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150억 광년의 우주
“야야, 우연아. 이거 이놈들 좀 봐라. 이걸 어쩌냐 그래.”
우연을 보자마자 발밑을 가리키며 앓는 소리를 하는 이 대머리 할아버지는 아저씨의 외재종조부, 그러니까 ‘아저씨의 외할아버지의 사촌 동생’이자 아저씨의 대부님이기도 한 류경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이시다. 물론 지금은 은퇴하셨고, 집에서는 이렇게 낡은 체육복만 입고 계실 때가 많아서 뭐 그리 엄숙해 보이지는 않는다.
우연은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쁜 강쥐들 데려가세요.’라는 글자가 씌어 있는 라면 상자가 현관 옆 마룻바닥에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새까맣고 조그만 강아지 세 마리가 몸을 동그랗게 구부리고 있었다.
등과 꼬리와 머리는 새까맣고 짧은 털로 덮여 있고, 코끝과 가슴팍, 발과 엉덩이만 황토색이다. 코는 길고 귀는 스누피처럼 축 늘어졌는데, 꼬리는 회초리처럼 가늘고 길었다.
아하. 무슨 개인지 알겠다. 닥스훈트, 다리가 장롱 다리처럼 짤막하고 허리가 소시지처럼 길어 핫도그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녀석과 인상착의가 비슷하다. 다만 다리가 장롱 다리보단 길어 보이는 걸 보면 믹스견 같기는 했다.
“그저께였나? 요 앞에 중국집 담벼락에 어떤 고얀 놈이 이 상자를 놔두고 갔더라고.”
대부님은 비분강개했다. 처음에 몇 마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님이 보셨을 때는 요 세 마리가 남아 있었다고 했다. 예쁘다 예쁘다 쓰다듬으며 구경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데려가는 사람은 없었고, 책임지고 키우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털도 짤따란 놈들이 칼바람에 바들바들 죽어 가는데 어쩌냐? 응? 냅둘 수도 없고.”
결국 급한 대로 집에 데려와서 보일러를 밤새 돌리고 우유를 먹여 살려 내긴 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님이 얘들을 키울 상황이 못 된다는 점이었다.
“내가 지금 팔십이 코앞이야. 다른 가족도 없어. 그럼 나 죽으면 얘들 누가 키워? 나이 먹은 애들은 이렇게 상자에 내놔도 아무도 안 데려가. 그러니까 애초에 끝까지 데리고 살 가족을 찾아 줘야지.”
“신부님이 오래오래 사시는 방법도 있죠.”
“……내가 이놈들 때문에 100살까지 살아야겠냐, 엉?”
“어머나,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우연아. 내가 좀 멋지고 젊어 보여서 네가 자꾸 까먹는 모양인데, 내가 낼모레면 팔십이라니까? 한번 바닥에 앉았다가 일어나려면 20분 걸려, 20분! 것도 관절 주사 뼈 주사 골고루 맞아서 20분으로 줄어든 거야!”
“에이, 20분은 좀 너무 나가셨네요.”
“야가 내 말을 안 믿네. 네가 삐그덕삐그덕하는 관절 한 짝에 10분씩 경건하게 돌려 봤어? 워밍업 찬찬, 스트레칭 찬찬, 바닥 짚고, 지팡이 잡고, 무릎 짚고, 단계별로 나눠서 일어나 봤어? 20분은 껌이야.”
“아, 네…….”
“이거 이빨도 봐라? 말짱해 보이지? 사실 이거 틀니야. 그리고 내가 정수리 대머리이긴 하지만 옆에 주변머리는 꽤 남은 것 같지? 실은 이것도 500만 원이나 주고 심은 거야. 주님 죄송합니다. 그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왔어야 했는데요. 그게 말이다, 몇 년 전에 이원이가 생일 선물로 심어 준다고 했는데 내가 그만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지 뭐냐. 나쁜 자식, 나의 약점을 공격했어. 아, 그리고 내가 작년에 적금 깨서 쌍꺼풀 수술을 한 거 말이다, 그 나이에 무슨 주책이냐고 다들 속으로 흉봤지? 왜 한 건지 알아? 눈꺼풀에 주름이 너무 늘어지니까 속눈썹이 자꾸 눈알을 찔러서 한 거야. 이거 생존용 수술이었다고. 아, 이런 비밀까지 공개해야 하다니. 이렇게 멋지고 멀쩡해 보여도 혈압 약 당뇨 약 글루코사민 칼슘 비타민을 한 주먹씩 먹고 사는 인생이야. 그런데 개 오줌 개똥 개털 치우려고 쫓아다니다 엎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어? 바로 골절이야 골절. 것두 그냥 부러지는 게 아니고 폭삭 가루가 돼요. 10년 동안 붙지도 않는다구. 이렇게 갈 데까지 간 인간이 키우긴 뭘 키워.”
저 말발 여전하신 거 보면 100살이 아니라 200살까지도 충분히 사실 것 같은데.
우연은 상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유난히 버르적대는 놈을 하나 안아 올렸다. 그러자 놈이 꼬리와 다리를 맹렬하게 버둥거리더니 우연의 손가락에 입질을 하며 앙알거린다. 우연이 손을 빼자 입을 빠끔빠끔하더니 몸을 동그라니 말고 낑낑거린다. 꼭 병아리가 삐악거리는 소리 같다.
어……, 이거 어떡하지.
갑자기 가슴이 뜨끔하면서 진땀이 찌르르 흐른다. 요 꼬물대는 놈에게 뭔가 애정 어린 행동을 해 줘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뜬금없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동물을 길러 본 적도 없고 예뻐해 본 적도 없어서 손을 대자니 덜컥 겁이 났다.
“어,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 주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해, 그냥 꼭 안아 주고 예쁘다 예쁘다 쓰다듬으면 되겠지.”
우연은 녀석을 엉거주춤 안고 다시 물었다.
“얘 여자예요, 남자예요?”
“셋 다 남자애. 암놈이 있었대도 먼저 본 사람이 가져갔겠지. 훨씬 비싸니까.”
우연은 녀석을 팔에 안은 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팔에 폭 파묻혀서 고 조그만 다리를 꼼틀꼼틀, 긴 꼬리를 열심히 팔락거리는데, 그때마다 팔이, 아니, 마음속 어딘가가 자꾸 간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현관에 서서 뭐 하냐. 어여 들어와서 분양 공고나 좀 올려 줘.”
대부님은 아트빌리지에서 차로 10분 정도 더 들어가는, 한적한 시골 마을 단독 주택에서 살고 계셨다. 하얀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집이었는데, 정남향이라 종일 빛도 잘 들고, 나무 담장도 철제 대문도 아기자기 멋스러웠다. 정원은 넓지 않았지만 잘 가꿔져 있었고, 곁에 딸린 손바닥만 한 과수원에서는 몇 가지 과일나무들이 설렁설렁 자라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은퇴하실 때 아저씨가 지어 드린 집이라는데, 크기는 작아도 이것저것 신경 쓴 티가 역력했다.
대부님은 그곳에서 소소하게 과일 농사도 지으시고, 은퇴하신 본당에서 가끔 미사도 한 대씩 봉헌하시고, 집에 들르는 제자나 손님들을 맞아 몇 시간씩 수다를 떨거나 직접 만든 과일잼이나 감말랭이 따위를 나누어 주시기도 했다.
이원과 우연은 그 집의 단골손님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우연은 ‘오너 드라이버’가 된 후부터 그야말로 뻔질나게 놀러 다니며 온갖 종류의 과일잼과 말린 과일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라면 물을 끓이다가 김치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호르륵 차를 타고 가서 애지중지하는 김장 김치 한 포기를 약탈해 온 적도 있었다.
우연은 이 할아버지를 처음 소개받을 때부터 첫눈에 뭔가 통한다고 느꼈다. 대부님은 대부님대로, 귀한 손자며느리라도 맞이한 양 어화둥둥 둥개둥개 난리도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두 사람은 취향도 성격도 비슷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고, 타짜는 타짜를 알아보는 법이라 했다. 대부님은 자신과 동류였다. 손발이 착착, 호흡도 척척, 죽이 그렇게 잘 맞을 수 없었다.
우연으로서는 로또 당첨급의 횡재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아저씨의 과거사를 잘 아는 산증인이 계실 줄 누가 알았겠나. 손 원장님은 아저씨의 비밀에 대해 일언반구 말하는 법이 없고, 송 할머니는 아저씨의 어린 시절 중에 예쁘고 자랑스러운 일만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님은 그렇지 않았다. 어리고 순진무구했던 아저씨를 놀려 먹는 데 거침이 없었던 이분은 아저씨의 무궁무진한 흑역사를 누설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아저씨가 대부님을 얼른 소개해 주지 않았던 것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아저씨가 오히려 신부님 같았고, 평생 사목과 강의를 하다 은퇴하셨다는 대부님은 영화에 나오는 껄렁한 부패 형사 같았다. 동네 이장님한테 들은 소문, 미장원 원장님께 들은 가십,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 스캔들은 다 꿰고 있으며, 온갖 잡기에 능하고, 유행어의 첨단을 달렸다. 신학교에서 강의도 오래 하셨다더니 말발도 필리버스터다. 아저씨 말로는, “하느님께 받은 은혜와 감격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을 때 만나면 도로 평온을 찾게 해 주시는 은사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
어쨌든 우연은 이 괴짜 할아버지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내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처음부터 못 했던 건 아니야.”
대부님은 당당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요새 요놈의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질 못해. 너 여기서 나오는 불빛이 얼마나 독한지 아냐. 물론 나도 눈에 힘을 빡 줘서 노려보기만 해도 시계가 멈추고 쇠숟가락이 저절로 꼬부라지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때 안력을 너무 낭비해서 그런지 이제는 요놈의 조막만 한 화면을 10분만 들여다보면 은혜나 감동이 없어도 눈물이 좔좔 쏟아지니 낸들 어쩌겠니.”
그러구러, 우연은 오후 내내 대부님과 분양 사이트를 찾아 헤매고 분양 관련 용어를 속성으로 배워야 했다. 대부님의 뇌는 관절과 달리 총기가 여전하여 새로운 용어를 빠르게 배워 나갔다.
“자, 됐다. 이제 내가 불러 주는 대로 글 올려 봐라. ‘닥스훈트 롱다리 믹스견 3형제 분양합니다.’”
잠시 후 우연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 인간적으로 이렇게 올리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래도 명색 홍보하는 건데, 귀엽고 예쁜 점만 써서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과천 짜짜마루 중국집 앞에서 발견한 닥스훈트 블랙탄 단모 3형제입니다.
유기견이라 나이는 잘 모르고, 품종은 닥스훈트 믹스견입니다. 다리가 깁니다.
건강 상태 ― 세 마리 모두 피부병이 있는 듯합니다. 엉덩이와 등에 비듬이 많은 상태입니다.
입양하셔서 사랑으로 길러 주실 분을 찾습니다.」
“우연아, 자고로 사람은 정직해야 하는 거야.”
“그래도 피부병 얘기는 좀 빼야 하지 않을까요? 저러면 누가 데려가겠어요?”
“기껏 보냈는데 병 있다고 다시 쫓겨 오는 것보단 낫지.”
“롱다리를 너무 강조하신 거 아니에요? 닥스는 다리가 짧을수록 좋은 건데요?”
“그래도 데려갈 사람들은 다 데려가. 내가 장담하는데, 며칠 안 돼서 바로 입양될 거야.”
저 놀라운 믿음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지만, 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 버튼을 눌렀다. 끝까지 입양이 안 된대도 그 역시 대부님 소관이니까.
깜박. 분양 게시판 화면이 바뀌며, 지저분해 보이는 깜장 강아지 3형제가 꼬물꼬물 뭉쳐 있는 사진이 둥실 떠오른다.
「닥스훈트 롱다리 믹스견 3형제 분양합니다.」
* *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트빌리지에서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요?”
― 예. 이사장님. 그게 말입니다…….
이원은 눈썹을 찌푸린 채 전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트빌리지 관리인은 몹시 어려워하면서도 개 짖는 소리가 밤새 들려서 민원이 폭주하고 있다며 주인이 개를 교육시키지 않고 방치하는 것 같다는 하소연을 시작했다.
들을수록 어이가 없고 이상하다. 아니, 이게 이사장한테까지 전화가 올라올 일인가? 건물 관리인이 빨리 범인(?)을 찾아내서 사무장이 쫓아내면 되는 거잖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만, 이원은 한숨을 쉬며 말을 끊었다.
“방치가 관건이 아니고 입주자가 규칙을 어긴 게 문제죠. 아트빌리지는 실내 흡연과 애완동물 절대 금지 아닙니까. 다시 짖는 소리가 들리는 대로 당장 벨 누르고 확인하시고, 저 말고 사무장님께 말씀드려서 퇴거 수속 하게 하십시오.”
― 저, 이사장님,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한참 머뭇대던 관리인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407호…… 진 화백님 계시는 방 같습니다.”
“이런…… 맙소사.”
이원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돌처럼 굳어 버렸다.
틀림없다. 냄새가 난다. 지린내가 섞인 비릿한 냄새. 바닥을 보니 굴러다니던 먼지의 양상도 달라졌다. 새까맣고 짤막한 털들이 기존의 먼지에 고명처럼 얹혀서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다.
“아, 아, 아저씨,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오셨어요? 연락도 없이?”
우연이 침실 문을 급하게 닫으며 허둥지둥 거실로 나온다. 이원은 팔짱을 낀 채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아니, 진 화백께서는 저희 집에 오실 때 언제 말하고 오셨습니까? 퇴근하고 방에 들어갔더니 내 침대에서 큰대자로 주무시고 계셨던 게 과연 몇 번이시더라.”
“아, 그, 그게, 제 집이 조금 더럽사와 미리 말해 주셨으면 청소라도 해 놨을까 싶어서, 호, 호, 오호호홍.”
“아니 진 화백님이 언제 저 온다고 미리 청소를 해 놓으셨던 적이 있으셨나요? 설마 그게 청소가 된 상태였던 건가요, 네?”
이원은 대놓고 입을 비죽거렸다.
3주 가까이 외국 출장을 다녀왔는데, 기껏 귀국했더니 시험이니 과제니 일이 많다느니 하면서 과천엔 내려오지도 못하게 하고, 서초동에 잘 올라오지도 않고, 주말인데 자고 가지도 않고, 오밤중에도 포로롱 내려가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귀국하고도 한 달 가까이 애면글면 벽을 긁으며 독수공방했던 것이 생각나니 착한 건물주고 나발이고 좋은 소리가 안 나간다. 설상가상, 우연이 몸으로 가리고 있는 방문 뒤에서 우렁찬 소리가 뻗어 나온다.
“왕, 왕, 왕왕왕왕!”
“깡, 깡, 껑껑, 깡깡깡!”
우연은 화들짝 어깨를 움츠렸다. 망할. 건물주에게 현행범으로 걸렸다.
* * *
……모르면 용감해질 수 있어. 그래.
이원은 자신의 다리에 달라붙어 맹렬히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들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나 된다. 게다가 개 한번 키워 보지 않은 초보자가 겁도 없이 이런 품종을 데려왔단 말이지.
역시나 옛 어른들의 말씀은 옳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진우연 씨, 아트빌리지에 실내 흡연과 애완동물이 금지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아, 그게, ……네.”
“그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사태인지 설명을 좀 해 주시죠.”
건물주님이 친히 출두하셔서 팔짱을 끼고 땍땍거리기 시작했다. 잔뜩 어깨를 쭈그린 세입자는 건물주의 다리에 달라붙어 온갖 애교를 떨어 대는 배신자들을 흘겨보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님이 너무 힘드실 것 같아서, 입양될 때까지 ‘딱 며칠만’ 임시 보호를 해 주기로 했거든요. 진짜 딱 며칠이면 입양이 될 줄 알고……. 이상하게, 얘들을 놓고 가자니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젊어 보이지만 낼모레가 팔십이여.’부터 시작해 관절 주사, 뼈 주사, 틀니, 보청기, 대머리, 성인병, 뼈다귀가 부러지면 붙는 데만 10년, 기나긴 한탄을 줄줄 들어 놓고도 대부님한테 아이들을 맡기고 오는 것도 참 못할 짓인 것 같았다.
“정말 개똥 치우시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정말 뼈가 부러져서 입원이라도 하시면? 애들 쫓아다니다가 관절이 다 나가면? 대부님도 그렇지만 아저씨는 또 얼마나 속상하고 노심초사하겠어요. 물론 아저씨가 대부님한테 쌓인 게 조금, 아니 좀 많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요…….”
“아 진짜, 그놈의 레퍼토리를 몇 년이나 우려먹고 계시는 거야…….”
이원은 이마를 짚은 채 풀풀 웃다가 얼른 웃음을 멈췄다. 벽지에 원목 마루에 가구들까지 싹 갈아야 할 판인데 명색 건물주께서 해맑게 웃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점입가경, 눈치 없는 세입자께서는 건물주 앞에서 ‘나는 속은 거다.’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대부님이 배변 패드만 치워 주면 냄새 안 난다고 했는데, 하루 종일 방향제를 뿌려도 냄새가 안 없어지지 뭐예요.”
“그야 배변 훈련이 되었을 때의 일이지. 이렇게 구석구석 사방에 싸고 다니는데 방향제가 무슨 소용이야. 이 마루 나무 색깔 변한 것 봐.”
“아기 때면 짖지도 않고, 말썽도 안 부리고, 잘 잘 거라고 그러셨거든요.”
“그걸 믿었어? 얘들이 얼마나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인데. 종일 짖고, 종일 싸고, 종일 물어뜯었을 텐데?”
“뭐 쪼끄만 품종이니 저지레해 봤자, 싸 봤자, 했죠.”
“아니, 어떻게 이 품종을 소형견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처음엔 소형견인 줄 알았거든요. 두 손에 쏙 들어왔다고요.”
“원래 아기 때는 다 작아.”
이원은 한숨을 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현재 아트빌리지 407호는 개춘기에 접어든 강아지 세 마리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죄다 물어뜯긴 식탁 다리, 아작아작 씹힌 이젤 다리, 커버가 찢어지고 벗겨져서 사방으로 솜이 날리는 소파, 아랫단이 처참하게 뜯긴 커튼, 너덜너덜한 벽지와 시멘트가 훤히 드러난 벽, 잘근잘근 씹힌 장판. 원래도 청소가 썩 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지만, 현재 상태는 기존의 더러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근데 아저씨, 원래 닥스훈트들이 이렇게 고집이 세요? 주인 말을 원래 이렇게 안 듣나요?”
“뭐……? 그게 무슨 소리? 얘들은…….”
이원은 바로 반박하려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우연이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면 얘들이 바보든지……, 내가 바보든지.”
데리고 올 때만 해도 꿈은 장하기 그지없었다.
입양되기 전에 부지런히 챙겨 먹여서 포동포동 살을 찌워 놔야지. 지금도 귀엽지만 살이 붙으면 얼마나 또랑또랑하고 예뻐질까.
선행 교육도 잘 시켜 놔야지. 잠만 자고 있어도 이렇게 예쁘니, 대소변 잘 가리고 ‘일어나.’ ‘앉아.’ ‘악수.’ ‘안 돼.’ 정도만 할 줄 알아도 얼마나 숨 막히게 귀여울까. 어느 집에 가든 평생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은 저 아이들을 꼭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어쩌면 보상 심리일지도 모른다. 우연은 해맑고 철없는 저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자꾸 걱정이 되었다. 적어도 이 아이들만큼은 자신처럼 멍청해서, 눈치 없어서, 엄마 아빠 말 안 들어서 죽어라 얻어맞고 쫓겨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육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데려온 지 한 달 반이 넘어가는데도 강아지들은 제 이름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뭉그적대기 잘하고 제일 꾸물대지만 먹을 것 앞에서는 가장 동작이 빠른 진뭉뭉, 맹하니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습관이 있는 진맹맹, 콩알만 한 주제에 목통 하나는 우렁차서 대장 노릇을 하는 사건 사고 메이커 진망망.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대체 왜……?
도저히 헷갈릴 것 같지 않은 이름인데, 한 놈만 불러도 세 놈이 모조리 엉켜서 달려 나왔다. 진뭉뭉, 진맹맹, 진망망, 하나씩 불러도 셋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망망대며 대답했다. 여전히 아무 곳에나 오줌을 싸 대고, 아무 때나 짖어 대고, ‘기다려.’ 따위는 아랑곳없이 점프를 해서 우연의 손에 든 간식을 낚아챘다. 자랄수록 다리만 길어지는 이상한 닥스훈트들은 식탐과 근육의 힘이 문자 그대로 무시무시했다.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덩치가 얼마나 커졌는지, 세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면 우연은 힘에 부쳐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온몸이 근육으로 만들어진 듯, 아직 강아지인데도 엄청난 파워가 느껴졌다.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 기미를 보이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셋이 한꺼번에 자신을 깔아뭉갤 때면, 놈들이 자신을 깔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본 명령은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밥 먹자.’ 하는 소리에는 빛의 속도로 달려와 캥거루처럼 들뛰었다. 조금만 더 크면 우연의 키만큼이나 뛰어오를 기세였다.
밥 한번 먹일 때마다 전쟁이었는데, 그릇을 따로 놔 줘도 자꾸 옆의 것을 먹으려고 기웃대며 주둥이를 들이대다가 밥그릇을 뒤엎기 일쑤였고, 그러면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사료를 서로 먹겠다며 아르릉아르릉 몸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우연이 과자라도 몰래 먹으려고 조심스럽게 봉지를 뜯으면―정말 소리 안 나게 조심해서 뜯었는데도― 어느새 세 녀석이 번개처럼 달려와서 우연을 포위하고는 ‘그 손에 든 것을 얌전히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 드리겠습니다.’ 하는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곤 했다.
우연은 시간이 갈수록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과연 이 아이들은 머리가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과, ‘나는 왜 강아지 교육 하나 야무지게 못 시키나.’ 하는 자괴감이 동시에 들었다.
이제, 난생처음 보는 아저씨 앞에서 긴 꼬리를 풍차처럼 돌리며, 앞발을 아저씨 무릎에 얹고 할딱할딱 애교 부리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처절한 배신감마저 든다.
아저씨는 기묘한 표정으로 우연과 강아지를 번갈아 내려다본다.
“얘들 이름이 뭐라고?”
“얘가 진뭉뭉, 얘가 진맹맹, 얘가 진망망이요.”
처음에는 다 똑같아 보였는데 이제 꼬리 치는 모습만 봐도 구별이 된다. 아저씨의 표정이 점점 더 이상해진다.
“한 달 반을 데리고 있었다고.”
“한 달 하고 3주요.”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네. 정말 힘들었어요.”
정말 고난과 좌절의 시기였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그런데 우연아, 너한테 말해 줄 게 몇 가지 있어.”
“네.”
아저씨는 실룩실룩 경련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헛기침을 한다.
“첫째, 얘들은 고집이 세지도 않고 머리가 나쁜 품종도 아니야. 오히려 난도 높은 교육도 상당히 잘 소화하는 아이들이야.”
“아, 네.”
우연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아저씨답지 않게 처음부터 강력한 한 방을 날리신다. 그래. 결론은 내가 교육을 못 시켰다 이거지. 응, 그럴 것 같았어. 하지만 아저씨,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나는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아니라고요.
“둘째, 얘들은 롱다리 닥스훈트가 아니라 도베르만이야.”
“뭐뭐뭐라구요?”
입이 덜그렁 벌어진다. 도베르만이라고? 맹견의 대표 주자, 경찰견, 군견, 경비견으로 단골 출연 하는 카리스마 작렬인 그 개?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 뾰족한 귀, 쿨 시크 절제미의 상징인 짧은 꼬리, 우아하게 쭉 뻗은 허리와 미끈한 롱다리 근육맨인 그 개라고? 이것들이?
우연은 멍한 눈으로 아저씨 옆에 달라붙은 세 마리 개린이들을 내려다보았다. 팔랑팔랑 부채처럼 흔들리는 스누피 귀, 헤이 반가워요 아저씨, 저를 예뻐해 주세요, 떼창이라도 부르듯 맹렬하게 흔들리는 긴 꼬리, 해맑게 반짝반짝 빛나는 동그랗고 귀여운 눈. 말도 안 돼, 이것들이 맹견 도베르만이라니! 늬들이 맹견이면 무서워서 맹견이 아니라 맹해서 맹견이겠지, 엉!
“귀하고 꼬리를 안 잘라서 못 알아본 거야. 도베르만의 원래 모습은 이래.”
“귀를 왜 잘라요?”
우연이 기겁하자 아저씨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자른 모습이 더 멋지고 강해 보인다고들 하네. 아무래도 경비견이니까 날카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면서.”
“헉, 미친 거 아니에요? 원래 모습이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데요?”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는다. 아마 우연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러게. 나도 원래 모습이 훨씬 예쁘다고 생각해. 사람이든 동물이든, 타고난 대로 사는 게 제일 자연스럽고 예쁜 것 같아. 아, 그리고…….”
아저씨는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셋째, 너 여기서 나가야 해.”
* * *
강아지들은 그날 바로 대부님 댁으로 쫓겨났다. 우연은 녀석들을 보내면서 조금 울었다. 그렇게 강짜를 부리고 말도 안 들어 먹던 놈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제야 우연의 다리에 달라붙어 깽깽대는 걸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돌아 나오는데 세 마리가 한꺼번에 엄청난 목청으로 울어 댔다. 낑낑, 깡깡, 왕왕왕, 망망망망!
이 멍청한 놈들아, 있을 때 잘하지. 조용히 있었으면 들키지 않았을 텐데, 그럼 쫓겨나지도 않았을 텐데. 그럼 입양할 때까지 며칠이라도 더 같이 보낼 수 있었잖아. 우연은 자꾸 쫓아와서 다리에 달라붙는 놈들한테 마구 화를 내며 떼어 냈다.
“빨리 들어가! 난 너희들 안 키워, 너희처럼 말 안 듣는 놈들, 난 싫다니까!”
오는 내내 녀석들이 낑낑대며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빨리 보내고 나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집으로 오는 동안 계속 눈물만 나왔다.
“벌써 이렇게 정을 붙였어그래, 겁도 없이…….”
옆에서 운전을 하던 아저씨가 한 손으로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다음 날 대부님께 연락을 받았다. 다른 임시 보호자를 찾아서 보냈으니 염려하지 말란다. 우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제대로 교육도 못 시키고 보낸 주제에 아이들이 자꾸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시 데리고 와서 돌볼 것도 아니면서 보고 싶다고 떠들어 대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문득문득 아이들이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걱정도 되고 한숨도 나왔다. 거기서도 아무 데나 오줌을 싸고 있으려나. 벽지나 장판을 온통 물어뜯다가 혼나거나 매를 맞는 건 아닐까. 난 그래도 애들한테 화도 안 내고 때리지도 않았는데.
아저씨가 동물을 기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아마, 아저씨는 이런 상실감을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 * *
새집을 구하는 일은 빛의 속도로 진행되었다. 우연은 퇴거 명령을 받은 지 딱 3일 만에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때마침 아저씨의 집에서 두 골목 정도 옆에 작은 단독 주택이 나왔다고 했다.
더럽게 낡아 빠진 그 집은 우연의 예상과 달리 무섭게 비쌌다. 평생 게으름 부리지 말고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경건하고도 숙연한 마음을 저절로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마음에 드는 점이라곤, 아저씨의 집까지 살랑살랑 걸어갈 수 있다는 점과 이 집이 지어진 지 38년 되었다는 점, 그러니까 아저씨와 동갑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어쨌든 선택의 여지 따윈 없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아파트나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아저씨를 노출시킬 순 없지 않은가. 아저씨는 이웃에 함부로 노출시키기엔 너무나 잘생기고 능력 있고 세심하고 유명하며 스윗하니까.
아트빌리지의 너그러운(?) 건물주는 권력을 조금 남용해서 우연의 퇴거를 한동안 유예해 주었다. 계약은 빨랐지만, 리노베이션 때문에 서너 달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아저씨는 그 낡은 집을 뼈대만 남겨 놓고 싹 깨부순 후에 지하실부터 지붕까지 낱낱이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우연은 시간이 날 때마다 공사 현장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근무를 땡땡이치고 나와 있는 아저씨를 자주 만나곤 했다.
아저씨는 이런 기회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도무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어, 우연아, 남자 친구가 건설 회사 다니니까 이럴 때 편하지 않아?” 할 때는 뭔가 같잖았지만, 위대할사 사랑의 힘으로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공사가 끝난 집에 들어갈 때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해마다 수백 억 수천 억 공사를 턱턱 수주하는 인간이, 코딱지만 한 집 하나 리모델링하는 데 아주 혼을 갈아 넣은 게 틀림없었다.
중간중간 색깔 포인트가 박힌 하얀 돌벽집이었다. 재질이 뭔지는 몰라도 아주 반들반들 윤기가 도는 게 때도 안 타게 생겼다. 하얗고 높은 돌담에 새파란 대문은 솔직히 눈에 띄긴 했지만 산뜻하고 예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전체적인 콘셉트는 아틀리에였다. 2층에 통창이 난 넓은 작업실이 있는데, 그곳이 이 건물의 메인 공간이었다. 코르크로 마감한 벽과 바닥은 보드랍고 편안하며 조용했다. 그리고 한쪽에 넓은 욕실이 딸린 작은 침실이 있었는데,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작업실 한쪽 구석에는 다락과 옥상으로 연결된 계단이 있었다. 다락의 천장은 선팅 유리로 마감이 되어 있어서 고개를 들면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옥상으로 연결된 문을 열면, 좌우로 아담한 옥상 정원이 펼쳐진다. 식물 킬러로 소문난 마이너스의 손 우연의 특성을 감안한 듯, 자동 스프링클러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노란 방부목이 깔린 바닥도 마음에 들었고, 널찍한 평상도 좋고, 열 명이 둘러앉아도 넉넉할 나무 탁자와 벤치, 파라솔도 있었다. 옥상 난간을 한껏 높여 놓은 건, 외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난간 너머로는 넓은 공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하얀 대리석과 블랙과 골드 소품으로 깔아 버린 1층에는 조그만 벽난로가 있는 홀, 두 개의 손님방, 팬트리, 툭 트인 주방, 넓은 편백 욕조가 있는 욕실, 그리고 널찍한 개방형 발코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층 더 내려가면 반지하 공간이 나온다. 지면에서 한두 계단 정도 내려가서 딱히 지하 같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그곳은 창고와 서재, 보조 주방과 와인 바가 딸린 작은 연회실과 피트니스 룸이 있었다.
다시 말하건대, 아저씨는 이 아틀리에를 만들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으셨다. 이 집을 산 가격보다 리노베이션 비용에 더 많은 것을 때려 부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원은 이사한 날부터 짐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우연의 집에서 출퇴근을 했다. 청소도 하고, 짐 정리도 대신 하고, 필요한 가구와 자그마한 소품들도 머리를 맞대고 골라 가며 새로 주문했다. 배가 고프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까지 슬렁슬렁 걸어가서, 먹을 것을 몇 가지 챙겨 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이원이 아침에 출근하러 내려가면 우연은 눈을 비비적대며 일어나 2층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잘 갔다 와요. 응, 회식 같은 거 안 하고 빨리 올게. 차를 타려던 이원이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준다. 저 싱긋 웃는 얼굴이, 저 넓은 어깨가, 아름답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팔다리의 선이 여전히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 우연은 마냥 홀릴 것 같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두 사람을 보고 피시시 웃는다.
우연은 창가에서 팔을 괴고 이원이 출근하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참 좋았다.
* * *
“강아지들을 입양할 사람이 나타났다고요?”
목소리가 저절로 껑충 올라갔다. 대부님이 수화기 너머에서 껄껄 웃는다.
― 그래. 그동안 임시 보호 하던 사람이 자기가 그냥 기르기로 했대. 그래서 너한테 제일 먼저 알려 주려고.
“아……. 잘됐네요.”
우연은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잘됐다. 참 잘됐는데, 갑자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것 같다.
― 이번 주말에 우리 집으로 한번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어. 얼마나 컸나 좀 궁금하더라고.
우연은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 안 듣고 말썽만 부리다가 막판에 떼 놓으려니까 낑낑대면서 결사적으로 다리에 매달리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이제 오줌은 잘 가리려나. 못 가려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임시 보호자가 입양하는 거니 오줌을 아무 데나 싼대도 특별히 더 구박하지는 않겠지. 얼마나 컸을까. 새로운 이름이 생겼을까. 내가 지어 준 이름은 까먹었을까.
참 부질없다. 어차피 내가 부르는 이름 따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툭 떨어진다. 눈치 빠른 대부님이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다.
― 어? 우연아? 우냐? 아이고, 왜 그래. 우연아? 무슨 일이야!
“신부님, 저도 주말에 가서 한 번만 같이 보면 안 돼요?”
― 왜 갑자기? 네가 키우려고?
“아뇨. 누가 기르든 저보다는 잘 기를 거예요. 그냥,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서요. 얼마나 컸는지.”
― …….
“안 되면 말고요.”
― 안 될 거 뭐 있냐? 그냥 와서 보면 되지.
잠시 망설이던 대부님이 결국 승낙했다. 우연은 전화를 끊고서도 한참 동안 코를 훌쩍거렸다.
“넉 달 동안 얼마나 컸을지 궁금해요. 그때도 세 마리 한꺼번에 안으면 좀 무거웠었는데.”
“허허. 더 무거워졌겠지. 이제 나이가 7개월쯤 됐을 텐데.”
“대소변이나 잘 가리면 좋을 텐데요.”
“못 가리면 그걸 또 어쩔 거야. 그냥 찬찬히 가르치는 게지.”
“저를 기억하기나 할까요?”
“글쎄. 돌대가리가 아니라면 그렇겠지?”
“……그럼 까먹었겠네요.”
우연은 과수원 벤치에 앉아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여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는데, 한낮의 땡볕은 여전히 따가웠고, 그나마 감나무 그늘이 시원했다. 작년에 감이 별로 많이 열리지 않았다더니 올해는 무슨 스프레이로 뿌려 놓은 것처럼 아주 닥지닥지 빽빽하다. 기다리는 녀석들은 영 오지 않고, 엉성하게 쳐 놓은 울타리 앞의 비포장도로에선 먼지만 폴폴 날리고 있다.
아저씨한테 토요일 오후에 약속이 있냐고 물으니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다고, 저녁 늦게라도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데리러 가겠다고 한다. 아저씨는 우연이 차가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다.
혼자 오길 잘했지 뭐.
한참을 더 기다리고서야 저쪽 길모퉁이에서 자동차가 한 대 나타난다. 저 차인가? 9인승 정도로 보이는 흰색 승합차 한 대가 포장이 안 된 길을 덜컹대며 달려온다. 우연은 고개를 길게 빼고 안에 강아지들이 있는지 살폈다. 선팅이 짙게 된 차라서 안에 강아지들이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부르르르릉, 끼이이.
천천히 속도를 줄인 차가 우연이 앉아 있는 벤치 앞에 멈춰 선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는 것 같다. 맞는 것 같은데, 어째 기분이…….
운전석이 덜컹 열리면서, 꽤 낯익은 얼굴이 나타난다. 굉장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연이 네가 왜 여기 와 있니? 오늘 약속 있다며.”
웡웡웡! 웡웡! 컹컹컹! 컹컹컹컹컹!
넓게 터놓은 뒷좌석에서 튀어나온 것은 새까만 강아지 세 마리였다. 아니, 강아지가 아니다. 이미 머리가 허리에 닿을 만큼 커 버린 도베르만 세 마리였다. 우연은 전혀 엉뚱한 개가 온 것 같아 멍하니 녀석들을 내려다보았다.
우연의 주변을 정신없이 돌며 한참 냄새를 맡던 녀석들이 고개를 번쩍 든다. 웡, 웡, 컹컹컹컹! 그중 한 놈이 입이 째져라 웃으며 큰 소리로 짖는다. 우연은 이 목청 좋은 녀석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다.
“진망망! 야, 너!”
반가움은 1초도 가지 않았다. 뒤에 있던 다른 녀석이 맹렬히 돌진하더니 우연을 향해 껑충 몸을 날렸다. 녀석의 앞발이 어깨에 얹히며 푹 안기는 순간, 우연은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하필 제일 덩치 큰 진뭉뭉. 대포에서 쌀 한 가마니가 날아와 정면으로 부딪친 것 같았다.
왕왕왕, 컹컹컹! 웍웍웍웍!
다른 두 녀석들도 우연에게 달라붙었다. 덩치가 송아지처럼 커진 강아지 세 마리가 우연의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고, 핥고, 얼굴을 비비고, 두 발을 번쩍 들고 우연의 목과 어깨에 매달린다. 왕왕, 웡웡, 컹컹컹컹! 우연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채 놈들의 목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야, 이것들아, 너희들 왜 이렇게 컸어!”
컹컹, 멍멍멍, 컹컹, 웡웡!
“누나 허락도 안 받고 언제 이렇게 컸어! 이 배신자들아! 이 나쁜 놈들아!”
“대부님이 아무래도 힘드실 것 같아서…… 입양될 때까지 며칠 정도만 내가 봐 주기로 했었어.”
“아 네에…… 그러셨군요? 야, 너 저리 가. 무거워.”
우연은 자신의 어깨에 함부로 발을 턱턱 얹어 대는 놈들을 걷어차며 같잖은 표정으로 코를 실룩거렸다. 눈앞의 사나이는 상당히 멋쩍은 얼굴로, 그래도 최대한 위엄을 유지하며 변명을 이어 나갔다.
“금방 입양이 될 줄 알았거든. 대부님이 며칠 만에 입양될 거라고 장담을 하시기에.”
“아, 네에, 그러셨겠죠.”
“네가 애들 대소변도 못 가린다고 하도 걱정해서, 그거나마 가르쳐서 보내려고.”
“아 네. 아무렴요. 그래서 대소변은 잘 가리게 됐나요?”
“어, 음. 그럭저럭.”
“그런데 왜 저한테 말 안 하신 거예요?”
“네가 자꾸 보면 입양 보낼 때 정 못 뗄까 봐. 그때 대부님 댁에 놔두고 올 때도 그렇게 울었잖아.”
아하, 또 울까 봐 걱정이 되셨다? 하긴, 아저씨는 자신이 우는 일에 상당히 과민했다. 우연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제가 아저씨 집에 갈 때 얘들은 어디 있었던 거예요?”
“별채에 있었어. 다시 말하지만, 네가 자꾸 보면 나중에 정 못 뗄까 봐.”
대답은 따박따박 잘하시네. 진짜 기가 막혀서. 우연은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럼 대체 왜 갑자기 기르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 우연아. 그건 말이다, 얼마 전에 입양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거든. 피정의 집에서 봉사하시는 은퇴한 노부부가 기르겠다고 하더라고.”
뒤에서 툭 치고 들어온 사람은 대부님이었다.
“그래 이원이한테 바로 전화를 했지. 그런데…….”
“아 잠깐만요. 제가 말할게요, 신부님. 제가, 잠깐만요.”
아저씨가 당황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대부님은 가차 없었다.
“아 근데 저 자식이 통화하다 말고 갑자기 질질 울더라고. 못 보내겠다면서.”
* * *
“그렇게 모조리 까발리시면 제 체면이 뭐가 됩니까.”
이원이 우연이 앉아 있던 벤치에 앉아 투덜거린다. 크고 작은 과일나무 수십 그루가 설렁설렁 얽혀 있는 작은 과수원에 오후 해가 들어서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날이 꽤 더워서 이원은 재킷을 벗고 넥타이도 풀고 와이셔츠 단추까지 두어 개 열어 놓고는 펄럭펄럭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과수원에서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강아지 세 마리와, 녀석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우연을 열심히 따라다닌다.
경서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야야, 네놈이 우연이 앞에서 무게 잡는 거 보면 아주 같잖다. 너나 우연이나 내가 보기엔 똑같이 꼬맹이 아기들이야. 하는 짓도 둘이 아주 똑같잖아.”
“열두 살 띠동갑이 똑같아 보이다니, 문제가 좀 심각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저를 아직도 아기 취급 하는 사람은 신부님밖에 없습니다.”
“너도 여든 살쯤 나이 먹어 봐. 다들 아기 같고 풋풋하고 예쁘고 귀여우니라.”
“나이 자랑이 제일 유치한 거 아시죠?”
“네놈이 한 짓이 더 유치해. 그래 건물주랍시고 우연이를 아트빌리지에서 쫓아냈단 말이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 같으니!”
이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실쭉 웃었다.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입주자 컴플레인이 너무 많이 접수돼서 건물주 파워로도 커버가 안 됐어요.”
“아무리 그래도 매정하게 쫓아내냐! 솔직히 말해 봐. 걔가 여기 와서 네놈의 흑역사를 자꾸 주워듣는 게 싫었던 거지? 네놈 나와바리로 끌고 들어갈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 거지, 응?”
“나와바리가 뭐예요. 신부님 언어생활이 대체 왜 이러십니까.”
투덜대던 이원이 비죽 눈웃음을 치더니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럼요. 이런 기회 잡기가 쉬운가요. 덕분에 무사히 이사를 마쳤으니 신부님께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원이 등을 뒤로 쭉 빼며 싱긋 웃는다. 경서는 기가 막혀서 콧방귀도 나오지 않았다.
“내 언어생활이 어때서? 속은 시커먼 주제에 말만 반질반질 곱게 하는 놈에 비하면 내 마음은 완전히 새하얀 비단결이다 이놈아.”
“어, 신부님이 비단결인 건 모르겠고, 제 속이 시커먼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 순순하게 인정한다. 경서는 콧방귀를 뀌는 대신 킬킬 웃었다.
“야, 진맹맹, 이 바보 멍충아! 거기 안 서!”
빽빽대는 고함 소리가 들린다. 나무들 사이로 강아지라기에는 너무 자라 버린 시커먼 개 세 마리가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줄을 놓친 우연은 빽빽대며 쫓아다니기 바쁘다. 야, 진뭉뭉, 망망! 이 멍충아! 뛰지 마, 뛰지 마라고오, 누나 말 좀 들어어! 쪼오옴! 눈물의 재회를 한 지 30분도 안 되어, 상황은 다시 넉 달 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강아지 세 마리는 여전히 ‘누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 우연이는 새로 이사한 집 마음에 든대?”
“예. 굉장히 좋아합니다.”
“너는?”
“저도 좋죠. 신혼집 같습니다. 어, 음.”
우연과의 일상에 대해 말을 아끼던 이원이 저도 모르게 한마디 하다가 입을 다문다. 하긴. 혼인 성사도 안 치른 채 함께 살 맞대고 지내는 이야기를 사제 앞에서 편히 털어놓긴 쉽지 않을 것이다. 경서는 시큰둥하게 툭 내뱉었다.
“그냥 계속 그러고 살 거야?”
“…….”
“혼인 신고는 그렇다 쳐도, 혼배 성사도 생각이 없는 거냐?”
경서는 우연과 이원이 왜 그런 형태로 지내고 있는지 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원에게 구구절절 조언을 하거나 나무라는 대신 계속 말을 아껴 왔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이원이라면, 법적으로 실질적인 구속력이 생기는 혼인 신고나 결혼식은 접어 둔다 하더라도 해도, 하느님 앞에서의 서약인 혼인 성사만큼은 포기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 기다려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힐끗 곁눈질을 하자, 고개를 수그린 채 덤덤하니 웃고만 있는 이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서는 새파란 하늘을 응시하며 펄그러펄그럭 부채질을 했다.
“혼인 성사가 별거냐. 신부님 한 분 모시고, 그냥 둘이 손 꼭 잡고서, 하느님, 이 사람을 저한테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들 싸우지 않고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하면 되는 게지.”
가정의 신학적인 의미라든가, 정체성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것을 접어놓고 보면, 혼인 성사는 결국 하느님 앞에서 두 사람이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가겠다는 약속이다. 함께 살아가는 형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도 ‘하느님이 저 사람을 나에게 인도하시고 짝으로 맺어 주셨다’는 믿음이 혼인 성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원의 믿음은, 그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적어도 경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 하하. 그건 그렇죠.”
이원이 소리 내서 웃는 것으로 대답을 얼버무린다. 경서는 다시 시선을 돌리고 혀를 끌끌 찼다. 끄트머리에 가는 한숨이 딸려 나오는 것을, 경서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네가 어련히 숙고해서 내린 결정일까만, ……지금 너를 나무라려고 하는 말은 아니야.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라면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까 싶어서 그런다. 미사도 그렇게 꼬박꼬박 나가면서, 성체도 못 모시고…….”
이원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염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나한테야 미안할 게 뭐 있누.”
두 사람이 펄럭펄럭 부채질하는 손이 느릿해진다. 해는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고, 주변으로 눅진하고 부드러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우연은 저쪽 과수원 끄트머리까지 달려가더니 나무에 기대서 주저앉는다. 컹컹, 웡웡, 왕왕, 개들이 신나게 꼬리치며 짖는 모습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이원이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끌어안고 같이 살아가는 건 어떤 모습일까, 오랫동안 생각해 봤습니다. 당연히 낭만적이고 멋진 일은 아닐 거고, 오히려 길고 지루한 투병 생활에 동참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았어요. 나만 믿어, 하는 말 한마디로 낫는 상처면 좋겠지만, 죽을 때까지 낫지 않는 상처도 있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경서는 속으로 아프게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사랑이 모자라서, 이기적이고 자기 실속 계산을 굴리느라 이런 관계를 선택한 것이 아니란 건 경서도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바람이 불어서 두 사람의 옷깃 사이로 시원하게 스며들었다.
“우연이는 제 청혼을 거절한 일에 대해서 큰 부채 의식을 갖고 있어요. 저보다 우연이가 훨씬 더 괴로워하고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전 우연이가 부채 의식으로 결혼해 주길 바라는 건 정말 아닙니다.”
경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을 아끼자 이원은 속에 깊이 감춰 두었던 말을 점점 더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연이가 청혼을 거절했던 건, 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자기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것 때문에 나중에 저에게 큰 고통을 주게 될까 봐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아직 치유되지 못한 상처겠죠. 거기에 대고 ‘왜 상처가 빨리 낫지 않아서 나를 불편하게 하냐’고 따지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덜 아파질 날도 올 게고, 어쩌면 안 아파질 날도 올 게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저는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그러냐.”
“만일 먼 훗날에라도, 감사하게도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신부님 말씀대로 우연이랑 나란히 손잡고 혼인 성사를 드릴 수도 있고, 더 나가서 결혼식이나 혼인 신고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에도 저는 우리가 떳떳하게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경서는 대거리를 하는 대신 말을 아끼며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 일에 대해 마음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원은 의외로 차분하고 담백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연이가 아픈 상처에서 온전히 벗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훨씬 기뻐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그분도 똑같은 마음이 아니실까, 감히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허, 이놈 말하는 것 보게. 경서는 혀를 차면서도 이원의 말을 트집 잡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원아, 나도 이 나이가 먹도록 그분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구나. 어떻게 너 같은 녀석 옆에 우연이를 데려다 놓으실 생각을 하셨을까. 허우대만 멀쩡한 쫌생이가 멘탈 다 깨져 나갈 게 뻔히 보였을 텐데.”
“하, 하, 하하하. 맞습니다. 개박살 났죠.”
이원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박살 난 멘탈 뒤로 새로운 세상이 보였구요.”
속도 좋은 놈. 잘도 웃네. 경서는 옷깃까지 들춰 가며 다시 부채질에 몰두했다. 이원의 시선이 우연을 떠나 아득하게 먼 곳을 향한다.
“코페르니쿠스의 발칙한 이론은 당시엔 파문에 해당하는 죄였잖습니까. 옛날 사람들이 믿던 하늘이란, 땅을 감싸고 있는 둥그런 바가지 형태였는데 그걸 박살 냈으니까요. 둥그런 바가지를 부정하는 것은 그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도 함께 부정하는 거라고 생각했겠죠.”
팔락팔락, 부채질 사이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흘러 나간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죠. 그 작고 동그란 하늘이 깨졌을 때, 사람들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150억 광년의 우주를 창조하신, 광대하고 능력 있는 하느님을 새로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허허.”
“그분께서는 저한테도 더 넓고 광대한 우주를 보여 주고 싶으셨던 거겠죠.”
진우연, 내가 갇혀 살아가던 둥글고 작은 하늘을 깨뜨리고 나타난 새로운 하늘. 더욱 넓고, 더욱 눈부시고, 더욱 새롭고, 더욱 아름답고, 삶의 환희가 무한하게 넘치는, 150억 광년의 광대한 우주.
이원은 고개를 위로 쳐들고 눈을 감았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가닥이 팔뚝에서 따끔따끔하고,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보드라운 바람도 느껴진다. 멀리서 들리는 우연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전신을 간질인다. 허허, 이놈 보게. 기가 막힌 듯이 비죽대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 참. 네놈이 신부님 안 된 게 천만다행이네. 이런 소리를 강론 시간에 떠들고 다녔으면 어쩔 뻔했누. 그래, 그분이 또 다른 말씀은 안 하시든?”
“자, 어떠냐, 내가 주선한 소개팅이 마음에 드느냐, 하시죠.”
“얼씨구,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고맙습니다, 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우연이를 저한테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 싸우지 않고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렸죠.”
“너 혼자?”
“예.”
“이런 멍충한 놈을 봤나. 그런 약속을 혼자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 둘이 나란히 손잡고 해야 맞는 거지. 확인 키스도 하고.”
“아, 그러네요.”
이원이 눈을 감은 채 무심하게 웃는다. 경서 역시 심드렁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놈아, 제대로 들은 게 맞냐. 정말 그분이 소개팅을 주선하셨으면 두 사람에게 똑같이 물어보셨겠지, 너한테만 물어보셨겠냐.”
“아, 듣고 보니 그도 그러네요.”
“아이구 이런 싱거운 놈 같으니. 역시 신부님 되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니까. 그래, 내가 네 승부사 기질을 개화시켜서 CEO로 만들었던 게 정말 신의 한 수였어!”
두 사람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더위를 식혔다. 해가 이윽히 기울어져 산마루에 느직하니 걸린다. 세 마리 강아지와 넘치도록 회포를 풀었는지, 나무 아래 앉아 있던 우연이 세 놈의 리드줄을 잡고 나무 아래서 일어난다. 이원이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그만 놀고 이리 와! 더위 먹는다!”
이원이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세 녀석이 왕왕대며 이원 쪽으로 달려온다. 우연은 녀석들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꽥꽥 고함을 질러 대며 줄줄 끌려온다.
어머나, 이거 야단났다.
녀석들을 만나서 반가운 건 반가운 건데, 도무지 통제를 할 수가 없다. 힘이 세도 너무 세다. 예전에는 세 녀석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버티기 버겁다 싶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한 놈만 뛰어올라 안기면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멈춰, 기다려, 따위 자신의 명령은 한마디도 먹히지 않는데, 아저씨가 저 멀리서 오라는 말 한마디에 세 마리가 경주마처럼 한꺼번에 달려 나간다. 혼신의 힘으로 당겨도 멈추는 건 고사하고 질질 끌려갈 뿐이다. 이 정도 힘이면 차라리 전차를 끄는 게 낫겠다. 대체 뭘 먹었는지, 무슨 지옥 훈련을 받았는지, 온몸이 강철 같은 근육 덩어리로 바뀐 듯했다.
나무 그늘에 놓인 벤치에 앉아 편안히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이 작은 과수원은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편이라 두 사람의 웃음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아니 나는 이렇게 정신없이 휘둘리고 있는데, 명색 멍멍이들의 주인장께서는 무슨 수다를 저렇게 떨고 계시나.
“뭉뭉이, 맹맹이, 망망이, 앉아.”
아저씨의 발치까지 신나게 달려간 세 녀석이 그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 바로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인다. “엎드려.” 하는 부드러운 한마디에 녀석들이 동시에 고개를 폭 박는다. 상당히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아저씨라면 봐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저씨야 뭐, 유기묘 동아리 집사모의 전설이 아니던가. 무려 고양이에게 서커스를 가르칠 수 있다는 괴담까지 돌 정도니까.
아저씨가 빙그레 웃더니 한쪽으로 비켜 앉으며 자리를 내어 준다. 아저씨가 앉았던 자리는 따끈따끈했지만 괜찮았다.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대부님은 옷깃까지 펄럭이며 부채질이고, 아저씨는 우연에게 슬렁슬렁 부채질을 해 주고 있다. 개들은 앞에 앉아 꼬리를 흔들고, 햇볕은 많이 누그러졌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감나무 잎사귀 사이로 뾰족하니 파고든 햇빛 조각이 세 사람 위에서 잘게잘게 부서진다. 주변으로 내려앉은 온화한 침묵은 기이할 정도로 포근했다.
뭔가 이상하다. 부드러운 공기가 주변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따뜻한 기운이 이 과수원을, 아니 이곳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포옥 끌어안고 도닥여 주는 느낌이었다.
……정말 좋구나.
옆을 돌아보았다. 혹시 두 사람도 비슷한 걸 느끼고 있는 걸까? 대부님은 먼 산을 바라보며 태평하게 웃고 계셨다. 느릿느릿 합죽선만 흔들고 있는데, 그 주름진 얼굴이 그렇게 평화롭고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부채질마저 그만둔 채 고개를 위로 들고 있다.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엷은 미소만 머금은 채 느릿하게 숨을 쉬고 있다.
세 사람 사이로 자연스럽게 침묵이 내려앉는다. 우연도 몇 번 접해 본 적 있는, 위화감 하나 없는 편안한 침묵이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낙조를 배경으로 먼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특유의 고결하고 경건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었다. 그 아름다운 장면은 그들을 둘러싼 고요함과 어우러져 신비하게, 아니, 장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연은 천천히 생각을 더듬었다.
그래. 신학교에는 대침묵이라는 시간이 있다고 했다. 아저씨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귀히 여겼던 시간.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잠잠히 잠재우고,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누군가를 깊이 만난다는 시간.
그 침묵 시간이 바로 이런 분위기 아니었을까.
우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대침묵 시간에는 정말 하느님과 대화를 하나요?”
“음,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깊은 뜻을 깨닫기 위해서 노력하지.”
우연은 이원처럼 뒤로 등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정말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에 함께 젖어 드는 느낌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대부님이 툭, 끼어들어 묻는다.
“왜, 우연이 너한테도 하느님이 무슨 말씀을 해 주시는 것 같으냐?”
우연은 난처하게 웃었다. 아저씨를 이렇게 보고 있노라니, 새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로 화닥화닥 열이 오르고, 저도 모르게 어떤 열렬한 마음이 솟아오르긴 한다.
물론, 다른 사람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엔 꽤 쑥스러운 내용이었다. 아저씨는 몹시 창피해할 거고, 대부님은 인정사정없이 놀릴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속에서 솟구치는 목소리가 너무 강렬해서, 우연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어, 그게 말이죠……, ‘어떠냐, 옆에 있는 저놈 꽤 괜찮지 않냐? 내가 소개해 준 저 녀석이 마음에 드냐?’ 하시는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우연은 멋쩍게 웃었고, 강아지 세 마리는 헥헥거리며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한참 후, 아저씨 대신 대부님이 물었다.
“허허, 참.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냐?”
“뭘 뭐라고 대답해요. 네, 최고로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저희 늙어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고,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하고 약속드렸죠.”
허허허. 대부님은 부채질을 멈추고 소리 내서 웃고, 아저씨는 그저 눈을 감은 채 빙그레 웃었다.
잠시 후 대부님이 웃음기가 걷힌 목소리로 자분자분 말했다.
“우연아, 하느님께는 약속 같은 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법적인 강제력이나 구속은 없지만, 그분 앞에서 한 약속에는 허언이 없어. 혹시라도 장난이나 농담을 한 거면…….”
“농담한 거 아닌데요.”
우연은 눈을 내리깔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내색은 안 하고 있었지만, 우연은 이원에게 늘 미안했다. 이원은 현재만 존재하는 사랑, 사랑만으로 정의되는 관계를, 오로지 우연을 위해 감수하고 받아들였다. 우연은 그것이 이원에게 얼마나 큰 희생이며 양보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우연은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슨 일이든, 어떤 것이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모두 이루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장래를 약속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엄마 아빠처럼 될 수도 있다는 걱정,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공포는 노력으로 없애거나 의지로 잊을 수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오면, 아저씨를 바로 놓아드리는 게 옳지 않을까.
그것이 우연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하지만 법적으로 보호되는 관계라면 아저씨는 끝까지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연은 그가 긴 세월 동안 처참하게 부서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속수무책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진 관계란 죽음보다 끔찍했지만, 겪어 보지 않은 아저씨는 그걸 모른다. 우연은 그 끔찍한 고통을 아저씨가 조금이라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상실의 고통은 그보다는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우연은 여전히 애처롭게 믿었다.
다만, 그에게는 늘 말해 주고 싶었다.
사실 나야말로 당신과 함께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었다고.
연인이라는 이름으로든, 반려자라는 이름으로든, 혹은 삶의 동반자라는 이름으로든.
당신과 함께,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두려워서,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 차마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당신을 볼 때마다 그렇게 고백하고 싶었다고.
우연은 대부님이 한 말을 찬찬히 되뇌었다.
법적인 강제력이나 구속은 없지만, 허언이 없는 약속.
나쁘지 않다. 더욱이 아저씨가 가장 사랑하는 분의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이라면, 그동안 아저씨에게 품고 있던 이 마음을 솔직하게 보여 주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우연은 발끝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되풀이했다.
“장난으로 말한 거 아니에요. 저, 정말로 앞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아저씨만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했어요.”
“흠. 그렇구나. 그럼 이원이 넌 할 말 없냐.”
“저도 늙어 죽을 때까지 우연이만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아저씨가 덤덤한 목소리로 우연이 한 말을 되풀이한다. 대부님이 다시 허허롭게 웃더니, 부채로 아저씨 등짝을 짝 소리가 나도록 후려갈기며 투덜거렸다.
“이놈아, 그렇게 약속을 하고 난 다음엔 확인 키스도 해야 한다니까.”
우연은 눈을 데구르르 굴려 대부님을 곁눈질했다. 뭐지, 이 뜬금없고 이상한 말은?
“……어?”
더 뜬금없는 것은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연 앞으로 와서 허리를 굽힌다.
어? 어? 어?
우연은 얼이 빠진 채 점점 가까워지는 아저씨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아저씨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아저씨? 농담이죠? 장난이죠? 나, 나야 원래 발라당 까지고 가리는 거 없는 인간이라 상관없지만, 아저씨처럼 음전하고 수줍음 많은 사람이 대부님 앞에서 이런 짓을 할 리가아……?
우연이 기가 막혀 꼼짝 못 하는 사이, 그가 두 손으로 우연의 뺨을 잡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엄마야 세상에, 이게 무슨……?
입술이 맞닿았다. 우연은 머리가 휑하니 비어 버린 채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입맞춤은 깊지 않았지만 오래 이어졌고, 달콤하다기보다 경건하고 엄숙했다.
아저씨는 잠시 후 다시 옆자리에 앉아 우연의 손을 잡았다. 아저씨의 얼굴에는 이제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옆에 계시던 대부님이 부채를 내려놓고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개 얹더니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당신께서 맺으신 것은 인간의 힘으로 풀 수 없으리니, 이원이하고 우연이가 당신 앞에서 맺은 약속도 일평생 굳건히 지켜 나가리라 믿나이다. 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두 사람을 축복합니다.”
강복기도라도 해 주신 걸까? 우연이 눈만 깜박거리며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자, 잠시 머뭇거리던 대부님이 결국 입속에 남은 말을 중얼중얼 쏟아 놓고야 말았다.
“만약 이 아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쌈박질이나 해 대면, 제가 올라가서 등짝을 한 대씩 때려 줄 권리를 허락하소서.”
아, 그럼 그렇지. 우연이 쿡쿡 웃음을 삼키자, 대부님도 곁눈으로 우연을 바라보며 씩 웃는다. 그러더니 다시 시선을 산마루로 돌리고 느릿느릿 부채질을 시작했다.
우연도 대부님을 따라 산마루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 순간의 깊이가, 약속의 무게가 점점 크게 느껴진다. 아저씨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 분위기는 뭔가 이상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가슴에 꼭꼭 눌러놓고 있던 말을 겁도 없이 해 버린 건데, 후회는커녕 속이 후련하고 안심이 된다.
……계속 미뤄 둔 어려운 숙제를 해치운 것처럼.
옆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우연의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그의 허리가 천천히, 천천히 아래로 구부러진다. 깊이 내려간 상반신이 허벅지에 바짝 붙는다. 무릎 위로 고개가 맞닿아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방은 여전히 고요하고 평온했다. 우연은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안았다. 그의 둥글게 구부러진 등이 느리게 오르내리며, 푸석푸석한 흙 위로 물방울이 연이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우, 후으, 흐으, 후우. 그는 깊은 날숨을 쉬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오랫동안 흐느꼈다.
* * *
“사모님, 오셨습니까.”
“아우우, 할머니! 쪼오옴!”
“어머나, 뭘 그렇게 놀라세요. 이제는 좀 익숙해지셔야죠, 호호호호.”
우연은 은근슬쩍 바뀐 호칭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송 할머니는 물론이고 민정 언니, 심지어 믿었던 홍빵맨 실장님까지 진 화백님, 사모님, 하면서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최 실장님은 이원메세나재단에서 후원받는 학생들과 형 동생 하며 격의 없이 지내는 터라 우연에게도 처음에 말을 놓았다고 했는데, 그분마저 배신을 해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도 태연하게, 위화감 하나 없이 극존칭으로 갈아타 버렸다. “제가 원래 낯이 좀 두꺼운 편이죠.” 하면서 싸르르 눈웃음치는 것까지 완벽하다. 아 진짜, 최 실장님은 영업부로 가셨어야 했는데.
“익숙해질 때까지 조금만 참아 줘. 네가 언제까지나 스물여섯 스물여덟은 아닐 텐데, 계속 아가씨로 불러 달랄 수는 없잖아.”
아저씨 역시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기는 하지만, 양보는 해 주지 않는다. 그걸 보면 아저씨가 직접 호칭에 대한 언질을 했던 모양이다.
대체 언제부터 바뀌었더라. 아저씨네 집 근처로 이사 온 후부터? 대부님 집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세례받고 아저씨네 어머니가 쓰시던 미사보와 묵주 반지를 물려받은 다음부터? 아니면 내가 답례로 똑같은 묵주 반지를 선물해 준 다음부터? 영 애매하긴 하다.
이원은 우연이 선물해 준 백금으로 된 묵주 반지를 죽으나 사나 끼고 다녔는데, 심지어 운동할 때나 목욕할 때도 절대 빼놓지 않아서 가끔 장식 사이에 때가 끼었다. 그래서 우연이 몇 달에 한 번씩 억지로 뺏어서 치간 칫솔로 구석구석 낀 때를 벗겨 주어야 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과 일상을 유지하면서도, 보고 싶거나 볼일이 있으면 별도의 연락 없이 무시로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다. 서로를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개인의 영역도 남겨 두는 것으로 무언의 결론이 난 듯했다.
적절한 거리감은 서로의 삶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게 해 주었고, 사랑하기 때문에 곁에 머무른다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끊임없이 확인하게 해 주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썩 나쁘지도 않은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송 할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도우미들을 달고 홀연히 나타나서는 냉장고 내용물 교체 및 분리수거와 청소를 해 주고 표표히 사라지곤 했다. 본가와 우연의 집을 사랑채와 안채 정도로 생각하시는 듯했다. 우연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는 손님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도우미를 보내 주기도 했다.
이원의 집에 갈 때마다 그녀를 가장 열렬하게 맞아 주는 것은, 맹할 맹 자를 쓰는 맹견 삼형제였다. 대체 놈들의 성장기는 언제 끝나려는지, 볼 때마다 무섭게 자라는 것 같았다. 가장 마른 망망이조차도 우연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고, 번쩍 몸을 일으키면 우연보다 키가 커졌다.
우연이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현관 옆 그늘에서 빈둥대던 세 녀석이 커다란 소리로 짖으며 엄청난 속도로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온다. 한 번 도약할 때마다 1미터씩 위로 튀어 오르는 것 같다. 저건 개가 아니라 아주 말이다, 말. 우연은 저걸 그대로 안아 주면 뼈가 부러질까 안 부러질까 짧은 고민에 빠진다. 고민은 1초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우연은 문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코앞으로 들이닥친 맹견 삼형제를 향해 기다려어어! 앉아아아! 목이 터져라 외친다.
맹견 삼형제는 우연과 이원을 개족보로 만들었다. 우연은 놈들의 ‘누나’인데 이원은 놈들의 ‘아빠’였다. 이원은 사회적 체면상 도저히 ‘얘들아, 형한테 와.’라고 할 순 없다고 버텼고, 우연은 도저히 ‘엄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와 ‘누나’와 세 아이들은 여전히 개족보 상태로 사이좋게 살았다.
한때 누님의 말을 껌처럼 씹어 대던 삼형제는, 아빠의 말에는 껌벅 죽었다. 안 돼, 기다려, 손, 앉아, 엎드려, 누워, 돌아, 가져와, 뛰어, 멈춰, 굴러 정도는 신기한 축에도 들지 않았다. 녀석들은 현관문을 앞발로 열고 마당에 나가서 놀 줄 알았고, 들어올 때는 비밀번호 대신 초인종을 눌러서 사람을 부를 줄도 알았다. 아침에 신문을 가져오고, 배고프면 간식 봉지를 물고 와서 뜯어 달라고 하고, 로봇 청소기를 돌리고, 서재에 책을 갖다 놓고, 빈 과자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려 주고, 냉장고를 앞발로 열어서 생수 한 병을 갖다 주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더 놀라운 것은, 우연과 있을 때는 그렇게 대소변을 못 가리던 놈들이, 무려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저씨는 1층 테라스 한구석에 강아지 전용 수세식 화장실을 하나 만들었는데, 녀석들이 그곳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물 내리는 줄을 입으로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알아듣게 얘기하고 강아지 인형으로 시범도 보여 주고 몇 번 시켜 보니까 잘하던데?”
아저씨는 이렇게 말 잘 듣는 아이들을 왜 그렇게 구박했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이제 아저씨는 그 아이들에게 숫자를 가르칠 생각인 듯했다.
아, 이제 알겠다. 눈앞에 있는 저 잘생긴 남자는 전생에 프란치스코 성인이고 둘리틀 박사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되며,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야, 이 자식들아! 감히 어디에 기어 올라와, 안 내려가?”
우연이 아침 일찍 이원의 집에 가서 침실 문을 활짝 열면, 늘 똑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다. 침대에 엉겨서 꿀잠을 자고 있는 시커먼 멍멍이 세 마리와, 놈들에게 밀려서 한쪽에서 찌그러져 자고 있는 침대 주인의 모습이다.
우연이 달려가 녀석들에게 등짝 스매싱이라도 날릴라치면 아저씨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황급히 녀석들을 발로 밀어 낸다.
“얘들아, 튀어, 얼른 튀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썽꾸러기 세 녀석은 번개처럼 도망친다. 놈들은 도망을 칠 때도 캥거루처럼 뛰고 치타처럼 달려서, 우연은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우연이 함께 자고 있을 때는 침대 근처에 얼씬도 못 하는 놈들이, 조금이라도 방심했다 하면 귀신같이 기어 올라와서 아저씨와 자고 앉았다.
녀석들의 피부병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아니, 아저씨 말로는 피부병이 아니라 영양 부족이랬다. 그동안 영양 관리, 스킨케어, 모질 관리와 빗질을 얼마나 빡세게 했는지, 세상에 까만 털에 기름이 반지르르해서 하루살이가 앉아도 미끄러지게 생겼다.
정식으로 입양이 된 후, 녀석들은 우연의 말도 제법 잘 듣게 되었다. 아저씨 말처럼 절대복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나’가 ‘아빠’의 짝이라는 것을 대충 눈치챈 듯했다. 아니, 머리가 좋은 녀석들이니, 누님 말을 안 들으면 아빠가 단호하게 응징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휴 영악한 것들. 권력의 이동에 이리도 민감하고 줄서기에도 이렇게나 탁월하니, 장차 정치판에 나가면 크게 출세할 것이다.
2층 작업실에서 일을 하던 우연은,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일을 잠시 멈추고 거리를 내려다본다. 아저씨는 개 세 마리를 데리고 저녁마다 이 앞을 지나간다. 칸트의 지팡이 소리처럼, 항상 똑같은 시간이다. 개들은 기운차게 달리고, 아저씨도 힘껏 달린다. 다리가 긴 아저씨는 넓은 보폭으로 개들보다 앞서 달린다.
우연은 창문을 열고 내려다본다. 아저씨, 이따 가는 길에 올라와요. 수박 사 놨어요. 냉장고에 있어서 시원해요. 아저씨는 달려가면서 손을 흔든다. 알았어. 조금 이따 올라갈게! 세 마리 개들이 좋아라고 짖어 댄다. 누나누나 나도 줘, 나도 수박 줘, 웡웡웡. 아빠만 입이고 나는 주둥이냐 웡웡웡, 주둥이래도 좋으니 한 입만 줘, 왕왕왕.
30분 정도 지나면 대문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얘들아, 발 닦고 들어가! 뭉뭉아! 발!” 현관에서 아저씨가 녀석들에게 잔소리를 해 댄다.
“우연아, 나 왔어. 샤워 좀 하고 올라갈게.”
우연은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수박을 꺼낸다. 칼질은 여전히 서툴러서 비뚤비뚤하지만, 어쨌든 수박 반 통을 모조리 썰어 커다란 쟁반에 푸짐하게 담아 옥상으로 올라간다.
샤워를 마친 아저씨가 민소매 셔츠와 짧은 바지만 입고 슬렁슬렁 계단을 올라온다. 여기 속옷을 갖다 둔 게 떨어졌을 텐데, 아저씨가 지금 팬티를 입었을까, 노팬티일까. 우연은 그의 사회적 체면을 고려해서 대놓고 물어보는 대신 혼자 즐겁게 상상만 하기로 한다.
한때 수영할 때도 전신 수영복을 입는다던 사나이는 이제, 민소매와 반바지의 신세계 앞에서 자신의 신념과 아이덴티티 따위는 가뿐하게 날려 버린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후드드후드드 털면서 올라오는 사나이 옆으로 맹하고 어여쁜 맹견 세 마리가 경호원처럼 왈왈대며 따라붙는다.
시원한 바람이 드는 평상에 앉아, 우연과 이원은 수박을 먹었다. 목이 무척 말랐던 이원은 말도 없이 한참 동안 먹는 데만 열중했다. 운동량이 엄청나다 보니, 먹는 양도 엄청났다.
다리에 달라붙은 세 녀석은 수박 쪼가리를 얻어먹느라 부산하다. 우연은 껍질에 가까운 쪽을 주려 하는데, 이원은 제일 맛있는 빨간 부분을 아낌없이 나눠 준다. 많이 주면 얘들 설사해, 서로 잔소리를 하면서도 둘 다 떼어 주는 손을 멈출 수 없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강아지들 코앞에서 간식을 나눠 주지 않고 버티는 건 그 누구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도 멍멍이들이 상 밑에서 간식을 얻어먹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잖은가. 그 말을 한 게 누군지는 잊어버렸지만.
썰어 놓은 수박이 모조리 없어졌다. 우연은 두 사람이 수박 반 통을 모조리 먹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기로 한다. 산더미 같은 껍질은 쓰레기봉투에 담아 대충 치워 놓고, 다락으로 기어 들어가 벌러덩 눕는다. 바닥엔 아직 열기가 남아 미지근했고, 활짝 열어 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밤바람은 시원했다.
아저씨가 옆에 누워 한쪽 팔을 내미는 것을, 우연은 사양하지 않는다. 팔베개를 베고 나란히 누워 위를 보자, 유리로 된 천장을 통해 눈매가 고운 초승달과 천천히 먹빛으로 물들어 가는 창대한 하늘이 보였다. 아저씨의 한쪽 손이 우연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좋다, 아 좋다. 정말 좋다. 졸음에 겨운지 그의 목소리가 눅진눅진 초콜릿처럼 녹아내린다.
“150억 광년, ……나의 광대한 우주…….”
아저씨가 설핏 잠에 빠지며 잠꼬대를 한다. 그의 잠꼬대는 가끔은 우스웠고, 가끔은 난해했다. 우연은 그의 가슴에 바짝 달라붙었다.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의 심장 소리는 여전히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