다.

    그 외로움을 파고든 사람이 바로 라이언 고트.

    고트 자작가의 차남이었다.

    “평생 곁에 있고 싶습니다, 레이디 브라이어튼.”

    멍청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그렇게 이네스는 라이언의 손을 잡고, 브라이어튼 백작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계속해서 제게 모자란 것만을 호소했는데.

    “브라이어튼 백작 작위를 가지면 뭐해? 그건 허울뿐이야.”

    “여보, 그건…….”

    “남자라면 무릇 세상에 이름을 날려야지. 안 그래?”

    남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남편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쥐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네스는 미혼 시절의 취미를 살려, 남편의 이름으로 몇 점의 그림을 미술전에 출품했다.

    그저 남편의 기를 조금 살려 주려 함이었는데.

    ‘떠오르는 신진 화가, 라이언 브라이어튼!’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화풍이 그야말로 완벽하여…….’

    수많은 호평과 찬사.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라이언은 신의 손을 가진 화가라며 만인에게 칭송받고 있었다.

    이네스는 그래도 괜찮다 여겼다.

    제국은 보수적인 국가였고, 여자가 직접 자기 이름을 걸고 예술 활동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자신의 재능이 남편의 이름 아래에서나마 빛나는 게 기뻤고, 남편이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는 게 즐거웠다.

    ……분명 그랬던 시절도 있었는데.

    브라이어튼 부부의 관계에 처음으로 적신호가 켜졌던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라이언이 화가로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오늘도 라이언은 외박인가…….’

    이네스는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현관 앞을 서성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언은 벌써 3일째 타운하우스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예술가들끼리 모임이 있다고 했지.’

    듣기로는 예술 전반에 대한 심오한 토론을 하는 모임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문제는 저 모임이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린다는 점이었다.

    저 모임에 참석하느라, 최근 라이언이 타운하우스에 머무르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기에.

    이네스는 내심 오늘은 라이언이 제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라이언, 오늘 꼭 가야만 해?’

    그리하여 라이언의 외출 준비를 돕던 중, 온갖 용기를 끌어모아 그렇게 묻자.

    라이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무슨 의부증이라도 있어?’

    ‘뭐?’

    그 사나운 목소리에,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바짝 얼어붙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자의 사회생활을 그렇게 사사건건 가로막으려 들어?’

    라이언이 질색을 하며 이네스에게 쏘아붙였다.

    ‘나더러 아내에게 붙들려 사는 머저리 같은 남자가 되라는 소리야? 그럼 내 인맥 관리는? 사회적 평판은!’

    ‘아,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면 뭔데!’

    라이언은 거의 발작을 했다.

    ‘네가 나한테 그렇게 집착하니까, 점점 더 타운하우스에 들어오기 싫어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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