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눈꼴시다 그들의 연애 행각
[오빠오빠~♡ 점심시간이지?]
지잉, 지잉, 하는 진동음이 어째 불길하게 들린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머리에 벚꽃을 잔뜩 뿌리고 찍은 광년이 프로필 사진이 맨 위로 떠오른다.
채팅방 이름: 티라노홍시
홍연은 속으로 길게 탄식했다. 저놈의 하트를 보니 두 배로 불길하다. 짠빵맨, 홍빵맨, 뚱땅배 따위 온갖 모욕적인 별명을 다 갖다 붙인 원흉이자 30년째 자신의 주적 1호인 동생 최홍시다. 특히 그 인간이 ‘사랑하는 오빠’나 ‘오빠~♡’, ‘오빵’ 하고 불렀을 때, 홍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은 거의 없었다. 가히 오빠 징크스라고 할 만했다.
[티라노홍시: 사랑하는 동생에게 밥 좀 사 줘라~♡ 배고프다.
최홍연: 내가 왜? ‘박봉 직장인’ 어쩌고 디스가 만발할 땐 언제고?
최홍연: 나보다 두 배는 잘 버신다는 늬네 ♡남치니♡한테 사 달라구 해.
티라노홍시: 뭐래 그건 님이 사랑스런 동생 남친을 백수 취급 하니깐 그랬지.
티라노홍시: 그리고 나 쫌 전에 그 ♪?♪랑 헤어져서 그건 좀 곤란.
최홍연: 뭐뭐뭐뭐? 왜!
티라노홍시: 양다리.]
역시나 날벼락. 순식간에 맹렬한 동료애와 전투 본능이 차오른 홍연은 두다다다 자판을 두들겼다.
[최홍연: 왓ㅂ. 그새끼 주제도모르고 아주꼴갑지랄 그걸걍냅뒀어? 갯소양아치같은색기
최홍연: 야 똥시 너 지금 어디야?
티라노홍시: 마포 대교.]
머리가 띵, 울렸다. 오 마이 갓. 얘가 답지 않게 왜 이래. 거기서 마포 대교가 왜 나와? 손가락이 타키온 입자처럼 빨라진다.
[최홍연: 야! 홍시, 홍시야. 너 거기서 질질 짜지 말고 당장 나한테 와.
최홍연: 딴생각하지 말고 일단 전화부터…….
티라노홍시: 짜긴 뭘 짜 여드름을 짜냐ㅋㅋㅋㅋㅋㅋ 여드름은 짜면 시원하기나 하지.
티라노홍시: 근처 온 김에 오빠랑 밥이나 먹게.]
손가락이 딱 멈춘다.
에효, 그래, 오늘도 생쥐가 고양이 걱정을 했다. 헤어진 건 핑계고 근처에 온 김에 밥이나 얻어먹겠다는 거군그래.
홍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애에 적극적인 비혼족’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달리 만남이나 헤어짐이나 얼마나 쿨하신지 모른다.
‘마음이 없어졌다는데 어쩔 건데? 매달리고 노력한다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냐?’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맘 떠났는데 안달복달 들러붙으면 짜증만 나. 피차 빨리 놔주는 게 삼생의 덕이야.’
동생의 평소 지론은 살벌할 정도로 쿨내가 났다. 여자 친구와 헤어질 때마다 지질지질 울고 퍼마시고 이틀쯤 병가 월차를 내야 하는 자신과 달리, 동생은 애인과 헤어질 때 큰 상실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상실감을 느낄 정도로 푹 빠져서 허우적대는 일 자체가 없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동생을 입맛대로 휘둘러 보려다 반나절 동안 개욕을 먹어 가며 정신 개조를 당한 후 걷어차인 놈도 있었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똘똘하고 단호해서 ‘센 언니’ 소리 좀 듣고 살았는데, 그 기질은 어른이 돼서도 잘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홍연은 가끔 동생이 무서웠다.
[티라노홍시: 점심시간 12시 맞지? 회사 앞에 그쯤 도착할 거야.]
시계를 힐끗 보니 벌써 12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인간은 역지사지 능력이 모기 날개만큼 얄팍하야, 비서실장이라는 직업의 애환을 잘 모른다. 명색 수행 비서가 ‘전무님, 점심시간 됐으니 전 이만 식사 좀 하고 들어오겠습니다. 한 시간 후에 뵈어용.’ 하고 나갔다가 1시 15분쯤 커피 쭐쭐 빨면서 들어가면 되는 줄 안다.
[최홍연: 야, 난 전무님이랑 식사해야 해서 안…….]
부다다다 핑계를 대려고 하는데 앞에서 차분하게 산통 깨는 목소리가 들린다.
“최 실장님, 오늘은 제가 늦게 점심 약속이 있으니까, 먼저 식사하고 오세요.”
“아, 약속이 있으십니까? 식당 예약을 해 둘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오후에 좀 늦게 들어올 텐데, 연락 오는 것 중에서 급한 것만 문자로 알려 주세요.”
“예, 전무님.”
오호, 우연 씨하고 약속이 있군그래.
거래처와 미팅이 있는 경우, 이원은 으레 홍연이나 황창희 과장 혹은 실무 담당자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처럼 혼자서 나가고, 늦게 들어올 거고, 전화도 안 받겠다는 건, 오후 근무를 땡땡이치고 데이트를 즐기겠다는 거다. 아무리 대표이사라도 책정된 연봉이란 게 있으니, 땡땡이라고 보는 것이 백번 옳지 않겠는가.
그래애, 바야흐로 춘풍이 살랑살랑 꽃향기 말씬말씬, 물오른 봄날이 아니더냐. 이런 날, 애인이 있으면 당연히 연애를 하고 싶겠지.
물론 애인님께서 여의도까지 행차하기는 좀 만만찮겠지만.
아, 우연 씨 수업 없는 날이니 별 상관 없으려나? 어휴.
인간 진우연의 학교생활에 생각이 닿는 순간 조건 반사처럼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나저나 그놈의 학교는 대체 언제나 졸업한대?
풋풋하던 그녀가 설레는 마음으로 서림예대에 입학한 지 어언 7년, 입학 동기들도, 군대 갔다 온 동기들도 모조리 졸업하고, 바야흐로 8학년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참 감개무량, 아니 비분강개할 따름이다. 올해도 영어와 제2외국어와 펑크 난 교양 필수 과목을 패스 못 하면 서림예대 최초의 8학년생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잠깐만, 그런데 대학을 8년쯤 다니면 제적 아닌가?
아닌가? 연속 학고 4회만 아니면 괜찮은가? 학교마다 다 다른가?
홍연은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대학 8학년이라는 게, 엄친아 엄친딸처럼 흔한 건 아니니까. 그나마 졸업장이라도 받겠다고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게 나름 대단하다 싶다.―……기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이원 이사장 역시 대단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원메세나재단은 학사 경고를 쿠폰처럼 적립하는 학생들까지 장학금을 줄 만큼 너그럽지는 아니하여, 결국 이사장님께서 친히 사비로 학비 땜질을 하는 중인데, 8학년 고지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잔소리 한마디 없다. 이쯤 되면 대인배를 넘어 도인이나 산신령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다소 의외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홍연은 우연이 바로 이원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신만의 공간을 남겨 두었고, 평소에는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조용히, 혹은 요란하게 살아 나갔다.
홍연은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고, 삶과 영혼까지 깊이 결속한 그들의 관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이렇게 ‘독립 영역을 남겨 두는 관계’를 선택한 두 사람이 좀 대단하고,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원의 주중 일과는 여전히 규칙적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 근처에 있는 성당에 가서 새벽 미사에 참석하고, 집에 와서 식사하고, 출근해서 일하고, 오후에 일찍 퇴근해서 운동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2층에 올라가 자신만의 시간을 조용히 즐기다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우연과 통화는 자주 하는 편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전화기를 몇 시간씩 붙잡고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일하는 틈틈이 메신저로 수다를 떠는 일도 별로 없었다. 이원은 멀티태스킹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주의력 분산에 몹시 취약했고, 우연 역시 노는 데 집중하거나, 자는 데 집중하거나, 일에 집중하는 상황이면 메신저의 존재조차 까먹곤 해서, 대화 문제로 별다른 마찰은 없는 듯했다.
대신 이원은 주말이나 쉬는 날이면 늘 우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주로 서초동에서, 가끔은 과천에서. 아트빌리지는 1인 1실 입주가 원칙이지만 주말에 가끔 찾아와 연애 행각을 벌이는 애인, 아니 건물주까지 막지는 않았다.
우연의 일정은 대중없었다. 일주일 스케줄은 고사하고 내일 일정, 아니 한 시간 후에 뭘 하고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홍연도 모르고 이원도 모르고 당사자도 몰랐다.
고정적으로 정해진 일정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3학점 수업이 두 번 있었고, 세 번 정도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손연정 원장과의 상담은 2주일에 한 번이지만, 그나마 두 번에 한 번은 전화 상담으로 때우는 것 같았다.
남은 시간은 규칙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런 아름다운 질서 따위는 없었다. 열흘 동안 작품을 하나 해야 한다면 9일하고 반나절까지는 먹고 마시고 춤추며 놀다가 마지막 날, 밤샘 작업을 해서 해치우는 게 일상이었다.
반대로 그 작업에 무척 흥미가 돋으면, 첫날부터 며칠간 눈깔이 뽑히게 작업을 해서 흡족할 만한 뭔가를 만들어 놓은 후, 이틀 정도 시체처럼 퍼질러 자곤 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 빈둥빈둥 웹 서핑에 몰두하거나, 창가에서 햇볕을 받으며 꼬박꼬박 졸거나, 비슬비슬 일어나 수업을 들으러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다.
국내외 화랑가나 경매 시장에서 조금씩 ‘잘나가는 화가’ 소리를 듣게 된 우연이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는 그냥 미스터리였다. 하긴, 우연이 벌이는 일 중에서 이해 가능한 게 얼마나 되는진 모르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어제가 과외 월급날이었네?”
홍연은 그제야 자신의 오류를 발견했다. 우연은 오늘 수업이 없어서, 혹은 봄바람이 좋아서 놀러 오는 게 아니다.
우연은 월급을 받은 다음 날이면 반드시 여의도에 올라와서 이원에게 밥을 사 주곤 했다. 물론 과외 비용이라야 작품 가격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그 돈을 모조리 ‘예쁜 커플 아이템’이나 ‘맛있는 밥’, ‘환상적인 디저트’, ‘화려한 꽃다발’ 따위에 탕진하곤 했다.
이원도 이원대로 사양 한번 없이 넙죽넙죽 잘 받아먹고 잘 받아 쓴다. 이제 식욕과 잠의 축복이 쏟아지게 된 이원은 카모마일 대신 커피와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예민하고 섬세한 미각으로 카페별 차종별 브랜드별 블렌딩별 품평을 꽤 자세하게 기록해 두고 가끔 홍연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최근 이원은 회의까지 미뤄 가며 늦게까지 농땡이를 친 후, 커다란 꽃다발이나 간식용 케이크를 들고 태연하게 돌아올 만큼 뻔뻔해졌다. 서브마리너 스포츠 시계나 핸드메이드 파시미나 목도리 등 좀 ‘센 물건’들을 커플 아이템으로 선물받고 개선장군 포스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물론 1년 넘게 솔로 상태인 홍연에게 대놓고 자랑질은 안 했지만, 뜬금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을 하거나, 실내에서 계속 목도리를 휘날리며 돌아다니는 걸 보면 속이 너무 빤히 보였다. 홍연이 예의 바르게 알은척해 주면 ‘디자인이 확실히 괜찮죠?’ 하면서 반색하다가, 이내 심드렁한 목소리로 ‘색깔 고르는 안목이 좀 유니크하긴 하죠.’ 어쩌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오늘은 식사하시고 영화나 한 편 때린 후에 팝콘 냄새를 풍기며 돌아오시려나. 아니면 지금 한창 벚꽃이 좋은 시즌이니 봄바람 꽃향기 살랑대는 윤중로를 슬렁슬렁 돌아다닐 수도 있겠다.
띠잇, 띠잇.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12시를 알리는 알람음이 들린다. 홍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슈트를 걸치며 말했다.
“전무님, 그럼 저 먼저 식사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아, 예, 다녀오세요……. 여보세요? 우연아? 응? 주차장에 있다고? 파킹이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뭔가 뒤통수가 싸르르 하다. 홍연은 못 들은 척 그대로 나갈까 말까 아주 잠시 망설였다.
“뭐? 차를 몰고 왔다고? 네가? 누구 차를?”
홍연의 발이 덜컥 바닥에 붙잡힌다. 사무실에 적막이 흐르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차오른다. 잠시 후 이원의 턱이 덜렁 아래로 내려앉는다.
“뭐……? 차를 사? 오늘 인도받았다고?”
이제 홍연의 턱도 덜렁 아래로 떨어진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냐.
“우연아, 너 거기 꼼짝하지 말고 있어! 주차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있어!”
콰당, 소리가 나더니 이원이 빛의 속도로 뛰어나간다. 아, 역시, 오늘도 한 건. 홍연은 허둥지둥 주차장으로 따라 내려가며 급하게 문자를 넣었다.
[최홍연: 홍시야 아무 데나 들어가서 먼저 시켜 먹고 있어. 나 좀 늦을드슈ㅠㅠㅠㅠ]
* * *
우연이 면허를 따기로 결심한 건 몇 달 전이었다. ‘쾌속 연애’를 위해서라고 했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다 보면, 그것도 좀 많이많이 좋아하다 보면, 문득 푸른 하늘에 그 사람의 얼굴이 아롱아롱 어릴 때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는 당연히 호로록 가서 실물을 보면 되는데, 그 ‘호로록’이라는 게, 차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너무 크다고 했다.
서림예대는 여전히 두 시간에 버스가 한 대 다니는, 흙먼지 폴폴 날리는 깡촌이며, 과천 아트빌리지도 대중교통이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다. 과천과 서초동은 차로는 20분 정도지만, 버스와 전철로는 한 시간이 훌쩍 넘고, 과천과 여의도쯤 되면 두세 시간은 껌이었다. 출퇴근 러시아워에 걸리면 아트빌리지와 여의도까지는 달나라만큼이나 멀어지고, 서림예대에서 여의도쯤 되면 지구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아련해진다. 스피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 진우연은 그런 사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말만 하면 광속으로 차를 보내 주겠지만, 우연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아저씨를 보고 싶을 때마다 제삼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면 그것도 문제죠. 미안하니까 안 보고 말지, 귀찮으니까 다음에 보지, 그렇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 정도 이유까지는 이해할 만했고, 설득할 만했고, 말려 볼 만했다. 하지만…….
‘제가 회사 앞으로 아저씨 픽업하러 가는 게 로망이거든요. 길고 미끈하게 쭉 빠진 스포츠카나 몬스터 트럭에서 운전대를 딱 잡고 기다리다가, 아저씨가 퇴근하고 나올 때 창문을 짜르르 내리면서 부르는 거죠. “어머, 거기 잘생긴 아저씨, 여자 친구 있어요? 전화번호가 어떻게 돼요?” 어때요? 멋지겠죠?’
홍연은, 우연이 설득당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우연아, 이거 ……정말 네가 시험 봐서 딴 거 맞아?’
상사께서는 미더워하지 않았다. 불신을 예의 바르게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연은 자신의 운동 신경이 그래도 차상위 계층쯤은 된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운동 신경이 전혀, 전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면허를 딴 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대한민국 운전면허 시스템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연이 도로 연수를 받는다고 하는 날마다, 이원을 비롯한 송 여사, 민정 대리 등, 서초동 본가의 고용인들은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사방 빙빙 돌며 안절부절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우연아, 오늘 연수받는 날이니? 뭐? 오늘 고속도로를 타 보겠다고?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우리 침착하게 잘 좀 생각해 보자. 아가씨, 언제든지 그냥 전화만 하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 우연아, 언젠간 자율 주행차가 나올 거야. 너 마흔 되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니? 아예 운전대가 없는 것도 나올 거라고. 아가씨, 요새는 콜택시도 나쁘지 않아요. 집 앞에서 집 앞으로 오고, 차 번호도 찍히고, 과천에서 여기까지는 할증 꺾어도 2만 원도 안 나올 거예요. 우연아, 수행 기사 한 명을 고용할까? 그게 더 편하지 않을까?
물론 우연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인격자 한이원은, 속이 새까맣게 타는 것을 내색하지도 않았고, 우연이 연수 차량의 범퍼와 사이드 미러를 세 번이나 긁어 버린 것을 듣고도 그것 보라거나, 그만두라거나 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수를 나가는 날만 되면 책상에 앉아 손수건을 쥐어뜯는 상사를 보기란, 참으로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차 사러 가기 전에 같이 가자고 전화 좀 하지 그랬어. 왜 이렇게 갑자기 산 거야?”
“어? 도로 연수 시간 채우면 바로 차 살 거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요?”
홍연이 슬금슬금 이원을 따라가 보니 벌써 주차장 가득 살얼음판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고야. 차를 보니 전무님 반응이 저 모양인 이유가 이해가 됐다. ‘예쁘고’ ‘깜찍하고’ ‘귀엽고’ ‘아기자기한’, 그야말로 장난감 같은 빨간색 승용차 한 대가 주차선을 사선으로 가로막으며 서 있다. 그것도 경차만큼이나 좁고, 경차보다도 짤막하고, 전무님이 허리 펴고 탈 수나 있을까 싶게 납작한 놈으로.
그리고 그 작은 차를 가지고도 주차에 실패하셨고요?
“물론 나한테 허락받고 사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의논해서 고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처음 사는 차인데, 어떻게 겁도 없이 혼자 갔어?”
“혼자 간 건 아니에요. 혜진이랑 미연이도 가고, 인터넷도 찾아봤어요.”
“혜진이랑 미연이가 차에 대해 잘 알아?”
“어……, 둘 다 면허는 있어요.”
“둘 다 장롱면허잖아.”
“그래도 연수는 다 받았어요. 그래서 셋이 시승도 해 보고, 제일 예쁘고 귀여운 디자인으로 고른 거라고요.”
“그래도 차는 옷이나 가구처럼 디자인만으로 결정할 순 없지. 안전하고 성능이 훨씬 중요한 요소인데…….”
대화가 이어질 때마다 이원의 목소리가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듣기엔 여전히 차분한 듯하지만, 홍연은 알 수 있었다. 저건 인내심 발군의 상사께서 심기가 꽤나 불편하시다는 시그널이다.
우연이 푹 쭈그러진 목소리로 묻는다.
“……이거 잘못 산 거예요?”
“아니, 딱히 잘못 샀다기보다, 음, 그게…….”
이원은 당황한 듯 얼더듬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털어놓았다.
“너무 작은 차라서 그래. 4인승만 됐어도 좀 나았을 텐데. 왜 하필 2인승을 고른 거니?”
“그야, 아저씨랑 저랑 딱 둘이서만 타고 다니려고……. 아, 그, 작은 차가 기름도 적게 든대요. 환경 문제가 있어서.”
아무렴, 환경 문제 중요하죠. 나 같은 사람이 운전대 잡고 중간에 끼어 있는 환경이니 문제가 아주 많았겠죠. 홍연이 기둥 뒤에서 입을 비죽이는 동안, 이원은 차종이나마 바꿔 보려 협상을 시작했다.
“그럼, 좀 큰 차로 바꿔서 둘만 타고 다니는 건? 작고 저렴하고 기름 덜 먹는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니까. 경차 같은 건 작은 사고가 나도 크게 다칠 수 있거든. 그러니 차라리 가격이 좀 나가도…….”
아이고 전무님, 거기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에러십니다.
홍연은 전화기를 꺼내 들고 부다다닥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저 차가 귀요미 장난감처럼 보이는 건 인정하지만, 경차는 아니고 저렴이 차도 아니다. 오히려 대형 승용차만큼이나 비싼 놈이다. 어지간한 세단보다 단단하고, 코너링이나 고속 안정감도 탁월해서 상대적으로 안전하기도 한 데다, 몹시 빠르고 힘도 좋은 4륜 구동 차량 되시겠다. 다만, 초보자가 처음 몰기에 순한 차라고는 할 수 없었고, 승차감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차에 관심이 별로 없는 전무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 라인의 자동차를 사기 위해 적금까지 붓고 있는 홍연은 차의 가격은 물론이고 연비와 제로백과 안전장치 따위에 대해서도 환하게 꿰고 있어서 신속 정확한 정보 제공이 가능했다.
이원은 주머니에서 띵띵대는 전화기를 끄려고 꺼냈다가, 홍연의 문자들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홍연은 재빨리 마지막 문장을 입력했다.
[전무님,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그 차는 스포츠카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확인한 이원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는다. 그사이 우연이 처량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는다.
“차가 크면 주차를 못 한단 말이에요. 연수받을 때 범퍼랑 백미러를 세 번씩 긁은 거 아시잖아요. 그래서 제일 작은 거로 고른 건데요.”
……차주가 그걸 알고 산 것 같지는 않지만요.
“우연아, 그래, 이게 안전한 차라고 치자. 성능도 괜찮다고 하자. 그래도, 이게, 승차감이 좀 안 좋다는데……. 음, 승차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오래 운전하다 보면, 허리가, 그래, 네 허리가 많이 피곤하고 아플 거야. 그게…….”
당황한 이원이 그답지 않게 급조한 정보로 반박을 시도한다. 하지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연이 입을 비죽이며 콧방귀를 뀐다.
“제 허리를 걱정해 주시기엔 ……좀 양심 없으신 거 아니에요?”
……전무님, 건투를 빕니다.
홍연은 얼른 몸을 돌려 뺑소니를 쳤다. 인간 최홍연, 그래도 그 정도 예의와 매너와 눈치는 있으니까.
* * *
“어휴, 됐다 됐어, 잠시나마 너를 위해 울어 주려고 했던 내가 바보다. 아주 히드라 지렁이 똥파리다 내가.”
홍연은 뻑뻑해진 파스타를 숟가락으로 퍽퍽 퍼먹으며 구시렁거렸다. 동생이 미리 주문해 놓은 마카로니는 이제 손가락만큼이나 불어 터지고 찹쌀떡만큼이나 찐득찐득한 무언가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누가 울어 달랬나, 복수를 해 달랬나. 밥이나 좀 사 달랬지.”
“아무렴 그러시겠지. 울어도 네가 울고 복수를 해도 네가 하니까 나는 밥이나 사고?”
“울기는 개뿔, 눈물 속 소금 한 알갱이도 아깝다. 그나마 두 사람 주변에 언플 싹 돌려서 자근자근 밟아 줬고, 놈이 불법 수입 판매 하는 것도 신고 때렸으니 복수도 그 정도면 됐지. 그따위 꼴값 새끼 때문에 길게 신경 쓰기도 귀찮아.”
꼴값 사나이의 어장 관리는, 다른 여자한테 보낼 메시지를 동생에게 보내는 순간 끝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여자는 동생의 학교 후배이기도 해서 발뺌이고 뭐고 할 여지가 없었다.
“뭐, 복수는 알차게 했네. 맘 떠나면 쿨하게 빠이 해 준다는 티라노홍시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동생이 픽 웃는다.
“오빠, 난 다른 건 괜찮은데, 양다리가 제일 더러워. 아니, 싫어지면 산뜻하게 헤어지자고까지 했는데, 왜 기어코 양다리 삼다리 어장을 치냐?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좋다 좋다 하는 거 보면서, 둘이 ‘아 저 병신.’ 하면서 킥킥대고 웃었을 거 아니야. 고건 용서가 안 되지.”
홍연은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됐지 싶다. 아빠 엄마가 손뼉 치고 춤을 추며 독립 만세를 부르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변변한 학벌도, 번듯한 직장도 없으면서 말발만 빤드르르한 놈이랬다. 뭔가 정체 모를 것들을 수입해서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사업가라는데, 사무실도 사업자 등록증도 없었다. 막내딸이 그런 놈과 사귀게 됐다는 걸 알고 엄마는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갔다. 어차피 결혼할 거 아니니까 조건은 상관없지 않느냐는 말에는 아빠까지 뒤로 넘어갔다. 거품까지 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홍시 너도 중간중간 좋은 선 자리나 나갈 걸 그랬네. 네가 그동안 거절한 선이랑 소개팅이 한두 개냐.”
“…….”
“뭐, 잘됐다. 너 헤어진 거 알면 엄마가 그보다 백배는 괜찮은 남자들 프로필 한 트럭은 가져올걸?”
“진짜. 이 감수성 제로의 위로는 뭐야?”
“위로 아니야. 축하하는 거지. 그런 문어발 새끼 산뜻하게 도끼질하기가 쉬운 줄 아냐?”
이럴 때라도 좀 다정다감하게 대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홍연은 동생과 그런 아름답고 우애 넘치는 남매간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위로라는 것도 늘 퉁탕퉁탕 이 모양 이 꼴이다.
“어쨌든 조상신 비혼신께서 적극 도우신 거니까, 홍시 너, 담달 할아버지 제사 때 네가 첫 잔 올리고, 오늘 밥도 네가 사.”
“와 저 막나가는 인류애 좀 봐라. 그래도 명색 ‘방금 실연하고 온 가련하고도 비련에 찬 여동생’이니까 예의상 밥은 좀 사 줘도 되지 않냐? 커피하고 디저트는 내가 사면 되잖아.”
“뭐래. 악어 죠스 티라노의 화신 같은 게, 어디 함부로 가련 비련 같은 말을 갖다 붙이고 앉았어. 국어사전의 불타오르는 진노가 안 느껴지냐! 그리고 너 말야, 지금 2시 다 돼 가는 거 알고 후식 사 준다는 거지? 인간아, 내가 못 먹을 줄 아냐? 시말서를 백 장을 쓰는 한이 있어도…….”
“오빠, 인간적으로 내가 그렇게 사악하진 않다. 커피하고 후식은 포장해 달라고 할 테니까 갖고 들어가서 황 과장님하고 나눠 먹어. 근데 2시 다 돼 가는데 안 들어가도 괜찮아?”
“오늘 조금 늦게 들어가도 돼. 전무님 자리에 안 계셔.”
“엥? 갑자기 웬 땡땡이 분위기? 전무님은 껌딱지 수행 비서 떼 놓고 어디 가셨어?”
“우연 씨가 새 차 몰고 올라왔거든. 늦게 오신댔어. 뭐 바로 퇴근하실지도 모르고.”
“아하. 진우연 화백이랑 데이트 나가신 거야? 역시 대표이사님쯤 되면 그런 게 좋네?”
동생은 두 사람의 얼굴을 알고는 있었는데―물론 두 사람은 동생의 얼굴을 모른다.―, 대화할 때 호칭이 좀 애매했는지, 우연을 꼬박꼬박 ‘진우연 화백’ 혹은 ‘진 화백’이라고 높여 불렀다.
홍연은 그럴 때마다 우연의 유명세를 실감했다. 그렇게 격식 있는 호칭으로 불릴 때의 우연은, 충분히 어른스럽고 능력 있는 사회인, 혹은 젊은 나이에 당당하게 성공한 전문가로 느껴져서 조금 낯설었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의 어린 시절 혹은 힘든 과거에 대해 많이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방편도 되지만, 선입견과 고정 관념의 원인이 되는 듯도 했다. 이원도 그렇고 우연도 그렇고, 둘 다 많이 변했으나, 홍연은 여전히 그들이 연인이 되기 전의 힘들던 모습을 투영할 때가 있었다.
“그럼 진 화백은 면허 따고 바로 차 산 거야? 멋진데! 하긴, 스물여섯인가? 그쯤이면 슬슬 운전하고 다닐 나이도 됐네. 한 몇 달 고생 좀 하겠지만.”
흠. 확실히 저렇게 들으니 그녀가 운전할 때마다 다들 야단야단하며 걱정했던 것이 좀 과잉 반응이었던 것 같아서, 좀 뻘쭘하게 느껴진다.
사실, 우연은 운전대를 잡기에 어리지 않다. 자신도 그렇지만, 홍시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면허부터 땄고, 아빠 차를 살금살금 몰고 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십 대 초반이었다. 홍연은 군대에 다녀와서부터는 거의 엄마의 대리 기사 역할을 도맡았고, 동생이 스물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상태였다.
지금 우연은 당시의 동생과 나이가 비슷하고, 운동 신경 극빈층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그래도 동생은 지금까지 나름 드라이버(?)로 잘 살아 나가고 있지 않은가. 작고 소중한 질주 본능을 모락모락 키워 가며, ‘오빠, 이 정도면 F1에 나가도 되겠지?’ 하는 헛소리까지 찍찍 해 가며어어어……?
왓 더!
떨그렁, 포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홍연은 그걸 주울 생각도 못 하고 서너 뼘쯤 되는 기둥 뒤 구석 자리로 황급히 몸을 날렸다.
“왜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홍시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키 큰 남자를 보자마자 풉 웃음을 터뜨렸다. 미슐랭 별 식당 같은 곳에서 우아하게 데이트를 즐기셔야 마땅할 오빠의 직속 상사 아니신가.
“오빠, 벽으로 더 바짝 붙어. 아우, 팔이랑 다리랑 다 튀어 나갔잖아. 좀 더 구겨 넣어 봐. 와 이거 어떡하냐. 흐, 흐, 흐흐히히히.”
멘붕에 빠진 오라버니께서 입을 뻐끔대며 야단을 해 댄다.
‘야, 홍시야 나 어떡해? 아우, 전무님 시간 안 지키는 거 되게 싫어하시는데.’
“그러게 농땡이도 평소에 치던 놈이나 치는 거야.”
‘아니 둘 다 돈도 잘 벌면서 뭐 맛있는 걸 먹겠다고 이런 싼마이 파스타집에 오는 거야? 미치겠네.’
“설마 여길 지금 맛집이라고 찾아온 거겠어? 그냥 눈에 띄니 들어왔겠지. 누가 전무님한테 맛집이라고 구라 친 게 아니고서야.”
‘미친, 그런 놈 있으면 내 손에 죽었어. 와 씨 어떡하지. 야 홍시야, 홍시 님, 지금 사무실로 텔레포트할 방법 좀 생각해 봐. 엉?’
“아니 내가 그런 신박한 능력이 있으면 CIA에서 연봉 10억에 모셔 갔겠지!”
“아저씨, 우리 밖에서 먹는 건 어때요? 여기 테라스 자리 너무 좋은데요? 햇볕 잘 들고, 바람 좋고, 꽃들도 잘 보이고.”
밖에서 들린 여자 목소리에 두 사람은 말싸움을 멈추고 안도의 한숨부터 쉬었다. 후아아, 우연 씨, 우연 님,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원이 홍연과 홍시가 앉은 창가 앞 테라스의 테이블에 덜컥 앉아 버리는 순간, ‘그나마 다행’도 빛이 바랬다. 내부가 안 보이도록 유리에 짙은 선팅이 되어 있었지만, 촉이 좋은 인간들이니 목소리 한 조각만 듣거나 머리통의 실루엣만 봐도 누군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불행은, 출입문이 단 하나라는 점이었다.
웨이터가 우연과 이원 앞에 물과 메뉴판을 놓아 주고 간다. 홍시는 척후병처럼 테라스의 연인들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밖의 풍경이 환하게 보여서 두 사람의 동정을 살피는 것은 쉬웠다. 쫄보 오라버니께서는 구석에 필사적으로 몸을 붙인 채 진땀만 쫄쫄 흘리고 앉았다.
“와, 오빠, 저 여자가 진우연 화백이야? 전무님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진 화백도 만만찮은데?”
‘넌 이런 위급 상황에 그런 게 눈에 들어오냐. ……어, 둘 다 선남선녀는 맞아.’
“사진은 꽤 봤는데 실물이 저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기업 대표쯤 되는 사람이 왜 동업자랑 파혼까지 해 가면서 새파란 신예 화가랑 사귀게 됐나 했더니. 한눈에 반했던 거구나?”
‘야. 전무님이 그렇게 앞뒤 없는 얼빠는 아니야.’
웬일로 오빠에게서 단호한 반박이 튀어나온다. 아, 하긴. 한 전무님 당사자도 저렇게 잘생겼으니, 어지간한 외모가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냐. 홍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어떤 점에 반하신 거래? 남자가 저 정도 레벨이면 여자 보는 눈도 엄청 높았을 텐데. 성격? 아님 재능인가?”
꽤 좋아하던 놈에게 뒤통수를 맞은 끝이라 그런지, 말투가 심드렁하게 흘러 나간다. 오빠는 몸을 구겨 넣은 상태로 용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운명이지. 저 둘은, 그냥 사랑하게 될 팔자였던 거야.’
“풉!”
듣자마자 폭소가 튀어나왔다.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것을 넘어 황당했다. 오빠의 수준이 저 정도로 낙후되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오빠는 아주 엄숙한 얼굴로 되풀이했다.
‘홍시야, 네가 불가항력의 운명적 사랑이 뭔지나 아냐.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는 게 뭔지나 아냐. 왜 유명한 오페라에 그런 노래도 있잖아. O Fortuna, ……rota tu volubilis(운명의 여신이여, 당신이 돌리는 수레바퀴여)…….’
이거 큰일 났다. 오빠가 1년 넘게 솔로 상태라 어디에 뭔 문제가 생겼나 했는데, 뇌 속에 저런 중병이 생겼을 줄은 몰랐다. 홍시는 식탁 밑으로 오빠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앞으로 닥칠 댁의 운명이나 걱정하셔.”
그사이 테라스의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태평하게 메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콜라 큰 거로 시킬까요? 여기 리필은 안 되나 보네? 나는 파인애플피자하고 치즈라자냐! 아저씨는요?”
“음, 나는 연어샐러드하고 토마토토르텔리니 이거. 그리고 여기 야채수프 매콤하고 맛있대.”
“와, 아저씨, 이거 귀엽게 생겼어요. 이거 아기 만두 같은 거죠? 속에 고기소 든 거? 아닌가? 치즈 들었나? 드셔 보셨어요?”
“이탈리아에선 먹어 봤는데, 이 가게에선 처음이야. 여기 오는 것도 처음. 근데 여기 파스타 맛집이라던데?”
“맛집이래요? 좋다! 누가 소개해 줬어요?”
“홍연 씨. 여의도 맛집은 자기가 제일 빠삭하다네? 그래서 알려 줄 때마다 열심히 적어 놓고 하나씩 도장 깨기 하는 중이야.”
“우와! 최 실장님이 그런 것까지 일일이 챙겨 주세요? 이런 고마운 일이! 아저씨, 실장님 연봉 좀 팍팍 올려 드리세요. 1억이요 1억!”
여자의 밝고 정감 넘치는 목소리와 남자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참 잘 어울렸다.
“네가 로비 안 해도 최 실장 연봉 협상 충분히 잘해. 협상 킹이야. 영업부로 보냈으면 올해의 영업왕 등극해서 성과급만 수억씩 받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현실은 아저씨가 바짓가랑이 잡고 안 놔 주고 계시잖아요. 그럼 피해 보전은 해 주셔야죠.”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킬킬 웃었고, 하마터면 올해의 영업왕이 될 뻔한, 도끼로 제 발을 찍은 사나이는 모래에 대가리를 파묻은 타조 꼬라지로 탁자에 머리를 박고 쥐어뜯었다.
‘와우, 이놈의 주둥이가 미쳤구나. 내가 언제 여길 맛집이라고 했지? 전무님, 여기는 그냥 가성비 맛집이에요. 인당 2만 원도 안 되는 파스타집에서 뭐 그리 경천동지할 맛이 나겠어요. 전무님께서 저를 총애하시는 건 알고 있지만요, 오늘 같은 날은 바짓가랑이 잡고 안 따라오셔도 되는데. 아이고, 홍시 네가 이렇게 말짱할 줄 알았으면 사무실에서 도시락이나 시켜 먹을걸.’
“오빠, 정신 산만하니까 가만 좀 있어 봐. 그럼 화장실에 숨어 있을래? 내가 두 사람 나가면 바로 전화해 줄게.”
‘그러다가 오후 내내 퍼지고 앉아 있으면? 너 연애하는 사람들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모르냐?’
“그럼 내가 바바리랑 선글라스랑 스카프 빌려줄 테니까 얼굴 가리고 나갈래?”
‘뭐? 그 핑크핑크 바바리에 블링블링 반짝이 선글라스를 나더러 쓰라고? 너 약 먹었냐? 내가 그렇게 밉냐?’
“그래도 직속 상사 코앞에서 도망치려면 어쩔 거야. 적어도 전무님이 ‘설마, 저 이상한 여자가 나의 비서실장일 리가 없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지. 핸드백하고 하이힐도 빌려줄까?”
‘그랬다가 진짜 들키면? ‘여장 취향 모 기업 비서실장, 상사에게 들킨 후 아파트에서 투신’ 뭐 그런 기사 보고 싶은 거야?’
“아 씨, 그럼 어쩌라고. 걍 낯짝에 철판 깔고 인사하고 가든가. 설마 한 시간 땡땡이에 시말서 감봉 처분 나오겠냐? 아 그리고 감봉 좀 당하면 어때.”
‘절대 안 돼, 내 인생에 감…… 아니, 이런 일로 전무님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아.’
“뭐래. 감봉의 감 자도 입 밖에 내기 싫으냐, 인간아.”
‘왜 이래, 내가 전무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네가 아냐, 엉?’
“이야, 연봉 6천에 인간 하나 망가지는 거 순식간이네.”
또다시 정강이를 걷어차인 홍연은 결국 분홍색 바바리를 얻어 입고 오색 크리스털이 자르르 박힌 선글라스를 썼다. 알록달록한 스카프로 코 밑까지 둘둘 감싸고 나니, 이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묘한 모습이 되었다. 하이힐과 핸드백을 사양한 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자, 오빠, 종업원이 주문받으면서 두 사람 시야를 가릴 때, 출입문으로 바로 뛰어. 알았지?”
홍연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역시 형제애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홍시는 이럴 때 유일하게 등을 맡길 수 있는 진정한 전우였다.
“……하나, 둘, 셋! 오빠, 뛰어!”
* * *
홍시는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시켜 놓고 테라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나마 오빠가 있을 때는 웃음이 나왔는데 혼자 남게 되자 갑자기 기분이 축 처진다. 오빠는 눈치도 빠르고 요령도 좋아서, 쓸데없이 우울감에 휩쓸리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아 주곤 했다.
……아, 정말 고약하다, 이런 느낌.
연애 경험도 꽤 있고, 자신을 먼저 지킬 줄 아는 현명함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련하게 다 퍼 주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대신, 공평하고 똑 부러지게 애정을 주고받다가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정리하고 털어 내곤 했다.
물론 그럴 때면,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하기는 했다. 마음속의 자그마한 싱크홀은 짧으면 반나절, 길면 하루 이틀 정도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 허전함이 뼈아픈 상실감이나 후회라기보다, 어금니 사이에 끼어서 퉁퉁 불어 가던 고기 조각을 반나절 만에 치실로 빼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한 사람을 몇 개월, 혹은 몇 년씩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끝나고 남은 감정이 고작 그따위 후련함이라니.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번번이. 구차하고 한심한 걸 넘어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럼 난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 하는 자괴감이 안 들 수가 없다.
홍시는 한숨을 쉬며 다시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옆의 테라스에서는 오빠의 상사와 젊은 화가가 의자에 기대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까지 꽤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있었다는데,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선 그런 드라마틱한 광풍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아, 사실 평범하진 않다. 남자도 눈에 확 띌 정도의 외모지만, 여자 역시 평범하다기엔 미안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귀 바로 아래에서 쳐 낸 짧은 단발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나풀나풀 찰랑대며 햇빛을 반사했고, 이목구비는 고양이처럼 오목조목 단정하게 모인 귀염상이었다. 말갛고 뽀얀 피부에 선명하게 붉은 입술과 또렷한 눈매도 매력적이었는데,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생긋 올릴 때는 심장이 덜컹 울릴 정도로 예뻤다. 하얀 티셔츠에 진한 남색 청바지, 굽 낮은 흰색 단화, 파란색 배낭. 산뜻한 청록색의 큼직한 오팔 목걸이가 유일한 장신구였는데, 그것만으로도 반짝반짝 싱그럽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여자는 그 자체로 환하게 반짝이는 맑은 보석처럼 느껴진다. 여신 같다기보단 요정 같고, 귀엽고 순한 강아지라기보다 요염하게 튕기는 장난꾸러기 고양이 같다. 누구라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언론이나 가십 매체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재벌―연예인 커플’ 프레임에 넣어 해석하곤 했다. 스폰 관계까지는 아니지만, 돈 많은 남자가 매력적이고 젊은 여류 예술가를 돈으로 낚아챘다는 시선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다. 남자가 한때 후원자였다는 과거도 그렇고, 남자 나이도 적지 않은데 결혼 대신 연인 관계로만 지내는 것 역시 그런 프레임을 강화하는 데 한몫한 듯했다.
일반적으로 ‘재벌―연예인 커플’의 수명은 ―결혼이나 자녀 같은 변수가 없는 한― ‘연예인의 매력’의 유효 기간으로 정해진다. 외모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수명이 짧은 매력일 것이고, 성격은 수명이 길지만 상대적으로 약한 매력이 될 것이다. 여자의 천재적인 재능도 명망 있는 예술 후원가인 남자에게 분명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성격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여자는 어느 쪽으로든 상당히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가장 잘 아는 오빠는, 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포르투나’―운명이라고 했을까.
……그것도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웃기지도 않게.
홍시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와 유쾌한 웃음소리가 조용조용 흘러들어 온다. 여자의 목소리는 경쾌하고 밝았고,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으며 편안했다. 홍시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참 예쁘다.”
……둘이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들은 연애를 막 시작한 연인처럼 풋풋하게 설레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고된 세월을 함께 겪은 부부처럼 단단하고 여유 있으며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의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이, 생활이, 사랑이,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찬찬히 재현되기 시작했다.
* * *
서초동 본가의 정원에 노란 장미가 한창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열고 정원을 내려다보면 초록색 파도 위에 눈부신 황금 알갱이가 깨알같이 흩어져서 반짝거리는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남자는 그 환상적인 모습을 아침마다 여자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아마도 둘이서 가지치기도 하고 거름도 주면서 열심히 가꾸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여자가 장갑까지 벗어 치우고 열심히 일하다가 가시에 찔려서 피를 보았던 것을 아직도 속상해하며, 꽃이 활짝 피면 그것으로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한다.
여자는 한두 달만 기다리면 기숙사 앞의 수국도 한창 물이 오를 텐데, 그때 한번 오겠느냐 물었고, 남자는 쑥스럽게 웃으며 ‘그때 노래를 들었던 친구들은 다 졸업했느냐.’ 되묻는다. 남은 건 나 혼자라는 여자의 장담에 남자는 그럼 한 번쯤 가 봐도 좋을 것 같다고 대답한다. 아 물론 사감 선생님은 아직 계시긴 하죠, 여자의 짓궂은 덧붙임에, 남자는 그 엄한 사감님이 아직도 계시느냐, 지금도 건강하시느냐 물으며 슬그머니 말을 돌린다.
이번 생일에는 과천으로 오면 어때요? 퇴근하고 늦게 와도 돼요. 문 잠기면 선녀 두레박을 내려 줄 테니까. 거기는 풍기 문란 죄명은 없으니 진짜 나무 박스 두레박을 준비해도 되지 않을까요. 나 몸무게 80 다 돼 가는데? 너 작은 쌀자루도 못 들잖아, 하는 웃음 섞인 말에 여자도 따라 웃는다. 전동 도르래도 설치하죠. 저도 문명의 힘을 사용할 줄 안다고요. 거긴 내가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좀 곤란해. 그래 봬도 내가 거기 건물주란 말이야. 그냥 창가에서 세레나데 부르는 정도로 봐주면 안 될까. 나도 나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남자가 제법 멋쩍어하며 대답하자, 여자가 턱을 삐죽 내밀며 반박한다. 창가에서 노래를 한다는 발상부터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다 구긴 거예요. 차라리 두레박을 타고 잠입했다면, 체면은 지킬 수 있었을 텐데요. 저는 그 빌리지에서 쫓겨났을 테니 일석이조였을 거고요. 남자는 여자를 퇴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한다.
아트빌리지가 교통이 편한 곳이 아니니, 졸업하고 서초동 집 근처로 이사를 하는 건 어떨까, 그보다 좀 넓은 작업실을 구해서 마음에 들게 꾸미는 게 낫지 않을까, 남자는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여자는 딱 잘라 거절하는 대신, 방 세 개짜리 아파트 판 돈으로 방 하나짜리밖에 사지 못하게 만드는 사악한 마을에 대해 한참 불평을 늘어놓는다. 차라리 제가 운전을 열심히 배워서 빛의 속도로 오가면 어떨까요? 최 실장님 대신 제가 아침저녁으로 아저씨 출퇴근을 시켜 드리는 거죠. 차에서 내리기 전에 파워 충전 키스 한 번, 차에 타자마자 피로 회복 키스 또 한 번. 어때요? 듣기만 해도 들뜨고 사랑스러울 법한 제안에, 남자는 왜인지 사색이 된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두 사람의 앞으로 샐러드와 라자냐, 토르텔리니, 파인애플피자가 차례차례 놓인다. 냅킨과 물, 식기와 양념, 소스 따위를 여자에게 편한 곳으로 놔 주는 남자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의식하고 챙겨 준다기보다 숨 쉬는 것처럼 편안하게 배려하는 습관이 배어 있는 듯했다.
어때요 아저씨? 한 입 먹어 본 여자가 눈을 사르르 감으며 묻는다. 맛있어요? 음, 생각보다 푸짐한데? 샐러드도 괜찮고. 배려심 깊은 남자는 부하 직원이나 요리사를 나쁘게 말하는 대신 점잖게 에둘러 대답한다. 썰어 담기만 하는 샐러드나 시판 소스로 맛집 소릴 듣는 건 맛집에 대한 예의는 아니겠죠. 별로면 별로라고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말하지 못하다니, 한길동이신가. 여자가 키득키득 웃는다. 최 실장님 맛집 추천 성공률은 어느 정도 돼요? 음. 2할 5푼? 와! 네 번에 세 번 실패인데 추천 리스트를 열심히 적고 계셨던 거예요? 무슨 말이야? 야구에서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한 타자야.
여자는 솔직했지만 입맛이 까다롭지 않았고, 남자는 입맛이 까다로웠지만 배려심이 깊었다. 그래서 식당에 대해서건, 부하 직원에 대해서건, 작은 불평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다.
지나가던 양복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식당 앞을 지나가다가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굽힌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남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하고 인사를 받는다. 예, 안녕하세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트위드 재킷을 입은 여자도 지나가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총무과의 이선아 대리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이 대리님. 점심 식사 잘 하셨습니까. 예, 전무님. 전무님도 맛있게 드세요! 옆에 진 화백이 앉아 있으니 그들과 긴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직원들은 그녀가 누군지 빤히 아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봄바람 살랑 꽃향기 솔솔 꿀맛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으니.
여자는 이곳이 남자의 구역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아, 아는 사람들 많으시네요. 아니지, 저분들은 나를 알지만 나는 잘 몰라. 그런 것치고는 친절하게 인사도 잘하시고? 아니 내 얼굴 알면 우리 회사 사람이 분명한데, 그럼 ‘나는 한 전무가 맞는데 댁은 뉘시오?’ 그래야 하니? 아 맞다. 아저씨 나와바리에서 이렇게 먹고 있다간 ‘대기업 대표이사의 흔한 거리 먹방’ 사진이 인터넷에 풀리지 않을까요? 여자는 거리 먹방 사진이 아닌 열애 사진으로 뜰 거라는 걱정은 미처 하지 못한다.
하하하, 맘대로 풀리게 해. 남자의 대답에 여자의 눈이 동그래진다. 네? 홍보팀을 들볶는 게 아니라 내버려 둔다고요? 오, 매우 좋아요! 쿨하고 시크한 사나이가 되어 가고 있어요. 아주 바람직해요, 이대로만 무럭무럭 자라 주시면 되겠어요. 여자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들어 보인다.
물론 홍보팀이야 달달 볶겠지만, 신문이랑 인터넷 열 때마다 네 얼굴이 계속 보이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하긴, 저도 뉴스 볼 때마다 아저씨 얼굴이 보이면 그 이상 좋을 순 없네요.’ 하며 맞장구를 친다.
그럼 우리 여기 계속 앉아서 사진 찍히기를 기다려 볼까요?
여자가 거리를 향해 반쯤 몸을 돌리더니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힘껏 위로 올린다. 높직높직 치솟은 빌딩 숲과 새파랗게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시원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자의 옆모습은, 마치 여의도의 봄을 나타내는 한 장의 화보처럼 보인다. 남자는 여자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어쩐지 여자와 입 맞추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각조각 계속 이어졌다.
연휴가 낀 지난 주말, 두 사람은 서초동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드라마나 가십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재벌 및 유명 배우들의 럭셔리 라이프―별장 파티, 요트 선상 파티, 클럽 모임 따위와 꽤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4일 내내 집에서 먹고 자고 소파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온갖 게임을 하며 빈둥댄 것에 대해, 무척 환상적이고 알찬 데이트였노라 서로 자화자찬을 한다. 특히 주말 내내 쉬지 않고 제공된 송 여사의 만한전석은 그 만족감의 대미를 장식했다.
여자는 자신을 온갖 자극에 길들여진 인스턴트 순혈주의라 했고, 남자에게는 아침부터 구첩반상을 밥풀 한 알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우는 대식가라고 했다. 두 사람은 외식을 자주 즐기지 않았다. 대신, 송 여사, 혹은 송 할머니라 불리는 요리사가 차려 준 굴비 정식과 수제 햄버거와 화덕 피자와 갓 짜낸 오렌지 주스에 몹시 행복해했다.
여자는 요리에 관한 한 마이너스 손이었다. 남자에게 맛있는 무언가를 늘 해 주고 싶어 하는데, 결과물은 늘 세기말 재앙이었다.
요리에서 중요한 것은 모험심이 아니라는 것을, 창의력 넘치는 여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창의력과 용기가 과하게 발휘된 더블불닭발피자나 영양 만점 검은콩피자, 거의 모든 요리에서 나타나는 양념의 선택과 집중 현상, 불 조절 실패, 시간 조절 실패, 항상 새로운 재료를 넣어 보는 모험심에, MSG 폭탄 투하로도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손맛 없음’ 현상까지, 재앙의 원인이 너무 다양하다 보니 조리사 기능 자격증 4관왕에 빛나는 송 여사라도 어떻게 손쓸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허니머스터드소스 대신 카드뮴 옐로를 짜 놓는 모험심만 아니라면 뭐든 먹어 주겠노라고 진지하게 약속한다. 여자는 그 말에서 남자의 절절한 사랑을 느낀다. 하여 여자는 ‘나도 아저씨가 해 주는 거라면 뭐든지 먹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남자의 요리를 먹어 주는 것을 사랑의 증표로 삼기에는, 안타깝게도 남자가 요리를 너무 잘했다.
두 사람의 집 데이트 예찬론은 알고 보니 매우 합리적이었다. 서초동 본가는 어지간한 카페나 미술관보다 더 카페나 미술관 같고, 지하에는 작은 홈 시어터도 있고, 잠이 솔솔 오게 만드는 최고급 소파가 있는 서재도 있고, 사계절 풍성한 냉장고도 있고, 무엇보다 말만 하면 육해공 어떤 요리든 척척 대령하는 송 할머니가 있었다. 그분은 남자와 여자가 잘 먹는 것을 인생의 최대 행복으로 여기며 신들린 듯 요리를 해 날랐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도 머리가 하얗고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그 노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과천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서초동과 조금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아트빌리지는 방음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공동 주택이고, 여자의 거주지인 동시에 작업실이기도 해서, 남자는 여자가 그림 그리는 것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볼 때가 많았다. 한 시간, 두 시간, 혹은 다섯 시간. 여자는 거슬려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고, 정신없이 몰두하는 동안 종종 남자의 존재를 잊었다. 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잊을 만큼 몰입하는 여자를 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남자는 말을 걸거나 소리를 내는 일도 없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에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중간중간 책을 읽기도 하고, 햇볕을 쬐면서 짧게 단잠에 빠지기도 했지만, 여자가 그림 그리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는 그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그럴 때, 시간은 밀도 높게 흘러서 그 공간에 고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높은 천장, 물감이 튄 벽지, 그림 도구와 옷과 잡동사니가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바닥, 햇빛이 잘 드는 넓은 창, 뽀얀 햇살 아래서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풀락폴락 춤추는 먼지, 그래도 그곳은 외부와 단절된 결계처럼 신성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허락을 받은 후, 여자의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네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될 거야. 나중에, 먼 훗날에, 네 그림이 전시된 옆에, 네가 그 그림을 그리는 영상이 같이 상영될 거야.
그런가요.
여자의 대답은 담담했고, 남자의 설명은 열렬했다.
그래. 네가 사진도 실물도 없이, 오직 상상만으로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알게 될 거야. 너는 정말 하늘에서 내린 재능을 갖고 있었다고. 네가 그림을 그리는 모든 순간이 그분의 손길과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자는 여전히 작업에 몰두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 영상이 증명하는 건, 나에 대한 아저씨의 사랑일 거예요.
사람들은 내 그림과 그 영상에서 신의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자기 목숨보다 사랑했던 한 남자의 존재를 느끼게 될 거예요.
제 그림은 한이원과 그의 사랑에 대한 존재 증명이 될 거예요.
그럴까, 남자의 고요한 반문에 여자는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다.
나는, 그러길 바라요.
물론 두 사람이 늘 실내 데이트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액티브하고 활동적이며 건강에도 좋은 다목적 데이트를 시도한 적이 있었던 듯했다. 한때지만.
조용하고 담백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남자는 체력 소모가 심하며 격렬한 운동을 많이 했다. 전담 트레이너를 두고 근육 운동과 격투기 레슨을 받고, 수영과 스쿼시와 승마도 즐기는 것 같았다. 6성 호텔인 성일호텔 부대시설 중엔 수영장과 피트니스 센터, 스쿼시 코트가 있었고, 고급 별장형 객실인 로열 오크하우스에는 소형 승마 코스와 장애물 트랙도 딸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남자가 소유한 말도 한 필 있었다. 여자의 말에 의하면, 남자는 타고난 성실성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실연을 하나, 그곳에 가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액티브 데이트에 동참하기엔 여자의 체력이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둘이서 손을 잡고 함께 승마장을 방문했던 날, 여자는 작고 소중한 체력의 끝을 보이고 말았다.
남자가 장애물 트랙을 돌 때, 하얀 승마복의 긴 꼬리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나 그 넓은 등판이 땀에 살짝 젖은 모습을 보고는 여자는 저도 모르게 설레발레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머나, 저 땀 좀 봐. 달리는 건 말인데, 땀은 왜 아저씨가 흘리시나 가슴 떨리게. 점잖고 진중한 남자가 대놓고 저런 장면을 노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아니 좀 노렸으면 또 어떤가, 멋지면 그만이지. 여자의 뒤늦은 실토에 남자의 얼굴이 옅게 붉어진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와 달리 진실을 실토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여자가 ‘나도 저렇게 우아하고 섹시한 건강미를 아저씨 앞에서 폴폴 날리고 싶다.’라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용감한 도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용감한 도전이 생각보다 짧은 시간 만에 끝난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여자는 관리인이 고삐를 잡고 세월아 네월아 걷는 말 위에서 균형만 잡고 앉아 있었을 뿐이다. 여자는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승마 기구 따위가 아닌, 실제로 움직이는 말 위에서 균형 잡고 버티는 것 자체가 허리와 엉덩이와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의 힘을 엄청나게 요구한다는 것을, 그것도 생전 거의 쓰지 않던 근육들을 저도 모르게 혹사하게 된다는 것을.
자자, 잠깐만요, 아저씨? 선생님? 저 잠깐만 내려 볼게요.
여자는 딱 20분 만에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땅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한 걸음도 딛지 못하고 트랙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순간 옆의 트랙에서 우아하고도 맹렬하게 장애물을 넘던 남자는 말을 팽개치고 우사인 볼트처럼 달려와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사색이 된 그는 여자의 이름만 수백 번씩 부르며, 승마복을 입은 채 집으로 달려와야 했고, 주말 내내 아무 짓도 하지 못하고 전신 마사지만 해 주어야 했다.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액티브 데이트 따위는 시도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진 화백의 절친, 김혜진이라 하는 여자는 발레 학원 선생님이다. 친구는 발레단 오디션에 몇 번 떨어진 후 학원에 취직해서, 꼬꼬마 꿈나무들을 담당하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그녀가 가르친 아이들의 발레 공연이 있었고, 여자는 남자와 손을 잡고 같이 공연에 갔다.
공연이 끝난 후, 그들은 반포에 사는 친구의 집까지 놀러 갔고, 그곳에서 다섯 남매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여자가 반포 친구의 집에 놀러 가는 것은 꽤 자주 있는 일인 듯했다. 여자는 혜진이라는 친구와 그 집 남매들, 특히 어머니를 몹시 좋아해서, 걸핏하면 놀러 가서 밥과 라면을 축낸다고 했다.
다섯 남매를 물오른 나무처럼 쑥쑥 키워 낸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여자는 ‘패스트푸드 제작의 달인’이라는 말로 추켜세웠다. ‘맛있게 먹으면 뭐든지 다 보약이야. 햄 소시지 삼겹살 라면 햄버거 피자! 우연이 너도 걱정 말고 먹어! 많이 먹기나 해! 우리 애들 중에 그런 거 많이 먹고도 못난이 된 애 없어. 우연이 너도 콜라 햄버거 많이 먹었어도 이렇게 예쁘게 잘 컸잖아.’ 여자는 그 말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돌아본다.
여자는 그동안 친구네 집의 밥과 라면을 축낸 대가로 친구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초상화를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조금 목이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그림을 보니까 내가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보낸 30년이, 이제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느껴져.
그녀는 집에 가는 여자를 현관에서 붙잡고, 딸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한다. 나중에 나 늙어 죽을 때 네 그림으로 영정 사진을 하고 싶어. 그리고 여자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둘이서 행복하게 잘 살라고도 말한다. 여자는 퉁퉁하고 넉넉한 친구의 엄마를 꼭 끌어안는다.
여자는 다이소에 가는 것을 여전히 좋아한다.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도 못했던 필요를 절실히 깨닫게 해 주는 물건들을 보며, 이 물건을 사용했을 때, 선물했을 때의 희열을 상상하는 그 짧은 순간을 여자는 사랑했다.
남자는 물건을 사는 데서 행복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여자가 그림이 그려진 투명 테이프를 서너 개씩 사는 이유를 여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딱히 필요도 없으면서 구매 의욕을 불 지르는 데 특화된 자잘한 물건들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하곤 했다.
남자에게 있어 그 물건의 효용 가치는, 물건의 본래 쓰임새가 아닌 여자의 행복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행복을 느낄 때, 그 이상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다이소 쇼핑을 열심히 따라다닌다.
여자는 남자와 손을 잡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대부분은 알지 못하지만, 남자가 그곳에서 깊은 평온과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좋아한다. 여자는 하느님이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가 사랑하는 분이고, 또 남자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아마 나도 그분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곤 한다.
여자는 남자가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에 대해 많이 알고, 깊이 배우고 싶어 한다. 남자는 몹시 반가워하지만, 자신이 섣불리 가르쳐 주는 대신 근처의 성당에서 차근차근 배우는 것이 어떤가, 조심스럽게 권한다.
만약 세례를 받게 되면 아저씨가 세례명 골라 주실 수 있어요? 하는 여자의 유쾌한 목소리에 남자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네가 원한다면 어머니께서 쓰시던 묵주 팔찌와 묵주 반지, 미사보를 선물하겠다고도 한다.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들뜬 듯도 하고, 떨리는 듯도 하다.
여자는 엉뚱한 것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세례받을 때 시험 보는 거 있죠? 그 시험 어려워요? 거기서 재수 삼수 하는 사람 많아요? 떨어지면 안 창피해요? 성당 벽에 합격자 불합격자 몇 등 그런 거 막 붙고 그래요? 제가 텍스트 외우는 데 정말 소질이 없어서 말이죠. 나머지 공부나 과외 같은 것도 하고 그래요? 그거 혹시 책 한 권 다 외워서 시험 보는 거예요? 정 안 되면 오픈 북 같은 거 허락 안 해 줘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남자는 연달아 웃음을 터뜨린다.
이곳에 오기 전, 그들은 마포 대교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차를 몰고 드라이브만 하기에는 날씨도 너무 좋고, 다리 위에서 보는 강변의 풍경이 사시사철 그렇게도 사랑스럽더라 했다.
남자와 여자는 마포 대교 위에서 처음 만났고, 그래서 가끔, 아니 자주 손을 잡고 그곳에 가 본다고 했다. 그들은 유명한 산책 코스인 윤중로 대신, 민트코코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카페에서 핫초콜릿을 마시고 노점상에서 소시지를 두 개씩 사서 양손에 들고 마포 대교를 위를 슬렁슬렁 돌아다니는 이상한 코스를 좋아하는 듯했다.
아저씨, 마포 대교는 갈 때마다 변해 가는 것 같아요.
응. 그렇지?
네. 저번에 갔을 때는 난간 위에 높은 벽이 만들어졌지요.
그랬지.
일전에 갔을 때는 난간에 있던 글자들이 모조리 없어졌고요.
그래, 그랬더라.
붙이는 것보다 떼느라고 더 고생을 했을 텐데요.
그랬을 거야. 원래 새로 만드는 것보다 있던 그대로 원상 복구 하는 게 더 힘드니까.
남자의 덤덤한 대답에 여자가 웃음기가 걷힌 목소리로 묻는다.
생명의 다리라는 별명은 멋있었는데, 결국 글자 다 떼어 낸 거 보면, 큰 효과는 없었나 봐요. 돈과 인력만 낭비한 건가 봐요.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바로 대답한다.
천만에. 그건 제값을 백 번이나 하고도 남았어.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가 살아났잖아.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춘다. 남자는 비장하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덤덤하니 말을 잇는다.
그 문장들이, 짧은 순간이나마 네 발걸음을 붙잡았고, 네가 그걸 읽느라 몇 걸음, 몇 걸음 더 걸어가는 사이에 나를 만났고, 그러다가 결국 살아났잖아. 그 한순간을 위해서라면, 생명의 다리는 열 개라도 만들 가치가 있지.
그건 아저씨만의 생각 아닐까요. 어쨌든 붙였던 글자를 뗐다는 것은, 글자를 붙인 것이 무익했다는 증거 아닐까요?
아니. 나는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왜요?
선한 의도로 행해진 일은, 시행착오는 있을망정 무익할 수는 없어. 반드시 아름다운 물결이 남아.
남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글자를 붙인 사람이나 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어. 힘든 사람에게 한마디라도 위로를 전해 주고 싶었던 사람들, 그것을 위해 아름다운 문장을 생각한 사람들, 난간에 글자를 일일이 붙인 사람들, 혹시나 더 상처가 될까 봐 글자를 일일이 떼어 낸 사람들, 난간에 담장을 높이 쌓은 사람들, 전화기를 설치한 사람들, 24시간 상담 전화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 구조선 앞에서 다리 위를 늘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서 얼쩡대면서 바람을 쐬다가, 눈물투성이 여학생이 흘린 연습장을 주워 보던 길 가던 행인 한 명까지, 모두 똑같은 마음을.
그것이 어떤 마음이었느냐, 여자는 묻지 않지만 남자는 대답한다.
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한 번만 더 버티고 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기어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여자가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나의 해피 엔딩을 바랐다는 건가요?
당연하지.
그 사람들이 모두, 언젠가는 내가 기어코 행복해지리라는 걸 믿었다는 건가요?
물론이지.
여자가 웃는다. 남자는 웃지 않는다. 대신 손수건을 꺼내 여자의 뺨에 대고 가만히 눌러 주었다.
* * *
“그래, 안 들키고 무사히 들어갔어?”
“야, 아 진짜. 말도 마. 내가 진짜, 여기서 회사까지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아는 사람 100명 만났다, 100명! 아니 선글라스 스카프 다 쓰고 뛰는데 어떻게 날 그렇게 잘 알아보지? 안녕하세요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최홍연 실장님, 최 실장 오늘 패션이 굉장해. 내가 아주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겠어, 이거 어떡해야 해, 엉?”
뒤에 팽개쳐 두고 온 동생이 자꾸 신경이 쓰였던 홍연은, 결국 금쪽같은 반차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똑같은 파스타집에서 똑같은 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저녁 메뉴를 고르고 있던 동생을 보니 기가 막혔다.
“그래도 전무님 눈에만 안 띄면 됐지 뭘 그래.”
“안 들키면 뭐 해! 차라리 농땡이를 들키는 게 나았을 거 같아! 나 내일 출근 어떻게 해, 최홍시!”
“오빠가 언제부터 그렇게 낯짝이 얄팍했다고 그래.”
“그으래, 나 입사 면접부터 작년 연봉 협상 때까지 해마다 철가면 전설을 찍고 있다, 왜.”
한참 투덜대던 홍연은 토마토토르텔리니로 이른 저녁을 먹고 있는 동생을 보며 입을 비죽거렸다.
“근데 너는 왜 바로 집에 안 가고 여기서 혼자 죽치고 앉아 있는 거야? 옆에서 남들이 연애하는 것만 구경한 거야?”
“그렇게 대놓고 꿀 떨어지게 연애 행각을 벌이면 눈꼴셔도 봐 줘야지 어떡해? 내가 헤어졌다고 질투라도 해야 해?”
“질투? 눈꼴셔? 뭘 모르는 소리 한다. 네가 그 둘의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몰라서 그런다. 아이고, 전무님 시체처럼 죽어 가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식겁하네.”
홍연은 진저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동생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란만장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 두 사람 좀 특별해 보이긴 하더라.”
뭔가 이상하다.
홍시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별다른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었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그저 매일 주어진 일과를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모습뿐이었다. 특별히 화려한 것도 없었고 별스럽게 재미있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이 자꾸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진다. 자신과 동떨어진 특별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은 된다. 저들은, 철갑을 두르고 방어적인 연애만 하던 자신과 달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을 모조리 깨뜨리고 서로를 자신의 안으로 깊이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미련하다면 미련할 것이고, 용감하다면 용감할 것이다.
다만, 저 사랑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저들의 관계는 이제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못한다. 여자의 뺨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는 남자의 손길이나, 그 손을 꼭 감싸 잡는 여자의 손길이나, 호들갑스럽지 않게 조용히 웃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저런 관계를 그저 연애, 혹은 사랑이라는 말로만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낱말 너머, 더 깊고, 더 높은 곳에, 더욱 너르게 존재할 듯했다.
오빠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서, 그런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대답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내일도, 내년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아니, 삶의 끝자락까지 여전히 서로의 곁을 지키며 그 우스꽝스럽고 이상한 이름의 사랑을, 사랑으로 엮인 일상을 차근차근 이어 가고 있을 것이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는데 그냥 그렇게 되겠구나 싶은 확신이 들었다.
“오빠, 아까 그 사람들을 보니까…….”
홍시는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던 생각을 천천히 입 밖으로 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진 않았었구나 싶더라.”
“…….”
“저 사람들처럼 사랑하진 못했었구나 싶더라.”
내가 만약 저들처럼 깊이, 진심으로, 두려움 없이 사랑했다면, 헤어질 때 적어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겠지.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망정, 내 사랑이 이렇게 허탈하고 추레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뭘 선택하고 뭘 감수했느냐의 문제이긴 하지만, 저들이 대단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홍시는 드디어 속이 후련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 주변에 좋은 남자 있으면 나 소개팅이나 한번 해 줘.”
홍연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동생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본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싶은 표정이다.
“갑자기 소개팅은 왜?”
“봄이잖아? 나도 살면서 그런 연애 한 번쯤 해 보고 싶네.”
홍시는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생처음으로, 저렇게 깊고 넓고 풍부한, 혹은 운명적인, 혹은 아주아주 눈꼴신 연애 행각을 벌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던 홍시는, 한 전무가 자신과 오빠의 점심값을 대신 지불하고 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오빠에게 알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